마을정책_”그 곳에 가고싶다”

강신천 무무건축 대표

그림1 연미정에서 본 조강풍경. 남과 북이 반목하는 동안 강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또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오히려 강은 잘 보존되었다.

좋은 마을 만들기

한국의 서해안은 1970년대부터 바다를 매립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새만금 간척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이루어졌다. 계화도 간척지(전북 부안~계화도)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간척사업을 진행해 왔다. 해안선이 직선의 형태로 바뀌고 영토 면적은 증가했으며 전체 해안선의 34%는 인공해안이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던 섬마을 은 밀려오는 차량행렬로 가득하고 해안이었던 마을은 고립되어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다. 바다는 그들에게 멀어졌다. 좋은 마을 만들기를 진행하는 다른 쪽에서 대대로 살아온 생활터전인 바다를 막아 개인(사기업화)화하는 일은 바다를 이웃한 자연마을의 생태계 전체를 바꾸는 일이며 수 천 년 간 이어져 온 수많은 마을의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폐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 방조제만 보고 가지만 우리들 맴은 하나도 몰러. 마을이 이지경이 되고 보니 간척공사에 찬성한 것이 후회되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방파제를 바라보는 노인의 독백은 간척지의 마을이야기에 한정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2018년 문화체육부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원하거나 후원한 축제는 886개에 이른다. 강화군은 7개의 축재를 지원하거나 주최한다. 해마다 고려산에서도 ‘진달래축제‘가 열린다. 군은 축제가 열리는 기간(4월 10~20일)동안 약3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고 발표했다. 매우 성공적이란 뜻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관광객 대부분은 당일로 왔다가 떠나고 도시락을 싸와서 먹을 정도다. 늘어난 차량으로 인해 길만 막히지 실질적인 강화군민 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란 의견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기획에서 실행까지 모두 주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벤트 회사에서 진행한다. 강화 군민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2008~11년에는 강화군에 있는 예술단체들이 지원을 받아 주변 전시장과 공터를 이용해 전시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벤트회사가 진행한 후부터는 지역작가들의 참여는 요식행위가 되었고 그나마 주제 전을 열며 군민과 함께 참여하는 퍼포먼스 와 설치전 등을 솔선하여 진행하던 예술단체는 전시지원을 받지 못했다.

축제는 대부분 이와 비슷하다. 도시에서 축제 전문가가 오고 가요제가 열리고 간이식당이 만들어진다. 주민 중심으로 꾸려져야 할 축제가 이벤트 회사로 넘어가며 지역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도시사람들의 관광기호를 따라다니며 관광객 수는 얼마이므로 성공적인 축제라는 식의 안일함에 빠졌다. 취재에 나선 언론들은 관광객 수가 얼마인지 군수나 시장이 개회식에 참여했는지 이구동성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인터뷰 대상이 바로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벤트사이고 그를 지지한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축제는 군의 자랑거리가 되고 다음해 축제비용을 무리 없이 지원받는다. 마치 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한 것과 다름없다.

마을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1900년대 말 유럽의 도시는 콘크리트로 덥혔던 강을 복원하고 숲을 복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마을 역사성을 되살려야 진정한 의미의 복원이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리드한 미국의 생태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은 1996년 “이제 복원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발전과 개발중심 사고가 만들어낸 풍경이 더 이상 인간의 이상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유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버려진 공장지대와 슬럼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없다고 느꼈던 미국남부 조지아의 주도 애틀랜타는 버려진 순환철도를 가로공원으로 바꾸면서 오히려 여행자들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시민들은 순환철로 재생사업을“우리가 원하는 도시로 새로 만들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이 공원계획을 주도한 건축가 라이언 그라벨(Ryan Gravel)은 유럽(파리)에서 살다 고향 애틀랜타에 돌아온 후 도로가 온통 차로 가득하고 정체가 이어지는 광경을 보며 깜작 놀랐다. 그리고 늘 걸어 다니던 파리생활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철길이 공원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했어요. 2년 반 동안 매주 3일은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평소에는 같이 할 이유가 없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던 시민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였지요” 오랫동안 시와 시민을 설득한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뉴욕의 하이라인공원 또한 이미 뉴욕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뉴욕은 확실히 매력이 많은 도시지만,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단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하이라인공원을 말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하나의 도시가 그 도시 고유의 가치를 발전시키며 시민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생동성을 얻으려면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도시만의 정체성이다. 공동체 구성원 뿐 아니라 그 도시를 여행지로 삼는 중요한 이유는 그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건강한 가치 때문이다. 위의 두 재생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이미 그 도시의 새로운 지향성을 만들며 마을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리에서 프랑스혁명과 6.8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파리의 매력은 현저히 감소 될 것이다“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 파리에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존재했던 이유가 모두 파리혁명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파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폴란드는 나찌의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를 유네스코에 등재했다. 화려한 성공의 역사만 기억하고 보존했던 기존의 역사관을 탈피하고 버려진 유산과 아픈 기억 또한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는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중국에서도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열고 일본 제국주의의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자신은 필요치 않은 군사기지를 위해 땅과 자연을 빼앗긴 오키나와는 오랫동안 류큐왕국(琉球王國)으로 살았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아시아를 불안하게 하는 거대한 탄약고로 바뀌어버렸다. 그러나 긴 투쟁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밝히고 주권을 잃으면 환경의 변화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한 국가 혹은 한 도시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정체성 회복

“사람들이 옥스퍼드를 기억하게 하는 공간은 강의동이 아니라 건물 중간의 뜰입니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이런 공간들이 건축물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이곳에서 공동의 기억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정부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많은 자원이 ‘마을 만들기’ 프로잭트에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마을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와 신라 백제 그리고 멀리 고조선의 설화까지 찾아서 마을 정체성을 세우려한다. 아마 마을의 가치를 높이고 공동체 구성원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이유일 것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작은 공간, 오랫동안 저항하고 싸운 기억, 어렵게 관철시켜 복원한 본래의 이름 등은 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다.

사실 정체성이 없는 마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알맞은 혹은 뚜렷한 정체성을 원하는 것이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마을을 살리는 좋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아픈 과거를 명확히 응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최선을 다한 것이면 된다. 바이킹족이 자신의 조상이 도적으로 살았던 것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듯이 오버아머가우는 흑사병으로 사망한 조상의 역사를 받아들여 이를 축제로 만들었다. 독일과 폴란드는 나치의 대학살을 인정하며 수용소를 보존한다. 그러나 없는 정체성을 과장하거나 급하게 채워 넣으려는 것이나 좋았던 것만으로 한정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체성의 훼손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부정과 한국전쟁에서 양민을 학살한 정부와 군이 사실을 외면하는 행위 등은 정체성의 훼손이다. 과거의 행위를 다시 바꿀 수는 없지만 옳지 않은 행위를 있는 그대로 기억함으로서 더는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한 사회의 정체성회복의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림2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높이 6미터의 콘크리트로 거대한 벽을 세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벽 밖으로 내몰았다. 이 벽은 시간이 갈수록 적대감을 부추기고 공포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고유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건강한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과 공존하는 도시들

지금 세계의 모든 도시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도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 우왕좌왕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 글은 인터넷에서 퍼온 글을 편집한 것이다.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마을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할 미래의 마을은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한 마을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한다.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의 보방(Vauban)은 군 기지가 이전하면서 5000명이 사는 마을이 들어선 곳이다. 이 도시에는 길과 찻길, 심지어 노면전차가 지나는 선로에도 잔디밭이나 오솔길이 나 있다. 하우턴과 달리 보방은 자동차 운행에 제한을 두는 대신 주차장을 없애 자연스럽게 친환경 이동수단을 주류로 만들었다. 이 마을에서 집을 사려면 마을 외곽의 주차구역을 사야 한다. 차가 없거나 앞으로도 차를 살 생각이 없다면 주차구역을 사는 대신에 마을 주변 녹지 지분을 산다. 장차 주차장이 더 필요해질 경우 이 지분을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기 때문에, 녹지를 사는 것은 주민의 의무이자 투자가 된다.

1996년 화석연료 없는 도시를 선언한 스웨덴 크로노베리 주의 주도 벡셰는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다. 1인당 온실가스 발생량을 2025년까지 1993년의 70%로 줄이려는 이곳은 2030년까지 화석연료 사용을 아예 끝내려 한다. 석유 대신 나무를 쓰고 남은 찌꺼기를 모아 바이오연료를 생산한다. 쓰레기는 20가지로 분류해 재활용한다. 벡셰의 지속가능 에너지 사용 비율은 2012년 전체 에너지의 절반이 넘는 58%에 이르렀다.

일본 도쿄에는 ‘바람 부는 마을’이 있다. 도쿄 남부 오사키(大崎)역 주변은 공장지대가 교외로 빠져나가면서 1970년대에 재개발됐다. 당시 시나가와(品川)구가 난개발을 막고자 세운 원칙은 메구로(目黑)강을 끼고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국은 오사키 남동쪽 도쿄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도심으로 부는 길목이 되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60㏊의 개발 지대가 바람길이 되게 해 ‘열섬 현상’을 막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강을 따라 바람이 지나도록 도로와 건축물을 설계했다. 주택가의 건물 옥상, 벽면은 식물로 덮었다. 강변에도 녹지를 만들어 온도를 낮췄다.

캐나다 밴쿠버의 폴스크릭은 사람들이 쓰고 버린 열(熱)도 재활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마을은 ‘지역에너지시스템’을 만들어 주민들이 설거지나 샤워를 하고 흘려보내는 물을 모은다. 양수장의 작은 발전소에서는 하수도의 따뜻한 물에서 열을 뽑아내 전기를 생산한다. 이 시스템이 생긴 뒤 폴스크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4분의 1로 줄었다.

.프랑스 파리는 도시 안팎에 공유자전거 ‘벨리브’ 정류장이 1450곳, 공유전기차 ‘오토리브’ 정류장이 1100곳 있다. 파리는 2007년 벨리브가 큰 성공을 거둔 뒤 2011년 오토리브를 도입해 공유교통 체계를 완성했다. 시내든 주택가든 300m마다 벨리브와 오토리브 정류장이 있고, 시민들은 회원가입만 하면 싼 값에 어디서든 자전거와 전기차를 빌려 탈 수 있다. 반납은 아무 정류장에나 세워두면 끝이다. 1월31일 파리에서 만난 중학교 교사 마린(48)은 출퇴근에 오토리브를 이용한다고 했다. 15㎞ 거리를 왕복 10유로(약 1만3000원)에 오가지만 “기름 값, 주차비를 생각하면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파리는 시 당국이 이런 시스템을 갖췄지만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공유교통도 유럽에선 보편적이다.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삶의 질을 높여가는 도시들이 보여주는 사례처럼 환경을 좋게 하는 일은(어쩌면 그 것만이)삶의 질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다. 당연히 현대사회의 다시 되찾아야할 그리고 당장이라도 실천해야할 최선의 선택이다. 환경을 좋게 하는 일은 신념이나 의지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정체성에 기대는 것은 오히려 공동체의 자긍심을 낮출 뿐 아니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어떤 풀이 잘 자라는지 어떤 동물이 죽어 가는지, 어떤 사람이 아픈지, 어느 것이 잘못되고 무엇이 필요한지, 제도개선은 얼마나 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실행할 것인지, 주변을 정밀하게 관찰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사랑해야하는 일이다. 그 곳이 좋다는 의미는 아름다운 곳이며 사랑스런 곳이라는 다른 말이다. 누가 이런 곳을 마다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