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정책_주민자치회 전환과 마을의 변화

(사)시민과대안연구소 박인규 소장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1999년도에 읍‧면‧동사무소의 기능전환에 따르는 주민자치센터 설치‧운영 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1991년에 제1대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1995년에 지방자치단체장을 함께 선출하는 제1대 동시지방선거를 거쳐 1998년에 다시 지방선거를 치르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지방자치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주민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확 변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한 달콤한 희망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정한 주민의 대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사들 다수가 지방의회로 진출하였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단지 마을의 유지에서 합법적인 권력이 부여된 신분의 상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되는 지방자치의 현실 속에서도 ‘주민참여’라는 용어가 퍼지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마을만들기’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우리의 삶터인 마을이 성큼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마을(공동체)만들기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당시에 ‘주민자치운동’을 제기하며 마을과 지역사회를 주민의 참여 속에 바꾸어가려는 시도는 지역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 간의 경쟁과 대결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행정참여가 몹시도 어색했던 시기에 주민자치운동은 운동권의 냄새가 배어 있어 다소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와 지방자치가 경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면에서도 일천한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 선출로 대표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단체자치를 넘어 주민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주민자치를 꿈꾸었던 사람들의 이상을 담아냈던 선구적인 용어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주민자치센터의 설치‧운영과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은 마을과 지역사회를 고민하는 사회운동가들에는 지역의 주민들과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만나서 함께 논의하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마을과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일상생활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지역의 발전을 고민했던 자생조직들과 국민운동단체(관변단체) 구성원 및 지역 유지들과의 불편한 만남을 갖게 되는 출발이 되기도 하였다.

주민자치센터가 프로그램 위주의 문화센터 기능에 국한되어 운영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고 자치에 관한 권한도 없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도 안겨주었다. 그러나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주민자치위원들이 있었기에 전국적으로도 다양한 모범 사례들이 만들어지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네트워크도 다양하게 구축되어 있다.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제 주민자치위원회가 그 운명을 다해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주민자치회로의 전환을 앞두고 곳곳에서 시범사업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인천광역시 연수구가 올해 안으로 12개동 전체에 주민자치회를 구성‧운영할 계획을 수립하여 시범사업을 실시 중에 있으며, 인천광역시는 금년 들어서 자치구군별로 2곳의 주민센터를 선정하여 주민자치회로의 전환을 위한 시범실시를 진행하고 있다.

주민자치회로의 전환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주민자치위원회가 갖지 못했던 권한과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선 읍면동의 자문기구에 불과했던 주민자치위원회에 비해서 주민자치회는 마을과 지역사회의 문제를 스스로 참여해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치기구임과 동시에 민의 활동을 관이 지원하는 민관협치기구가 되는 것이다. 민관협치는 지역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해 주민들이 참여하여 행정과 함께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행정운영 방식의 일대 혁신이다. 그동안 절대 다수의 주민들이 생업에 떠밀려 정작 자신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했거나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이에 소수의 열성적인 주민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던 마을의 문제 해결의 주체가 주민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소정의 사전 교육을 이수하면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참여할 자격이 생기고, 공개모집과 기관추천을 통해 위촉되었던 주민자치위원에 비해서 주민자치회는 구성원의 수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조례의 규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공개모집 응모하고 기관을 통해 추천된 주민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정되어 모두가 공평한 상황에서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선정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또한 주민자치회 위원이 아니더라도 분과위원으로서 마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또한 주민자치위원회는 소수의 위원들만이 주민자치센터의 운영 등에 한정되어 역할을 부여받거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주민자치회는 주민의 권리나 의무와 관련없는 업무에 한해서 위탁사업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현안 해결과 미래의 구상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면서 마을계획(자치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주민총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이 마을계획(주민계획)을 참여한 주민들이 직접 의결하게 되는 것이다.

읍‧면‧동 기능전환에 따르는 주민자치센터 설치‧운영과 주민자치위원회 구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 주민참여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참여해서 행사할 권한이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마을의 사안에 대해 참여하여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 참여할 생각이 별로 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행정이 결정하고 추진하는 정책과 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침묵하거나 문제제기해도 별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해 실망하여 참여에 주저하게 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제 참여의 동기를 부여할 권한이 마을주민들에게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아직은 제도적으로도 완비되어 있지 못하고 이 제도를 운영할 주민들의 참여의식도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주민자치의 시작을 미루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지난 20년의 주민자치를 향한 시간이 허무하게 흘러가지 않아서 오늘의 주민자치회 전환의 밑거름이 되었듯이 앞으로의 20년을 바라보면서 차곡차곡 부족한 점들을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광주 광산구와 세종시에서 실시하고 있는 동장 추천제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비록 지금 당장 법규에 담을 수는 없어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요구 그리고 행정의 시행의지만 있다면 실시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읍‧면‧동장 한 사람의 역할이 마을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적지 않은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재능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마을은 만물창고와도 같다. 소중한 마을의 자산을 잘 찾아 활용하면 보물이 되고 그대로 두면 썩히게 된다. 주민자치회의 큰 물결이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주민들의 참여가 더욱 절실해진다. 아이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구경나오고 직장인이 공가를 받아 당당히 참여하며, 청소들의 재기발랄함이 유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어르신들이 지혜가 빛을 발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마을의 모습이 일상이 되고 수천명이 광장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며, 그 주장 하나하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주민총회가 한판의 축제가 되는 마을의 모습을 그려보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