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경리 선생 배다리 헌책방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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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박경리 선생 배다리 헌책방 운영했다”
  • 곽현숙 아벨서적 대표 밝혀 – “배다리는 깊은 샘”
  • 11-08-26 19:00ㅣ 곽현숙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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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다리에 살 시절, 아들 돌에 찍은 박경리 선생의 가족사진
    올 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故 박경리 선생 시집이 책방에 들어왔다. 약력난에서 1948년 인천 금곡동에서 사셨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정말일까?  확인차 바로 원주를 가보고 싶었지만, 8월 11일이 되어서야 원주에 사는 단골손님 주종미씨 도움으로 갈 수 있었다.

    먼저 들른 박경리 문학공원 해설사 말에서 새로운 소식을 듣는다. 박경리 선생이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주 크게 걸려 있는 가족사진은 배다리 금곡동 집에서 아드님 돌날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기된 마음으로 오후 1시 이후 만나기로 한, 김영주 관장이 계신 토지문화관으로 갔다.

    김영주 관장은 어머니가 배다리에 오시게 된 경로에 대해 아버지(김행도씨) 일본 유학 전공이 과학 쪽이라 주안염전에 부임하면서 1948년에 거주지를 금곡동에 둔 것이라고 했다. 아버님이 간부 직급을 가졌을 텐데, 왜 어머님이 책장사를 하셨는지 모르겠다며 박경리 선생 회고담을 김 관장은 전했다.

    김 관장은 “고물상에서 책을 관으로 사와서 분류해서 팔았는데, 희귀한 책을 만나면 책 속에 빠져들어가 집에 가져와서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라며 웃었다.
     
    책방의 익숙한 일상을 박경리 선생 삶 속에서 듣게 되니 가슴이 벅차왔다. 금곡동 집 주소를 아시는가 여쭈니 모른다고 했다. 집 모습은 기억 나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문이 있어 열면 마당이 나오는 미음자 한옥이었고, 주위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둘러 있는 동네였다고 했다. 특별히 기억 나는 일은 수녀님이 간호사인 병원이었는데 ,주사를 맞고 잘 참아냈다고 수녀 간호사가 과자를 준 일과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주안에 있는 용화사를 걸어서 다녀왔던 일이라고 했다.

    박경리 선생 독서력은 방대해서 어느 분야 전문인이 와도 깊은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은행에 근무할 때는 한겨울에 덕수궁 매표소를 일부러 자원해 추위를 견디며 세계대관 열 권을 읽어냈더니 세계사에 눈이 확 뜨였다든지, 진주여고 시절 기숙사에 누군가 읽고 싶은 책을 가져오면 꾀병을 내고 학교수업을 빠지면서 그 책을 다 읽고야 말았다는 말씀을 들었다.

    한 시간 반이나 시간을 내주신 김 관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배다리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토지문화관을 나왔다.

    해방 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몰아치던 역사의 격변 속으로 성향과 품성이 다른 사람들이 각 처에서 ‘깊은 샘’ 배다리로 모여들었다. 능동적이고 역동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치열하고 혼란한 현장이었지만, 거기서 나라의 힘은 서서히 응집되어갔다.

    박경리 선생의 배다리 헌책방 이야기는 그 현장을 실감나게 한다. 책을 아주 좋아하던 선생이 고물상에 쌓여 있는 책더미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살던 집에서 흘러나온 일본책 중엔 보기 드문 책들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선생은 사다가 보고 쌓여가는 책들과 함께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가게를 하는 방법으로 장사를 했을 것 같다. 배다리 환경은 정진력이 풍부한 선생에겐 사람에 대한 낯설음을 벗겨주고 마음의 터를 힘 있게 넓혀 나가게 한 학교는 아니었을까? 

    박경리 선생 말씀 : 책을 읽는 일은 우리에게 있는 능동적 생명의 흐름을 읽어내 정신의 참 자유를 찾아가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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