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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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세상의
온갖 물상物像 빠르게 넘던 싸리재

경동

경동(京洞)은 ‘경성(서울)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경동이란 행정명보다 흔히
‘싸리재’라고 불렀다. 토속적 이름과 달리 이곳은 한때 최신 유행을 이끌어가던 인천 최대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1961년 인천에서 신호등이
처음 켜진 것도 경동사거리였다. 빨강․노랑․녹색불이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신호등은 마냥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처럼 신문물이 흘러가고 사람과
문화가 모였던 곳이 경동이었다.

시계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제물포항에 짐을 내린 벽안(碧眼)의 외국인은 서둘러 서울로 향한다. 말잡이는 싸리재로 길을
잡는다. 우마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 초입에 들어서니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이 경작하는 양배추 밭이다.
오른쪽 언덕에는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고개길을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 개통한 경인철도이다.
시계바늘을 50여 년 전으로
당겨본다. 이제 6.25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삶의 씨앗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싸리재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던 경동에 양복점과 양화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길 양 옆으로 상점들이 빼곡히 줄을 이었다.
긴담모퉁이 길 입구 언덕에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지은 기독병원이 개원하고 주변에 개인병원도 한집 걸러 하나씩 생겼다. 더불어 약방과 약국도
속속 문을 열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2013년 10월 초순, 그곳에서 다시 시간여행을 한다. 경동파출소 앞에 섰다.
6,70년대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있던 시절에 번화가의 특급지 답게 사건사고로 늘 시끌벅적했던 파출소였지만 지금은 ‘경동치안센터’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의경 혼자 한가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행하는 사람이 없어 거리도 무료하고
파출소 안도 무료하다. 

경동에 오면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어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愛觀)는 의미를 품은 애관극장이다. 이 극장은 공인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 ‘협률사(協律社)’의 역사를 이어받고 있다. 애관극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경동거리는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한동안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대동신문 지사장이자 건설영화사 사장인 최철은
인천에서 ‘무영의 악마’ ‘해방 후 1년의 인천 뉴스’ 등을 제작했는데 그는 최불암의 부친이다.
애관극장은 영화 상영만 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유니버스 선발대회, 취업알선설명회, 국정홍보 등이 개최되었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중심지답게 정치행사도 자주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1945년 8월 18일 조봉암 주도로 인천건준이 결성된 행사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 인사를 하던 날 경동 일대가 교통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희미한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극장 사장은 탁경란 씨다. 1960년 애관극장을 재건한 이봉열 씨에게서 1972년 극장을 인수한 탁상덕 씨의
막내딸이다. 오빠가 맡았던 극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외환위기 때 부도를 맞자 그는 미국에서 들어와 경매로 이 극장을 재인수했다. 애관은
지난 2004년 5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로 변모했다.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고 있는 영화 ‘관상’과 ‘스파이’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장에 들어섰다. 평일 한낮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 안의 풍경은 늘어진 필름처럼 한가롭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두 시간 내내
까치발을 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던 헐리웃 키드들에게 애관이 존재하는 그 자체 만해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극장 뒤 언덕에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이 예식장은 6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좀 폼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거의 신신예식장에서 치렀다. 이 예식장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어 예식이 끝나면 이 야외마당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식장이 비어 있는 날짜에 맞춰 결혼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던 곳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청첩장에서 ‘신신예식장’ 활자를 볼 수
없다. 한동안 이름도 ‘신신컨벤션웨딩홀’로 고치면서 신세대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 초 모대학교에서 이 건물을 노인요양원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저 침상에 누워있는 이들 중에는 이 신신예식장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살다가 이제는 혼자돼  들어와 있는 노인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만 늙은 게 아니다. 우아했던 건물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정원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신랑신부가 새 출발을 위해 첫발을 디뎠던 경동 쪽으로 난 옛 계단 출입문도 그대로다.

이제 이곳에서 결혼행진곡을
들을 수 없지만 신신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숍이나 한복집 그리고 사진관 등 결혼 관련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에는 아예 ‘웨딩거리’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번성했던 경동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상점은
양복점이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개의 양복점이 성업 중이었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 이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기성복에 밀리고 백화점에 밀린 것이다.
모퉁이 길에서 눈에 띠는 이수일양복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가롭게 TV를 보던
이수일(71) 사장에게 옛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다 잊혀진 이야기인데 뭘…” 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이것저것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그제야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한창 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지. 추삭과 설 명절 때는 며칠 밤을
새워서 일하곤 했는데… 한때 극장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은 적도 있었지.”
그때 손님 한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이 가봉하는 날이란다. 가봉…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이내 줄자를 목에 건 이 사장의 눈빛은 금세 장인의 눈빛으로 변한다. 돌리고
재고 올리고.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통 치수를 쟀을까. 요즘 맞춤양복 한 벌 값은 대략 100만원 선. 단골인 듯한 손님은 스스로
특이 체형이라면서 양복을 꼭 맞춰 입는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 제 아버님 치수 장부도 있을 겁니다.”
오래된 장부를 들춰보면
체형이 비슷한 부자(父子)들이 대를 이어 양복을 맞춰 입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차 한잔 권하는 이수일 사장에게 커피 대신 이 동네에서 좀 오래된 다방을 알려달라고 하자 바로 양복점 옆 골목에 있는 학다방을 소개한다.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방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비걱대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색깔 조명 밑의 탁자와 의자 등의 소품이 70년대 다방
분위기를 그대로 풍겼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섹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노래가
절로 생각났다. 도라지 위스키 대신 쌍화차를 한잔 시켰다. 잠시 후에 노란자위가 둥둥 뜬 쌍화차가 탁자에 놓였다. 아, 계란 띄운 쌍화차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약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줄을 길게 선다면 이해가 갈까. 그런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던 곳이 동서대약국과 싸리재약국이었다.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십수개의 개인의원들이 함께 의료타운을 이뤘다.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사람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나
봉지채로 사가곤 했다.
동서대약국의 간판에는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가 세 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바로 옆 코너에 있던 싸리재 약국은 성병 즉효약
조제로 유명했다. 얼마 전 커피숍에 자리를 내주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싸리재는 잊혀지고 있다.    

싸리재하면
‘돌체’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돌체는 최영준, 김성찬, 정주희 등 100여명의 연극인들을 배출한 인천 연극의 산실이었다. 지난 1978년
12월 얼음공장을 개조해 약 90석 정도 되는 객석과 무대공간을 만들어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연극뿐만 아니라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관객들이
따라 부르는, 당시 유행이었던  싱어롱의 무대도 겸했다. 극단마임 대표인 최규호 씨가 마임 전용극장으로 활용하면서 지역 문화에 불씨를 키우기도
했다.
2007년 마임이 남구 문학동으로 이전하며 돌체극장은 한동안 조명이 꺼졌다. 싸리재 부근에는 돌체를 필두로 배다리예술극장,
미추홀소극장, 경동예술극장, 신포아트홀 등 소극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져 갔다. 2010년 돌체가 떠난 자리에 문화활동가이자 작가인 장한섬(39)
씨가 문화공간 ‘플레이캠퍼스’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돌체 골목에는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가구점 사이에 경기의료기가 있다. 중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차영(63) 씨가 34년 넘게 의료기점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에 병원이 많았기
때문에 한창 때는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의 절반은 환자 아니면 환자 가족이었을 것이다.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자 얼마 전 ‘업종’
겸업을 시작했다. 2층을 수리해 카페를 들였다. 천장 서까래에는 당시 상량식 때 써놓은 ‘소화 5년 4월 5일 오후 3시’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소화 5년은 1930년이다. 파인 벽에는 당시 흙과 지푸라기를 사용한 흔적들이 드러난다. 카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90여 년 전에 지어진
그의 ㅁ자 전통 한옥이 햇빛을 환하게 받고 있다.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안채에 살다가 몇 해 전 이사를 했다. 빈 한옥은 게스트하우스가 되었다.
그는 새 간판을 달았다. 경동의료기 글자 옆에 카페 ‘싸리재’를 붙였다. ‘경동’과 ‘싸리재’가 오누이처럼 잘 어울렸다. 

〈 그때, 이곳 전동

조흥은행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우체사는 처음에 외리 226번지, 경동 조흥은행 자리에 설립했다가 그 후 1898년에
내리(현 내동) 103번지에 새로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이후 김휘관 양조장이 있어 소성소주를 생산했다. 중구 중앙동 58은행 자리에 둥지를 튼
조흥은행 인천지점은 1958년에 경동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 왔다. 후에 건물은 헐리고 주차장이 되었다.

화신양복점

화신양복점은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이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한성간 최초로
전화선을 가설하여 1900년 경인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또 1902년 3월 30일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 1일에는
인천∼한성간 자석식 전화 12회선을 설치해 교환 업무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항도(港都)백화점

1954년 인천고무공업사 장범진 사장이 인천 최초의 백화점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3층짜리 건물과 진기한 양품류를 팔았지만 개점 1년여 만에 구매력 부진 등으로 문을 닫았다.

싸리재 고개

경동파출소부터 배다리 앞
대진침대 (옛 서울은행) 까지의 길을 싸리재(丑峴) 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옛날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우마차의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항구 지역의 수질이 좋지 않아 동쪽 한인지역에서 이 고개를 통해 급수를 했는데 겨울철 미끄러운 고갯길로 지장이 많았다. 그래서
1913년과 17년 두 차례 언덕을 깎았다.

애관극장
부산 출신 정치국은 인천에 와서 돈을 많이 벌었다. 개인의 호사적 취미였는지
부의 사회환원 차원이었는지 1895년 창고를 개조해 극장을 꾸몄다. 그 극장이 협률사(協律社)다. 이 극장은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섰다. 이 극장이 후에 축항사(築港舍)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1915년 무렵 다시 애관(愛館)으로 개명되었다.
애관극장은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됐다.

삼성태
양화점은 1885년 단발령이 내린 이후 양복과 양장 차림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생겨난 개화 풍조였다. 인천 최초의 양화점은 1905년 애관극장 맞은편에 문을 연 ‘삼성태’였다. 주인 이성원은 짚신 대신 바닥은
가죽, 발등은 우단이나 천막천을 댄 남자 고무신 형태의 값싸고 질 좋은 ‘경제화’를 만들었다. 이후 밑창을 개량한 만력저(萬力底) 신발은 동경
박람회에서 발명상을 수상했다.

광신제면

우리나라 면발의 역사를 새롭게 쓴 쫄면이 탄생한 곳이다. 창업주 장보성(83)
할머니는1960년대 말 남편과 함께 냉면공장을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 냉면공장은 현대시장과 제물포, 이곳을 포함해 세 곳이 전부였다. 주문에
밀려 면발 뽑는 금형틀을 잘못 끼우는 바람에 냉면 면발이 굵게 나왔다. ‘으잉, 이게 뭐야’. 잘못 뽑힌 면을 버리기는 아까워 공장 옆의
분식집에 줬다. 분식빕 주인은 다양한 야채와 함께 고추장으로 새콤달콤하게 버무렸는데 이게 대박. 그것이 현재의 쫄면이다.

비전원
1918년 1월에 설립한 행려병자
치료소 비전원은 경동 161번지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설비를 갖춘 이 시설은 일제강점기 인천에 진출해 있던 일본 불교종파가
연합하여 설립했다. 1931년 247.9㎡(75평) 규모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환자의 치료는 인천병원에서 담당했고, 환자의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상업은행
은행들은 사람을
쫓아 돈을 쫓아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주로 해안동, 항동 등에 있던 은행들은 새로운 중심지 경동으로 옮겨 왔다. 항동에 있던 상업은행은
1956년 12월 20일 기독병원 입구(경동 187번지)에 건물을 새로 짓고 이전했다. 후에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예지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한편 배다리 쪽에 있던 서울은행은 처음엔 태양당안경원이 있었고 현재는 대진침대가 영업을 하고 있다.

삼강옥

경동 95번지, 동인천에서 옛 청과시장 물산회사 건물 뒤편에 있는
설렁탕집 삼강옥은 6·25 전쟁 직후부터 해장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현재 주인인 김주숙 여사의 시아버지인 고 박재황씨가 1950년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해 밥집을 냈다. 평양옥과 더불어 국밥류를 파는 음식점으로는 인천에 남아 있는 제일 오래된 집이다. 현재는 그의 아들이
운영함으로써 3대에 걸쳐 하고 있다. 한창 때 해장국만으로 하루에 80kg 쌀 한 가마를 팔기도 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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