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도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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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복숭아
꽃 향기에 실려 온 삶과 죽음

도원동


하나가 도원동을 품고 있다. 사람들은 그 산을 모모산이라고 불렀다. ‘모모’는 복숭아의 일본말이다. 일제는 이곳을 복숭아밭으로 만들고 1906년
이 동네를 도산리(桃山里)라고 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도산시대’에서 도산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이곳은 인천의 끝이었다. 화장터와 전염병 격리 병원이 있어 생(生)과 사(死)가 혼재했던 곳이었다.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도원벌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사법(司法)살인’을 당한
죽산

1959년 7월31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하늘은 지리한 장마가 끝난 탓에 오랜만에 민낯을 보이며 맑았다. 그는 두 동료 교도관에 이끌려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섰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가족들이 맞춰 보낸 흰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에게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음 앞에 섰지만 초연한 모습이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이승만은 몇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고 나는 모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다고
생각하오.”
그는 유언을 남기고 마지막 가는 길에 입회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목사는 누가복음 23장을 읽으며
기도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들었다. 잠시 후 손과 발이 포승줄에 묶인 그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교도관이 목에 굵은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간첩 혐의 등 억울한 누명으로
사법살인의 희생양이 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989∼1961). 강화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4년제
강화공립보통학교와 관립 실업학교인 2년제 보습학교를 나올 만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일생에 전환점인 된 것은 3·1
만세운동이었다.
죽산은 강화교회 청년회에서 알게 된 독립지사 유봉진 선생과 함께 한 달 동안 이어진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옥살이를 했다. 이때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이가순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출옥 후 1920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말엔 엿장수를 해가며 주오(中央)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론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 머물며 더욱 확고한 신념을
쌓아 가던 중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경찰에 붙잡혔고 결국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돼 7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그 사이 부인 김이옥
여사는 세상을 떠났고 딸 호정은 인천 친척집에 얹혀살 수밖에 없었다.
죽산도 인천 도산정(현 도원동) 12번지에서 만 9년을 살면서 정치적
입지를 차츰 다져나갔다.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수집해 연료를 공급하는 비강조합 조합장 일부터 시작했다. 죽산은 1945년 1월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예비 검속되기도 했지만 다시 인천에 내려와 인천치안유지회를 만들며 치안유지에 각별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인천영화극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하면서 서서히 인천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이르렀고 그해 10월 인천 미군정 당국에 의해 인천시장
후보로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대중을 향한 행보의 일환으로 인천협동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5월10일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창당한 죽산은 ‘책임
있는 혁신정치’, ‘민주 우방과 제휴를 통한 평화적 조국통일’, ‘교육의 국가보장제’ 등을 담은 5가지 강령을 발표하면서 우리 정치계에 새
지평을 연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그의 주장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자유당 정권은 끊임없는 정치적 모략과 견제를
펼치며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죽산은 간첩죄, 불법무기소지죄, 국가반란단체 수괴 등의 혐의로 육군특무부대에 의해 기소됐다. 1심 재판에서는 간첩
혐의가 무죄로 판결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5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11년 1월
20일 죽산은 다시 살아났다. 그날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재심판결에서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1959년의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재심판결로 그 잘못을 바로 잡는다”라고 판결했다.   

도원동에는 죽산 조봉암의 흔적이 있다. 죽산이 1948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하기 전까지 도원동 12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소방서 바로 위  언덕에 있는 일본식 주택 골목이다. 이 골목에는 인천부(府)에서 지은 40여 평짜리 부영(府營)주택 48채가
있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시에서 대단위 택지를 조성해 지은 시영주택단지이다. 현재는 오래된 축대 위에 쌓은 서너 집이 남아 있다.
최근
모 지역신문을 통해 죽산이 살았던 집이 이곳에 현존하고 있다고 보도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5) 씨와 이웃에 살던 몇몇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죽산의 도원동 거주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다. 해방 후 이곳으로 이주해서 살아 온 유재관 (92)옹으로부터
죽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에는 주로 죽산의 조카가 기거했고 죽산은 가끔 와서 그곳에 한동안 머물곤 했어요. 그 집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얼마 전 헐리고 빌라가 들어섰지요.”
죽산이 거주했다고 하는 집에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도 죽산이 자신의 집에
살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도원동은 인천의 끝이었다. 산 밑으로 개천이 흘렀다. 개천은 지금의 제2장로교회 앞을 휘돌아 독갑다리 밑으로 해서 바다로 흘렀다. 이
개천이 옛 인천의 지경(地境)이었다. 그 밖은 부천군 문학면과 다주면이었다.
외진 곳에는 멀리 하고 싶은 험한 시설이 들어서는 법. 옛
야구장 앞 소방서가 있던,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기슭에 화장장이 있었고 바로 밑 지금의 중앙여상 부근에는 콜레라나 장티푸스 등
전염병 격리병원인 덕생원이 있었다. 덕생원의 전신은 ‘피할 피’자를 쓰는 피(避)병원이었다. 일제는 1898년 당시만해도 도시 외곽이었던 답동의
일본인 공동묘지 인근에 환자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과 의료장비, 의료진을 갖추고 피병원을 세웠다. 도시가 점차 확장되자 대표적인 기피
시설인 피병원은 외곽으로 밀려갔다. 1921년 모모산 기슭 일본군 병참사령부 수비대 터에 시설을 확충해 이전하고 이름을 덕생원이라 하였다. 대지
2719평, 건평 404평 규모에 26개실의 병실을 두고 최대 96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해방 후에도 이 병원은 인천의 전염병 관리를 담당했으나
6.25 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그 기능을 상실했다. 55년 주안동 산 5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미군의 원조로 새로운 건물을 착공해 56년
10월 12일 제인원(濟仁院)이라는 새 이름으로 개원했다. 후에 제인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남구보건소가 들어선다. 현재 보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곳에 빌라가 들어섰다. 도원동 덕생원 자리는 1954년 고 김응순 목사가 어려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경구락부를 세운다. 이것은
보합고등공민학교로 되었다가 후에 인천중앙여상으로 발전한다.  

드럼통을 펴 담장을 친
공설운동장

전염병원, 화장터 등으로 인해 한낮에도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아 피해가고 싶은 지역이었던 이곳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것은 34년에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운동장은 53년 인천에 주둔한 미군 항만사령부로부터 기름 공드럼과 목재 등의 자재를 원조 받아 새로 단장했다. 공사에
동원된 트럭이 연 9백대에 이르렀다.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에 시커멓게 타마구(콜타르)를 바른 담장이 운동장을 빙 둘러 쌓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모모산 기슭에 앉아 한가롭게 경기를 공짜로 즐기곤 했다. 그동안 3차례의 전국체전과 한 차례의 소년체전을 개최했던
공설운동장은 이제 다 헐리고 그 자리에 축구전용경기장 숭의아레나가 건립되었다. 산 위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문득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섞여
낯익은 안내 방송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 했다. “운동장 최씨, 운동장 최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
산 정상 부근에는 1976년에
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몇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건립될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역도산’의 레슬링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촬영 전, 로케이션팀이 전국을 다 뒤졌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4,50년대 일본 체육관의 분위기가 나는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도원체육관을 보고나서 뛸 듯이 기뻤다. 레디 액션. 역도산 역을 한  설경구가 마루 중앙에 설치된 링 위에서 당수
한방으로 거구를 쓰러트렸다.

전성기 때의
조일양조
철거되기 직전의 조일양조
일부 건물

산을 넘어 선화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뉴월드그린 아파트 앞에는 얼마 전 까지  오래된 건물 하나가 있었다. 남한 최초의 소주공장 조일양조장이다. 평양에 세워진 ‘조선소주’ 보다 넉
달 늦은 1919년 10월 12일 설립됐다. 일본인이 세운 이 회사의 상표는 ‘금강표’였다. 조일양조는 1925년 기계를 증설해 대량생산에
나섰고 시음행사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까지 도입해 판매량을 늘렸다.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를 맡을 정도였다. 조일양조의 소주는
만주, 사할린 등지에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사업이 잘되자 축구팀도 창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다.
조일양조장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강팀이었다. 해방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장팀 소속이었다.
그러나 1931년 기존에 사용하던 수돗물을 지하수로 바꾸려고 대형 우물을 팠다가 부근의 지하수가 모두 말라버려
주민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탱크가 폭발하는 사고도 일어나 주민과 갈등이 많았다. 이후 일제가 전쟁으로 인해 곡물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해방 후 세금 체납으로 공장이 차압되고 생산도 중단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술 산업을 위해 인천부(현 인천시)도 발
벗고 나선 듯하다. 인천부사(府史)에 의하면 1927년 인천부청 내에 ‘주류시험실’을 설치해 주질(酒質)을 개량하고 우등주를 제조함으로써
일본제품의 유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수출에도 이바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해 8월 3일 총독부를 출입하는 신문․통신사 기자단이 인천을 방문했다.
그들은 기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도착해 곧바로 조일양조장을 시찰할 만큼 당시 조일양조의 술 공장은 인천의 주요 산업시설 중의
하나였다.
조일양조는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社)를 맡을 정도로 사세가 커졌다. 사업이 잘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는 축구팀도 창단했다. ‘인천 조양’이라고 불린 조일양조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막강했다. FA컵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초대 우승과 2회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해방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 소속이었다.
해방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때문에 소주 6백석이 차압되었고 미군정에 양조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6.25전쟁 직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비어있던 공장 터는 1978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위해 건설된 실내수영장 부지로 내주었다. 그 밑에 1949년 신축된 조일양조장 별관 건물이 최근 까지 남아 있었다. 이마저도
중구청에서 주민들의 주차시설을 위해 지난 2012년 7월 표지석 하나 달랑 남기고 흔적도 없이 밀어버렸다.

50m 정도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모모산은 유동 쪽으로 경사가 급한 편이다. 옛 도원동사무소 옆에 설치 된 ‘70계단’은 가파른 산을
직코스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70개의 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율목동, 화수동 등 구도심의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옆에는
40계단도 있다. 이 계단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도원신사에서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산 정상에는 광성중․고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인천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가 1955년 구두닦이 등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인천소년수양원을 개설하면서 시작된 학교다. 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경인선 철길이 있는 큰길로 나가면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도심 속의 대장간이다. 이 거리는 2.30년 전만해도
철공소 거리였다. 쇠 두드리는 소리를 좇아 도원철공소로 들어갔다. 나종호(63) 사장이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두드리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쇠고챙이 10여개를 신문지에 싸 들고 왔다. “굴 따는 찍새예요. 굴 따다보면 구부리지거나 무뎌져요. 날 세우려고 갖고 왔어요.”
대장장이는  시뻘건 화로에 찍새들을 올려놓는다. 달궈진 찍새는 쇠망치 세례를 받는다. 불꽃이 튄다. 정말 찍 소리 못하고 매를 맞지만 덕분에
찍새는 새로운 날을 세운다.   
“40년 넘게 쇠를 두들겼죠. 예전에는 한집 건너 철공소가 있어서 닻, 대형 집게, 곡괭이, 낫, 호미
등 물론 특수 주문용 철기구도 이 동네에서 다 만들었어요.”
이제는 철공소 대신 기성품을 파는 가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거리에는
머지  않아 ‘대장간의 합창’이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때, 이곳 전동


피병원(덕생원)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병원으로 원래는 인천여상 아래쪽에 있던 것을 1898년
당시 공동묘지 화장장 부근인 답동 9번지로 이전했다 이 공동묘지에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1921년 3월 31일 도원동 12번지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 병원의 명칭은 설립당시  피할 피(避)자를 써 피병원으로 명명되었다. 인천병원 분원(1914년 4월1일), 사정병원(1914년
9월22일), 전염병원을 거쳐 덕생원으로 변경되었다. 도원동에 있던 덕생원 일대는 러일전쟁 후 일본군의 군사용지로 중대 규모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6.25전쟁 중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중앙여상이 들어섰다.

보각선원

1912년 인천의 유지 정치국의 대지를 기증받아 김적음 스님이 현
광성중고등학교 뒤쪽에  보각선원을 창건했다. 보각선원은 일본 불교의 정토진종 본원사파이나 조선인 포교의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본당과 시왕당, 칠성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광복 이후 개축한 대웅전 건물만 남아있다. 이곳은 동명초교의 뿌리가 있었던 곳이다.
설립자 박창례 선생은 1930년 4월 보각선원 강당을 빌려 ‘관서학원'(關西學院)이란 야학 간판을 내걸었다.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소년·소녀 직공 100여 명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조일(아사히)양조

조일(아사히)양조주식회사의 소주공장은 1919년 10월에 개업했다.
인천에는 양조에 필요한 맑은 물이 적어 양조가 어려웠는데 아사히양조회사가 도원동에서 지하수를 찾아내고 소주생산을 시작했다. 이 소주공장에 앞서
송월동에 아사히양조장 청주공장을 운영했다. 이것은 원래 길금주소였다. 이 자리는 한때 껌 공장과 그릇도매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독갑다리

도원동 언덕에서 내려가면 숭의동 쪽으로 독갑다리가 있었다. 다리 너머 바다에는
일제강점기에 염전이 많았다. 그 염전을 오가던 다리가 이 독갑다리이다. 이 다리는 1916년 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독갑’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숭의공구상가거리에 세워진 비문에 의하면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큰 독에 흙을 채워 그것으로 교각을
삼았다고 해 독갑다리 라고 불렀다는 설과 이 다리를 중심으로 옹기장이 있었는데 독 값을 받으러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해서 ‘독값다리’라 했는데
이것이 ‘독갑’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초기 숭의교회가 있던 곳이 도깨비산이어서 ‘도깨비다리’라고 하던 것이 ‘독각’이 되고 ‘독갑’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선화동의 유곽이 폐쇄되면서 많은 창부들이 이쪽으로 이동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중요한 손님 접대는 독갑다리 색시집에서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현재 독갑다리 일대는 크고 작은 철공소와
공구상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08년 6월 13일 숭의종합경기장 (구 인천공설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12년 지하 3층, 지상 5층 규모의 축구장 전용경기장을 건설했다. 수용인원은 약 20,300명이다. 다른 FIFA 규격의 구장보다는 작지만
아담하고 짜임새있고, 관중과 호흡하며 함께 느끼는 구장으로 설계됐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시민구단 인천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다.

시립도원실내수영장

제 59회 전국체전을 대비해 1978년 건립된 인천시립도원실내수영장은 인천 최초의
실내수영장이다. 대지 3000평,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955평에 50m × 21m 국제규격 풀장에 수용능력 1500명이다. 그 후 제
64회 전국체전을 맞아 1983년 트러스 및 지붕판을 전면교체 하는 등 전면 개보수를 하였다. 이후 1999년 80회 전국체전 등 수많은
체육행사를 치러냈다. 바로 위에 있는 광성중고는 체육시간에 이곳에 와서 수영강습을 하기도 했다.

도원교
도원교는 1955년 5월 6일 착공해 같은 해 9월 28일 개통되었다. 길이
18m, 폭 15m 로 주로 미군이 원조한 자재로 건설했다. 도원동쪽과 송림동쪽을 연결하는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창영동 건널목으로 내려와
통행했다. 개통 이후 종종 이곳에서 투신자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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