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북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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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선창가
바람, 붉은 풍등風登 흔들다

북성동

130여 전, 낯선 말투와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산으로 올라와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여지껏
맡아보지 못한 낯선 음식 춘장 볶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네들의 영사관, 학교, 사찰이 들어서면서 그곳은 중국촌이 되었다. 그 아래, 응봉산
줄기가 내처 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은 고기잡이배 포구와 선창가가 되었다. 도크가 생기기 전에는 바다의 물 끝이 경인선 철도가 끝나는 지점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다. 현재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있는 곳까지가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였다. 도크공사로 1973년 부두시설이
새 바닷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부두는 옮겨갔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비릿한 선창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10월 10일 오전
10시.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의 한 학교에서 북과 괭과리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리듬과 박자가 우리 귀에는 익숙하지는 않다. 그 소리에
이끌려 가 본 곳은 인천화교중산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화려한 사자춤을 선보이고 있다. 오늘은 대만 건국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 운동장
한편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는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휘날리고 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을 ‘차이나타운’ 답게 하는 것은
청요리집이나 중국관련 상점이 아니다. 1세기 넘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동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화교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구 북성동 8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화교학교의 정식 명칭은 인천화교중산중·소학교(仁川華僑中山中·小學校)이다. 중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1년이다. 처음 학교 문을 열었을 때는 초등학교 과정인 소학교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화교 학교교육의 효시이다.
화교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884년 인천 북성동에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설치되면서 1천여명의 화교가 거주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국 영사부의 주도로 마침내 학교가 설립되었다.
화교학교는 화교사회의 번성과 침체에 따라 그 학생수가
증감했다. 인천의 화교들은 북성동 주변에 모여 살다가 점차 주안, 용현동, 부평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곳에도 작은 화교사회가 형성되면서 학교가
세워졌다. 1946년에 주안분교, 1951년에 용현분교와 부평분교가 설립되었다. 그곳 분교에서 3학년까지 마치고 4학년 과정부터는 북성동 본교로
와서 공부했다. 그밖에 수원, 평택 등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오림포스 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밑에 있던
영미연초회사(Chemulpo Tabacco Co.) 벽돌건물을 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17, 8년 전에는 초·중·고 전교생
1500여명에 이르러 농구 코트 두개 크기의 운동장에 함께 모이면 말 그대로 ‘바글바글’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소학교 교장, 중고등학교 교장이
따로 있을 만큼 학교 규모가 컸다. 지금은 전교생이래야 400여명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 사는 화교 수는 2만6천명이며 이중 인천에는 중국
산둥성 출신 등 본토인이 800여명, 대만인이 1100여명 등 약 2천명이 살고 있다. 차이나타운 등 북성동 인근에는 120가구 500여명이
살고 있다.
학생수가 줄다보니 인천중산학교의 자랑인 중국무용단과 밴드부를 꾸려나가기도 힘들게 되었다. 1997년 9월에 창단된 중국
전통무용단은 쌍십절이나 개교기념일에 화려한 용춤과 사자춤을 선보이며 이국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예전에는 쌍십절을 손꼽아 기다려 일부러 학교로
구경 가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날이 되면 학부모와 구경꾼 그리고 잡상인들로 차이나타운 골목은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무용단과 밴드부는
인천시민의 날 거리행진에 단골손님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인천중산학교는 대만 정부의 것이다. 중국 소유가 아니다. 1992년 8월 우리나라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수교하고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했지만 화교학교는 여전히 대만 정부의 소유이고 대만으로부터 학비 보조금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8월에 1학기, 2월에 2학기가 시작하는
여름학기제 등 교육과정도 대만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화교학교에서는 우리나라 학교와 거의 비슷한 과목을 가르친다. 국문(國文) 시간에는
표준어인 북경어를 배우고 일주일에 3시간 있는 한문(韓文) 시간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는 게 다를 뿐이다.
인천중산학교 재학생이 모두
화교는 아니다. 초등학교에는 30%, 중고등학교에는 15%의 한국인이 있다. 화교 학생 중에도 아버지가 화교, 어머니가 한국인인 경우가 절반
정도로 순수 화교학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는 중국본토 출신 학생도 20여명 재학하고 있다. 대부분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의 자녀들인데 점점 느는 추세에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명 정도는 대만대학에 진학한다. 한국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주로
한의대, 공대, 무역학과 등으로 진로를 잡고 있는데 외국인학교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화교학교 학생들은 한국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과정을 거쳐야
한다. 80년대 까지는 대만교육부에서 매년 6월 한국으로 건너와 화교들을 대상으로 대만대학 입시를 주관하기도 했다. 현재 이 학교에는 30명
정도의 교사들이 근무한다. 한글선생님 한명을 빼고 모두 화교 출신들이다. 이들 대부분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만 대학에 진학해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교편을 잡은  교사들이다.
1950년대 중반 인천중산학교 졸업생 중에 이수영이 있었다. 그는 인천의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다. 1944년 인천에서 출생해 이 학교를 다니다 13세 때 대만으로 건너가 대북국립예술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다. 18세의
그녀는 1961년 미스 차이나에 뽑혔고 그해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로 입상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준(準)월드미스에 뽑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1962년 1월 25일 이수영은 김포공항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유중국 대사 부부, 화교 200여명, 미스 코리아 진선미 등 많은
사람들이 환영 나왔고 며칠 후 고향 인천시민회관에서는 시민들이 장내를 꽉 찬 가운데 ‘미스 차이나의 밤’이 성대하게 열렸다.

바닷물 닿는 곳 어디든 화교(華僑)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군인 3천명과 상인 40명을 보낸 것이
한국 화교의 효시이다, 올해로 딱 130년의 시간이 흘렀다. 1884년 4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된 이후 1910년 한일병탄 직전까지 중국인들은
서해를 건너 물밀 듯 들어왔다. 1만1천800여명 까지 증가했는데 인천에만 2천800여명이 거주했다. 중국을 오가는 정기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이 제물포에 닿으면 두꺼운 호떡을 마치 탄대처럼 들쳐 멘 중국 남자들이 새까맣게 내렸다. 초기 그들은 대부분 석공으로 일을
했다. 그들 손에 의해 홍예문은 물론 서울의 중앙청, 명동성당 등이 축조되었다. 어딜 가든 중국인들의 짐 보따리에는 세 종류 칼이 들어 있다고
한다. 조선으로 건너 온 그들은 나중에 대부분 요리사, 이발사, 포목상으로 돈을 벌었다. 간혹 본국과의 교역으로 동순태 같은 큰 돈을 번 거상이
출현하기도 했다.
북성동은 초기에 조선과 중국의 친선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선린동(善隣洞)이라고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지나정(支那町)’이라고 불렀다. 1930년 중국 영사관은 이 명칭이 중국의 국체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정정을 요구했고 인천부윤(지금의 시장)은
이를 받아들여 ‘서정’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미생정(彌生町)’으로 명명되었다. 한 때
이곳은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청관(凊館)’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의
차이나타운 골목

흔히 차이나타운 하면 짜장면 동네로
생각한다.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짜장면 없는 ‘중국집’이 있다. 중산학교 바로 정문 앞의 복래춘(福來春)은 4대째
꽁신삥(공갈빵)과 웰빙(월병)을 굽고 있는 중국 전통과자점이다. 지금은 곡회옥(曲懷玉·65) 씨와 그 아들 곡사충(曲士忠·33) 씨가 화로
앞에서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곡 씨의 할아버지는 192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월병을 팔기 시작했다. 곡 사장에게 복래춘의 웰빙 역사를
들려달라고 하자 말없이 벽을 가리킨다. 상점 벽에는 ‘월병 가계도’가 걸려 있다. 곡 씨의 가계(家系)를 그린 그 종이에는 월병의 기술을 전수한
가족들의 이름을 빨간색 테두리로 표시해 놨다. 가게 곳곳에는 월병 무늬를 찍어낼 때 사용한 나무틀 등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복래춘은 처음에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 근처에 있다가 50여 년 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중국인들에게 원래
공갈빵과 웰빙은 간식거리가 아닌 제삿상에 올리는 귀한 음식입니다. 우리집에서 만드는 과자들은 중국 산둥성 북방족의 맥을 고스란히 잇는 것들로
대만에서 만드는 남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복래춘에는 부영고, 소과, 깨과자, 팔보월병 등 공갈빵 외에도 수십 가지의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 19세 부터 빵을 굽기 시작한 곡회옥 씨는 인천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을 담아 복래춘의 포장지에는 ‘百年傳統老店’이라고 적혀있다.

춘장 냄새와 차(茶)향이 뒤섞이고 있지만 차이나타운은 엄연한 한국땅. 이 거리에서 고집스럽게 중국색(色) 없이 버티는 곳이 있다. 금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화려하게  쓰여진 한자 간판들 사이, 한글로 반듯하게 ‘현대크리닝’이라고 새겨진 이름이 낯설다. 짜장면집에 포위된 세탁소의
모습이다. 외관은 요즘 구미에 맞춰 리모델링하였는데 내부는 천장이 높은 옛 중국 건물의 형태 그대로다.
“한 120여 년 쯤 된
건물이에요. 시아버지 때부터 이 자리에서 세탁업을 한 지 50년이 되었고요. 지금은 며늘아기와 함께 가게를 돌보고 있어요. 최근에도 집세를
이기지 못해 주변 세탁소 몇 곳이 문을 닫았어요.”
세탁소 주인 박민자(58) 씨는 이야기 하는 도중에도 다리미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손은 바쁘지만 요즘 장사 재미는 별로인 눈치다. 장사가 잘 될 때는 자동세탁 기계인 인체 프레스를 쉴 새 없이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3분의 1로 줄어 기계를 쓸 필요가 없어 세탁물을 일일이 손으로 다 다린다.
20여 년 전 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때 만해도
이 동네에 여인숙과 술집이 밀집해 있었고, 뱃사람들이 양말이며 속옷까지 한짐 들고 와 정신없이 쏟아내곤 했다. 하지만 중국요리집이 하나둘 생기고
동네 사람들마저 기업형 세탁소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당시 대여섯 군데 있던 세탁소 가운데 이곳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유혹’도 많았을
텐데 50년 동안 업종 변경하지 않고 세탁업을 이어 온 것이 참 대견하다. 짜장면 집들 속에서 이제는 이 집이 이방인처럼 되었지만 긴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삼대가 기술 쌓아 온 손길이 이 세탁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이 가게는 차이나타운의 소소한 흥망성쇠를 그 속에서 몸소
지켜 본 산증인이다.

새우젓 창고를 개조한
집들이 모여 있는 ‘새우젓
골목’

차이나타운 아래,
인천역 뒤편은 바닷사람과 바다물건이 모여드는 왁자지껄한 선창가였다. 인천의 섬을 오가는 객선부두와 물위에 뜨는 잔교(棧橋)가 있었고 앞바다에서
걷어 올린 생선을 경매하는 깡시장 공판장이 있었다. 현재 이곳은 도크가 만들어졌고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인천항 8부두 정문 건너에 작은 동네가 있다. 큰길에서 살짝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새우젓
골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다. 사시사철 골목 이곳저곳에 새우젓 독이
일렬로 사열하듯 세워져 있거나 빈 통으로 나뒹굴었다. 김장철이 되면 사람들은 양동이 하나씩 들고 열차를 타고 오거나 자유공원 응봉산 고개를 지게
지고 넘어왔다. 파는 이와 사는 이의 흥정소리와 악다구니가 골목 밖으로 넘쳐나갔다. 골목에는 새우젓뿐만 아니라 건어물 가게들도 함께 있었다.
부두가 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렸다. 빈 창고와 가게에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들어와 구들을 놓았다. 쪽방촌이 되었다.

새우젓 골목 옆에는 하얀
소금이 산처럼 쌓였다. 인근 섬과 주안염전에서 들여 온 소금이었다. 소금은 가마니나 포대에 포장돼 전국 각지로 실려 나갔다. 소금을 배에서
부리던 그 앞의 부두를 사람들은 한염부두라고 불렀다. 소금공장이 떠나고 그 자리에 5층짜리 동일아파트 두개 동이 들어섰다.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새우젓골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통로와 지붕 높은 집들이 일반 골목과는 분명 달랐다. 얼마 전 낡은 외벽에 총천연색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팔순 노파의 얼굴에 색조화장을 짙게 한 어색한 모습이다.
“난장이었지. 길바닥은 늘 물기로 진창이었고 지나다니다 물건끼리
사람끼리 부딪히고,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다보니 자주 싸움박질하고…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었지. 그때가 많이 그리워.”

아파트 마당 그늘 평상에서 쉬고 있는 박치국(77) 할아버지가 잠시 옛 모습을 회상한다. 그는 평안도에서 피난 나와 북성동에 거주하면서
조그만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며 늘 바다를 끼고 살았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옛 모습의 조각 하나를 툭 던진다. “저쪽에 한번 가 봐요. 그
골목이 뱀 골목이요. 뱀 장수들이 야한 얘기를 곁들이면서 뱀과 약을 팔았어.” 아파트 담장을 끼고 도니 뱀처럼 살짝 휘어진 인적이 끊긴 골목이
나왔다, 주저앉은 집, 사람 살지 않는 집, 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이제 그곳은 뱀이 나올 만큼 스산하고 퇴락했다. 서둘러 돌아 나오려는데
뒤에서 뱀장수의 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들은 가라”

선창가에는 노점상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매일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함지박에 얼음과 함께
물 좋은 생선을 담아 인천역에서 탑승했다. 출근 시간대의 열차 안은 생선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창문을 열수 없는 겨울철이면 승객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이 노량진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열차 안은 비린내가 배어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이 땅의 억척스러운 왈순아지매들의 모습이었다.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들이다.
갈매기의 호위를 받고 만선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오면 부두는 아연 화색이 돈다. 술집 창문 넘어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와 교태 소리가 밤새 흘러
넘쳤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부두 주변에는 여인숙 등 숙박업소가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에
있던 황해여관이다. 사람이 밀려들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호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여관이 헐리고 그 자리에 중국음식점
‘청관’이 들어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택시기사에게 청관가자고 하면 잘 몰라도 황해여관 있던 곳 가자하면 그 앞에 세워줄 정도였다.

선창가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은 파라다이스호텔(옛 오림푸스) 밑 만석고가도로 옆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석축 위에 1958년경에
설립된 해무청사(인천해운항만청)가 있었다. 건축미가 뛰어난 격자무늬의 이 건물은 서울올림픽공원 정문 설계자 김중업 씨의 작품이다. 이후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헐리고 다시 짓고 93년 국립식물검역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바다와 전혀 관계없는 업체가 들어와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이국풍의 러시아 인천영사관이 있었다. 함포사격에도 살아남았던 이 건물은 74년에 철거되고 만다.

그 라인에는 아직도 그물을 비롯해 배에서 쓰는 어구들을 파는 선구점(船具店)들이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빨간 벽돌집 앞에 섰다. 이쪽저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주인이 나왔다.
“왜 찍어요?”
“아, 좀 오래된 것 같아서요”

“다 낡은 거 뭐 좋다고…”
다소 못마땅했지만 안주인은 바로 집의 이력을 술술 풀어준다. 이 집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아버지가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가 지은 집이다. 현재 4대에 걸쳐 사는 이 집은 창문틀 양식이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과 흡사하다. 시아버지가 일러 준 것에 의하면 송월동에 있는 옛 비누공장 애경사의 벽돌과 재질이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벽돌의
나이는 7,80년은 족히 됐다는 얘기다.
기독교100주년 기념탑 방향으로 몇 집 건너면 최근에 리모델링한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의 사연은 더 드라마틱하다. 얼마 전 까지 이 집의 주인은 유광준(74) 씨였다. 그는 이 집이 일제 대정시대에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일제의 대정시대는 1911년부터 1924년까지다. 그렇다면 길면 100년 짧아도 87년 된 건물이다. 5대에 걸쳐 살아온 이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데 실은 목조건물이란다.
“인천에 목조 3층집은 옛날 항도백화점 옆집하고 이 집 밖에 없었어요.”

3층까지 세워진 나무기둥들이 이 집을 지탱하고 있다. 짠바람에 쩔어서 그런지 벌레가 없어서 지금도 썩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 벽은
대나무로 엮고 짚을 섞은 진흙을 엉겨 만들었다. 92년도 작은 화재가 난 후 슬레트벽으로 덮으면서 콘크리트 건물처럼 보였다. 이 집은 원래
‘객주(客主)집’이었다. 부두 화물이나 생선의 매매를 주선하거나 위탁 판매를 하던 집이다. 나중에는 잠시 다다미가 깔린 공동주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이 건물에는 기념탑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오후 4시경 어디서 나타났는지 양동이를 들거나 캐리어를 끄는 중년여성들의 모습이 부쩍 많이 띈다. 그들의 발걸음은
급하다.
“어디들 가세요?” “포구에 가는 거요. 꽃게 사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대한제분공장 옆길로 바다에 다다르자 이미
보따리 하나씩 챙겨든 몇몇 무리들이 포구를 등지고 나온다. 초입부터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엉켜 번잡하고 소란하다. 바로 옆에서 낚싯줄을 두리운
채 한가롭게 바다에 시선을 둔 강태공들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포구에는 20여 척의 고기잡이배들이 닻을 내려놓고 서로의 어깨를 꼭 낀 채
정박해 있다. 갑판 위는 작은 어시장으로 변했다. 꽃게, 새우를 비롯해 갖가지 생물들이 물 밖에서 발버둥친다. 사람들은 배로 내려가 어부들과
직거래를 한다. 고기 한 점 얻어먹기 위해 어디서부터 쫓아 왔는지 갈매기는 공중에서 절규한다. 그 소리가 소음에 가깝다. 덩달아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난전이다. 그러길 한 시간. 거래가 끝나면서 사람들은 포구를 떠나고 갈매기마저 제 갈 길로 가버리자 바다는 이내
조용해졌다. 다시 강태공들의 세상이 되었다.
북성동 1가 1번지, 송월동에서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육교로 철길을 건너 만석동 우체국 옆길
동네를 지나가면 옛 외국인 묘지 자리가 나온다. 응봉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땅이 바다 끝에 멈추면서 구릉처럼 조금 불쑥 솟았다. 개항 이후,
주로 인천에 거주하다 사망한 서양 상인, 선교사, 외교관 가족들의 유해를 안치하려고 조성한 묘역이다. 1887년 7월에 첫 시신이 매장되었다.
뒤를 이어 상인 타운센드, 헤르만 헹켈, 의사 랜디스 박사, 청국 외교관이었던 오례당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묘는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묘역은 철도 부지로 편입되었고 지금은 높은 담장 안으로 둘러쳐져 고작 한 움큼쯤 되는 붉은 언덕에 어지럽게 줄기를
뻗은 아카시아 몇 그루만이 한에 사무치는 듯 고요 속에 기울어져 있다.
처음에 묘지를 바닷가에 자리 잡았던 것은 언젠가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묻히리라는 간절한 바람이었리라. 옛 묘역에 서니 그 영혼들이 바닷바람 따라 자신들의 고국으로 잘 돌아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 그때, 이곳 북성동

러시아영사관

파라다이스 호텔 밑, 인천역 길 건너에 있던 2층짜리 러시아 인천영사관은 1903년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경성 한국주재 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평양, 진남포 등을 관할케 하고 있었는데 1902년
10월31자로 부 영사관을 갑자기 인천에 이전 설치하였다. 제물포항을 일본만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 기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제물포 해전 후 영사관이 폐쇄 당했으며 일본 육군 운수부에서 사용했고 해방 후 우리나라 해군과 인천해사출장소로 사용하다가 1974년에
철거되었다.

해무청사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후 서울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프랑스 문화부의 고문건축가를 지낸 건축계의 대가(大家)였다. 파라다이스호텔 밑 1957년에 세워진 인천지방 해무청사는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이다. 그 건물은 1903년경에 설립된 러시아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부둣가의 번잡한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그림 그 자체였다. 해무청사는 1992년 경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특색 없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국제마라톤대회 기념비

1959년 9월 28일 ‘제1회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6.25전쟁
참전 국가 중 미국, 호주 등 7명의 외국인 선수가 참가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다. 해안동 로터리를 출발해 서울 중앙청 앞
결승점을 통과하는 경주였다. 66년 3회 대회 때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우승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참가했다. 그는
2시간17분4초의 기록으로 월계관을 썼다. 해안동 로터리는 경인간 마라톤의 출발지로서 우리나라 마라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다. 인천시는
66년 6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제1회 9.28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 기념비를 세웠다.

청국영사관(淸國領事館)

청국영사관은 청국지계가 설정된 1884년 4월에 1120평 규모로 개설되었다. 초기에는
청국이사부 또는 청국이사서(淸國理事署)라고 부르다가 1907년 무렵 정식 ‘영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894~18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잠시 폐쇄했다가 1898년 1월에 청국영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일제 말기에 재차 폐쇄되었는데 그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다.

제물포연초회사 터

미국인 해밀톤은 파라다이스 입구 언덕 아래에 인천연초회사(제물포지궐련연초회사)를 설립해
담배를 생산했다. 홍도패, 산호, 열쇠표 등의 이름이 붙은 담배를 하루 30만 갑씩 생산했다. 1910년대 담배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을 차지했고
직공수도 제조업 가운데 가장 많을 정도로 인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하지만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시행하면서 인천산
담배는 자취를 감췄다. 해방 후 이 건물은 중산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옆에는 중국인 사당이 있었다.

해망대산
현재 파라다이스(옛 오림포스)호텔이
자리한 곳으로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언덕이다. 언덕 수준이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었다.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돼 빈터로 남았다.

오림포스관광호텔

오림포스관광호텔은 1965년 12월 객실 43개로 개업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었다. 개관 당시 이 호텔에는 중국식 광동요리의 나이트클럽, 24시간 무휴의 지하 빠, 한국 명기(名技)가 특대하는 한국요리집과
기생관 등이 있었다. 67년 8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이 호텔에 들어섰다. 2000년 3월 ‘카지노계의 대부’
전낙원(田樂園)이 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파라다이스 호텔로 바꿨다.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중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 안에는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설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 22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네 명의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들은 1888년 7월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순교의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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