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송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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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시간이
멈춰선 黑白흑백 사진 그 속에 내가 있다

송림동

송림의
산들은 100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이발관, 한약방, 목욕탕, 솜틀집, 국수집… 그 산을 터전 삼아 살던 사람들의 삶의 오랜 공간들이다.
한자리에서 4,50년은 기본. 아직도 그곳에 남아 엄연한 현재의 사진첩을 구성하는 소재들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숨이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사라진 부처산
아랫동네. 이곳에 동산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성냥개비로
지은 양 집들이 산산조각 파편처럼 흩어졌고 아곳 저곳에서 부엌 가스통이 폭발해 불길이 계속 퍼졌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대한 흙더미
속에 마을 전체가 묻혀 버렸다. 외할머니댁에 놀러온 어린 남매, 새벽에 가게 일을 하고 잠시 집에 들른 주부, 폭우가 쏟아져 날품 팔 일 없어
집에 있던 가장 등 26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1990년 9월 11일 낮 12시40분,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
흔히 ‘부처산’이라고 부르는 야산 축대가 무너지면서 수백 톤의 흙더미가 21 가구가 살고 있는 가옥 12채를 덮쳤다. 이 산은 돌부처 88개가
똬리를 틀고 있던 일본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산등성이 부처형상이라 하여 ‘부처산’ 혹은 ‘부채산’이라고 불리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부처님의 자비는 없었다.
전 달부터 야산 중턱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빗물에 쓸려서 많이 기울어져 주민들은 밑 둥을 베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그 나무에 걸려 있던 흙더미가 며칠동안 내린 집중호우로 높이 15m 가량의 야산 중턱에 내려앉으면서 축대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는 합동분향소와 매몰지를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송림동의 산들은 이렇게 늘
위태로웠다.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도 늘 위태로웠다. 1900년대 초 일본군이 중구 전동 부근에 주둔하면서 일제에 쫓겨 온 사람들이
송림동 이쪽 저쪽 산등성이에 움막을 지었다. 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황해도 등 이북 사람들이 산비탈에 솥단지를 걸었다. 그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임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반백년(半百年)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6,70년대 접어들면서 공장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식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불꽃을 피어낸 장본인들이다. 송림동의 산들은 그렇게 100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송림6동

송림동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산은 송림산(松林山)이다. 송림산은 해발 58m의 아트막한 산이다. 나중에 수도국 배수지가 산 정상에
들어서면서 ‘수도국산’으로 불렸다. 송림산을 동서로 나눈다면 한쪽은 송림동, 다른 한쪽은 송현동이다. 서쪽 송현동 기슭은 대부분 재개발이 돼
‘솔빛마을’이란 동네가 되었다. 송림동 쪽은 아직 불도저의 삽날을 피해가고 있다. 떠나고 들어오기를 몇 번. 주인은 바뀌었지만 집은 그대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애초에 빈 땅에 말뚝 박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동네는 산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남의 집 마루와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들과 사람이 죽어도 관조차 돌릴 수 없는 좁은 골목이 있었다. 등 굽은 골목들은 마치 쟁기질한
것처럼 길게 산 밑으로 구불구불 내려간다. 산 아래에는 송림로터리, 현대극장, 현대예식장, 동부시장, 노동회관 등 도시 기능의 요소를 두루 갖춘
‘안 송림동’이 있다. 이곳이 송림동의 안쪽이요 그 밖은 송림동의 바깥이다. 6.70년대 송림동은 실제로 인천 도심의 끝이었으며 개건너 등
교외에서 들어오는 첫 지역이었다. 그 시절 ‘안 송림’은 일종의 다운타운이었다. 
안 송림은 지대가 낮다. 동네 옆으로 바다와 통하는
갯골이 굽이 흘렀다. 주변은 온통 미나리깡 아니면 배추밭이었다. 낮은 곳을 북돋워 평지를 만들었지만 비만 오면 물이 고였고 사리 때는 바닷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1965년도에 개교한 서흥초교 학생들은 한동안 등교할 때마다 다 탄 하얀 연탄을 들고 와 운동장에 던지는 게 일이었다. 이
벌판에 곡마단 천막이 쳐지고 원숭이를 앞세운 약장수들이 모이면서 이 땅은 활기를 얻었다.  
1960년대 초 큰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500평 규모의 2층짜리 현대극장이다. 시내도 아닌 변두리에 극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내 영화관에서 몇 달 전에
내린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했다. 한국인이 만든 ‘중국’영화와 스토리 엉성한 애로영화가 주로 올려졌다. 그나마 비가 줄줄 새는 필름은 끊어
먹기 일쑤였다. 그래도 인근 노동자와 서민들의 안식처요 시네마키드들의 더할 나위 없는 꿈의 공간이었다. 영화 대신 땅딸이 이기동, 비실이
배삼룡이 쇼를 하는 날이면 극장 앞길은 인산인해였다. 현대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이 일대는 송림동이란 명칭보다 현대극장 동네로 통했다.
주변의 상가나 가게들은 ‘현대’라는 상호를 붙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근의 대한중공업도 현대그룹에 넘어가면서
‘현대’제철이 되었다.  
현대극장은 98년 2월에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비어 있다가 지금은 할인마트가 들어섰다. 극장의 외관은 앞면만
조금 바뀌었을 뿐 지붕과 시멘트 벽 등은 개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뒷면 벽에 ‘현대극장’이라고 쓴 빛바랜 페인트 글씨는
시간의 흐름을 대변해 준다. 

현대극장 바로 옆에는 현대예식장이 있었다. 중구 용동에 있는 신신예식장과 쌍벽을 이루던 예식장이었다. 김포, 강화는 물론 서구 지역에
마땅한 결혼식장이 없었기 때문에 시외버스가 닿는 이곳에서 결혼식이 많이 열렸다. 주말이면 하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로 교통 혼잡을 빚곤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제과점과 정형외과가 들어섰다.

현대상가


뒤편으로 아주 독특한 2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중앙통로에 회랑이 길게 놓여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이 격자형으로 뻗어있다. 2층은
각 집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으며 각 동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백열등
켜져 있다. 그만큼 어둠침침하다.
이 건물의 이름은 ‘현대상가’. 아래층은 가게, 윗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이다. 상가가
건립되기 전까지 이 터는 인근에서 키운 배추 등 채소 경매가 이뤄지고 노점상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다. 70년에 현대상가 건립을 추진하면서
노점상들을 길 건너 시장 깡마당 빈터로 강제 이주시켰다. 1971년 4월 현대식으로 지은 상가를 완공하고 연면적 13평 씩 점포당 300 –
350만원에 분양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에 맘먹는 액수다.  
그즈음 쫓겨난 노점상들은 결속을 다지며 상권을 형성해 그해 12월
24일에 동부시장을 설립한다. 이후 원예협동조합공판장,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을 ‘현대시장’의 이름으로 한데 아우르며 한때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한다. 반대로 현대상가는 몇몇 포목점들이 장사를 했을 뿐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1층
가게도 값싼 주택으로 세를 주면서 점차 슬럼화 되기 시작했다. 두 시장의 신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현대상가는 지금 경쟁에서 밀려난 채
초췌하고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현대극장 못지않게 유명한 건물이 노동회관이었다. 한국노총의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실제는 지역 복지회관의 성격이 강했다. 원래는 50년대 말 혹은 60년대 초에 현대극장 자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땅을 파고 보니 개펄이 나와 포기했다. 제삼교회 바로 앞에 터를 잡은 3층 건물에는 목욕탕, 이발소, 미용실, 예식장, 식당
등이 들어섰다. 지역민에게 인기 있었던 시설은 바로 목욕탕과 이발소였다. 다른 이발소가 200원 할 때 회관 구내이발소는 30원이었다.

“영등포, 수원 등에서 날 잡아서 온 가족이 머리를 자르러 왔어요. 이발한 후 목욕하고 자장면 한 그릇 먹고도 돈이 남거든. 한창 때는
이발사만 15명을 두고 일했어요.”
2000년 동구청소년수련관이 건립되기 전, 끝까지 노동회관에 남았던 구내이발관 이송철(73)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노총이 떠나면서 회관이 폐쇄되자 그는 바로 옆에 ‘회관이발관’을 열고1 지금까지 가위를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 37세의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가위손의 대를 잇고 있었다.
현대극장 옆으로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 주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닭알탕을
주메뉴로 파는 집들이다. 닭알은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달걀이 못된 알이다. 50년 전 맞은편 현대시장 닭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닭알을 포장마차에서 얼큰하게 찌게로 끓여 내놨다. 현대제철과 인근 철공소에 다니던 노무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후 공락주점을 시작으로 형제,
창석, 왔다, 풍차, 현대주점 등 6곳에서 앞다퉈 닭알탕을 칼칼하게 끓여내면서 ‘닭알탕 거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송림아뜨렛길의 휴식공간.
특히 여름에
인기다

송림동에는
개건너-제물포역-동구청-동인천역-현대제철을 이어주는 로터리가 있다. 인천에서 숭의로터리와 쌍벽을 이루던 로터리였다. 이 로터리 밑에 사연과
곡절이 많은 지하도가 있다. 1988년 2월, 로터리 밑 땅 속을 파기 시작했다. 딱 2년 후면 3평 남짓한 점포 102개와 지하도로를 갖춘
1만1천100㎥ 규모의 지하상가가 들어선다는 장밋빛 기대감 속에 진행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시공을 맡은 회사가 넘어갔고 또
다른 시공사도 부도났다. 인천시가 93년 4월에 떠맡았지만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상가만 들어서지 않았지 지하통로는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출입문이 봉쇄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 갔고 지하도는 점차 도시의 흉물이 되었다.
2012년 8월 이곳에 빛이
들어왔다. 거의 15년만의 일이다. ‘귀신 나올 것’ 같았던 어두침침한 공간이 산뜻하게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송림아뜨렛길’이란 멋진 이름도
얻었다. 이곳에는 LED 조명을 이용해 상추와 배추, 무 등을 키우는 식물공장 ‘동이네다랑채’를 비롯해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널찍한
북카페와 사진,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가 조성됐다. 개장하자마자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특히 일본 NHK는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농산물의 안전성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송림아뜨렛길’를 취재해 방송했다.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된 것이다.

송림동과 송현동의 접경 지역인 서흥초교 옆으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있다. 사람들이 ‘똥고개’라 부르던 마루턱이다. 송림동 사람들이 수도국산
옆으로 해서 화수동, 만석동으로 다니던 길이다. 이 고개를 따라 배추, 호박, 복숭아 등을 키우는 밭이 널려 있었다. 그 밭에 똥거름을 주었기
때문에 ‘똥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구덩이에 아이들이 빠지는 난감한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지금의 송림동 이마트
자리는 매립하기 전에 바다였다. 인분을 실은 똥차들이 이곳에다 똥을 버렸다. 바로 옆 염전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은 변소에 빠트린 동전을 줍기
위해 똥차를 따라 다녔다. 실제로 똥차는 가끔 동전을 흘리고 다녔다.
송림동이 인분과 맺은 인연은 오래 갔다. 1977년 똥고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림6동 옛 대주중공업 뒤편, 현 백병원 부근에 송림위생처리장이 설립되었다. 이전에 숭의동과 연희동 등에서 처리되었던 인천 전역의
분뇨가 9천평 규모의 이 ‘똥공장’에서 처리되었다. 여름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역한 냄새에 주민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는 밥 먹는 시간을 배꼽시계에 맞추질 않았어요, 처리장이 가동을 멈춰야만 그때 숟가락을 들었을 정도였어요. 어휴, 냄새 대단했지…”

송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윤배(55) 씨는 불현듯 기억 속의 냄새를 맡았는지 미간이 살짝 접혔다. 이 처리장은 1996년 9월에
폐쇄되었다. 이 부지는 2014아시아경기대회 배구장으로 재탄생했다. 똥공장 자리에 세워진 배구장의 이야기는 송림동의 극적인 발자취의
하이라이트이다.

< 그때, 이곳 송림동 >

인천도축장

현 동구청 자리는 인천보건조합이 운영했던 도축장이었다. 1933년판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도축장은 1916년 9월 6일에 허가를 시작으로 부지 평수 689평, 건물 평수 99평, 직원으로서는 부서기 1명, 도살부 3명을 두었고
소와 돼지를 중심으로 연 평균 6천 여 마리를 도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때려 잡는다’는 일어(日語) ‘たたく다다꾸’에서
와전된 ‘다데기깐’으로 불렀다. 1968년 1월1일 동부, 북부 출장소를 합병하여 도축장이었던 이곳을 동구청사로 사용하였다. 초창기에는 도축장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구청 마당에는 도축장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도축장은 74년까지 인천시
관영으로 학익동 제 1도축장, 갈산동 제 2도축장으로 운영했고 이후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구월동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십정동에 있다.     

송림동 성당

1956년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유명한 이희태에 의해 세워진 성당이다. 이희태는
명수대성당(1954), 혜화동성당(1960) 등을 통해 입방체형의 근대 성당건축을 시도해 그의 건축물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송림동 성당은 종탑과 본당이 구분된 독특한 구성으로, 건립 당시 성당주변의 한옥을 의식한 듯 모던한 벽면에 리듬감있는 창호계획과 재료를
달리 적용하여 분절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6.25 전쟁 후 가톨릭 구제회에서 밀가루와 헌옷 등 구호물자를 보내 주었는데 이걸 받으려 성당에
나오던 ‘밀가루 신자’가 많았다고 한다.

송림리 수켓장

인천은 축구, 야구 등 서양의 스포츠들이 들어온 개항장이었다. 겨울철 대표적 스포츠인
스케이트도 비교적 많이 보급되었다. 1925년 제1회 전(全)인천빙상경기가 한적한 교외였던 송림리 옛 현대극장이 있는 송림오거리 부근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정식 빙상경기장이라기보다 공터에 물을 채워 얼린 경기장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스케이트를 ‘수켓’이라고 표기했고 경기장을
‘수켓장’이라고 불렀다. 3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스케이트 경기를 숭의운동장에 물을 얼려 빙상장으로 만들어
치렀다.

동명초교

설립자 박창례 선생은 1929년 도원동 보각선원에서 관서학원으로 시작해 1931년 유동에
일본인의 땅을 빌려 현 동명초교의 근간이 된 ‘동명학원’을 설립한다. 그러나 1939년 일제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을 딴
간판은 내걸 수 없다’는 트집을 잡아 학교 이름을 일본식 이름인 ‘소화강습회’(昭和講習會)로 개명했다. 1946년 8월 일본 동경대
전염병연구소의 실험용 우사를 인수해 지금의 동명초교 터를 만들었다.

인천
두묘제조소
일제강점기 때 송림동에는 동양에서 유일한 두묘 제조소가 있었다. 두묘(痘苗)란 우두약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한우인 송아지에서 뽑는 두묘를 일본. 중국, 미국 등 전 세계로 공급했다. 두묘는 봄 가을 2회에 걸쳐 제조되었는데 1회 생산품이
350만명 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송아지 값이 1000원이었는데 우두로 사용하면 1년에 한 마리에서 약 3만원의 수입을 올릴 만큼 질이 좋았다.

노다 장유공장


1905년 11월 10일 모기와 다카나시 가문이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부 송림리 19통에
일본장유주식회사 인천공장을 설립하였다. 일본장유주식회사는 8대를 걸친 ‘노다장유’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1917년
노다장유주식회사(野田醬油株式會社)로 명칭을 바꾸고 된장, 간장, 조미료, 향료, 청주, 소주 등을 생산하는 종합식료품 제조회사로 변신하였다.
일본간장과 일본된장을 대량으로 생산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과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장류를 판매했다. 당시 인천은 간장과 된장의 주원료인
대두를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50년 인천동부경찰서가 노다 장유공장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인천경찰기동대가 사용하고 있다.

계명원


현 진로아파트 자리에 1951년 11월에 세워진 고아원이다. 60년대 계명원의 원생들은
3, 4년씩 늦은 나이에 인근 서림초교에 진학했는데 이들이 들어간 축구부 등 서림초교의 운동부는 인천 시내 학교 대항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96년 10월 21일 강화군 양도면으로 이전했다. 

인천상업강습회
1938년 7월 율목동에서 인천 10대 부호 중 한 사람이었던 이흥선의
주도로 인천상업강습회를 설립했다. 이는 조선인의 순수 재원으로 운영된 유일한 민족학교였다. 39년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했고 1941년 11월
영원농원 배 밭이 있던 송림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고 1946년 동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박문여자중고등학교
1940년 5월 18일 송림심상소학교(현 송림초등학교)의 교실 두
칸을 빌려 2개 학급에 120명(조선인, 일본인 여학생 각 60명)을 모아 첫 입학식을 치렀다. 당시 인천부에는 여학교로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가
유일했기 때문에 이 여학교의 개교는 인천부민의 염원을 이룬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9월 30일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했고
1956년 8월 30일 부평교사에서 현 송림동교사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 학교는 곧 송림동 시대를 마감한다. 박문여중은 2014년 2월에,
박문여고는 2015년 2월에 연수구 송도동으로 배움의 터를 옮긴다.

동산공원(東山公園)
‘70년대 인천시사’에 의하면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3호로 지정된 곳으로 원래 도시계획상 아동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후 무선고등학교(현 대헌공고) 부지로 일부 편입되었고 특히
선인재단이 ‘무허가’로 체육관을 건설함으로써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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