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송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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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구텐
모르겐! 독일인의 풍물이 그곳에 녹아있다

송월동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응봉산의 뒤편에서 격동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동네. 그 바다를 통해 기상관측, 전기, 비누 등
신문물의 보따리가 들어 왔다. 송월동은 어머니 품과 같은 동네다. 긴 항해를 마친 뱃사람들과 수 십리를 달려 온 철마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제 이 동네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천진난만한 꿈을 꾸며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하얀 원통을 머리에 이은
듯한 모습이 특징이었던 옛 인천기상대

참 묘하다.
인천이나 서울이나 기상관측소가 들어앉은 자리가 둘 다 송월동이다. 송월동(松月洞)이란 한자도 같다. 서울 기상관측소는 1907년 경복궁 근처
중심지역 날씨를 측정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금도 이곳 마당에 첫 눈이 내려야 서울 첫 눈으로 발표된다. 이보다 먼저 생긴 인천 기상대는 우리나라
기상관측소 중 가장 큰 형님뻘이다. 공교롭게도 두 관측소가 ‘송월’이란 이름과 연관이 있어 흥미롭다. ‘소나무에 걸친 달’의 상태가 기상 관측의
중요한 요소였는지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해 본다. 인천기상대의 주소는 정확히 말하면 전동이지만 정문이 송월동 쪽으로 나있어 심리적으로 충분히 이
동네에 속한다. 전동 쪽으로는 인일여고와 긴 담으로 굳게 막혀 있다.
북위 37.28˚ 동경 126.38˚ 응봉산 꼭대기에 등지 튼 이
기상대는 자유공원 사생(寫生)대회의 단골 스케치 포인트였다. 많은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높게 솟은 철탑과 원통형의 하얀 건물의 독특한 기상대를
도화지에 그려 넣었다. 그림으로는 친근했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고 육중한 철문으로 굳게 닫힌 이곳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갖게 했다.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기상대는 이제 출입이 자유롭다.
인천기상대가 문을 연지
100년이 되었다. 일제가 1905년 1월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초대 소장으로 일본 중앙기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의 권위자 와다 박사가 부임했다. 그만큼 인천측우소의 위상은 중요했고 막강했다. 날씨 파악은 한반도 진출의 중요한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국내 13개 도시에 있는 측우소는 물론 만주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했다. 일본 기상대,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
‘꽝’ ‘꽈앙—’
100년 전 관측소 마당에서 쏜 대포 굉음이 매일 인천시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다. 대포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12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해방 전 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관측소에서는 매일 정오에 공포를 쏘았다.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정오에 대포를 쏜다 해서 흔히 응봉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공포(空砲)에 대한 공포(恐怖). 대포 소리에 맞춰 밥은
먹었겠지만 속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시각을 알려는 명분으로 오포를 쏘았다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경기(驚氣)가 날
정도로 심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스트레스의 차원을 넘어서 그 대포 소리는 식민지 민초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으름장이었다.

이제 사생대회 아이들은 그 건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 유서 깊은 원통 모양의 건물이 지난해 사라졌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건물이었다. 기상대 측은 1960년대와 80년대에 증·개축했기 때문에 문화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소리 소문도 없이
철거했다. 인천의 근대문화유산 하나가 다시 한번 손을 탄 것이다. 10월 22일 새 청사가 들어섰다. 낯설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놓인
기상대 봉우리의 실루엣이 영 어색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옛 본관 옆에 있는 작은 빨간 벽돌집은 그대로다. 이 건물은 언뜻 봐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196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방으로 쓴 것 같은데 불탄 흔적도 있어요.”
기상대
직원의 설명이다. 사실(史實)과 설명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 지난 2010년 2월 인천기상대에서 발행한 ‘인천기상대 역사를 찾아서’라는
자료집을 보면 이 창고는 1923년 4월에 준공된 것으로 적혀 있다. 90년이 된 고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여론을 의식해
기상대 측은 이 창고 건물은 보존하기로 했다. 인천기상대 역사, 기상 현상, 예보 생산 과정, 날씨 체험관으로 구성된 기상역사관으로
탈바꿈한다.         
기상대를 막 나서는데 정문 옆의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라는 작은 푯말에 눈길이 갔다. 이곳이 바로
한국최초 지진관측 시발점이다. 1905년 3월24일 인천관측소 안의 작은 방공호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었다. 세월이 흘러 1995년에 노후화된
장비는 모두 최첨단 디지털 장비로 교체되었다. 이 관측소는 지난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보도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날 이 지진계의
바늘은 백령도 앞바다의 수중음파가 전달되면서 잠시 몸서리를 쳤다. 

기상대 정문 앞으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자유유치원이 있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서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이 때문에 자리 바뀜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총독이 눈독을 들일만큼 좋은 위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과 국군이 번갈아 사용하다가 인천상륙작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송월초등학교가 그 곳에
세워졌는데 후에 건너편으로 이전하였고 그 자리에 북성초교가 다시 개교했다. 북성초교는 얼마안가 송월초와 통합돼 폐교된 후 그 자리에
인천교육과학연구원이 들어섰다가 현재의 유치원에 자리를 내줬다.
어스름해지는 시간, 가방을 든 몇몇 사람들이 자유유치원 아랫길 계단을
서둘러 오른다. 허름한 2층 집 창문에서 간간히 새나오는 불빛이 골목을 밝힌다. 이곳은 인향야학이다. 7. 80년대 풍속도의 하나였던
야학(夜學)이 여전히 이곳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향야학은 문을 연지 51년이 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야학이다. 그 역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학교 건물을 찾아 지금까지 이사 다닌 것만 11번이다.  
인향야학은 1962년 도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동장이 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66년 용현2동 재건회관으로 쫓기다시피 옮겼다.
베니어판을 쪼개 칠판으로 삼고 절에서 불공하고 남은 양초를 모아다 불을 밝힐 만큼 열악했다. 교실도, 학습교재도 어느 하나 변변치 못한
여건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2년 동안 천막 교실 생활을 한 적도 있고, 한 정비공장의 2층을
빌려 교실로 쓰다 공장이 부도가 나서 내쫓기기도 했다. 
영어 교사로 봉사 나왔던 미군 두 사람이 부대에 있는 철근과 시멘트 등의 자재를
지원하겠다고 해 당시 빈터가 많았던 학익동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짓다 말다 하기를 반복하던 겨울 어느 날 강한 바람에 부실하게 골조만
올라가던 학교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다. 이후 몇 번의 짐을 싼 끝에 몇 년 전 이곳 옛 송월동공부방 자리에 다시 불을 켰다. 요즘은 거의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주경야독’의 단어가 이곳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수업은 오후 6시 30분부터 4시간씩 하는데 2교시가 끝나면
라면이나 김치찌개 등을 끓여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지난 50여 년 동안 2000여명의 학생과 900여명의 선생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구한말 송월동에는 독일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했다. 산 남쪽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서 여유롭게 살았다. 그런 이유로
신문물이 들어와 이곳에서 발아하기도 했다. 1905년 6월 구미인, 청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 39명이 함께 출자해 인천전기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 지금의 송월동 남경포브 아파트 자리에 발전소를 차렸다. 독일에서 가져 온 100㎾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2대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전기가 들어 온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전등 관련 광고를 보자. ‘자는 수밧게 업던 암흑세계를 백주(白晝)와
가티’ 밝힌 전등은 경이의 존재였다. ’캄캄한 세상에서 불빗을 모르고 살든 우리 조상을 도라볼 때에 일면 가이업슨 생각‘이 들
정도였다(1926년 8월 5일자).
개업 한 달 만에 1000여개, 2개월 후에는 1800여개의 등이 설치돼 인천의 밤을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인천전기는 한동안 그런대로 호황을 누려 1910년 말에는 690가구에 3860 등을 공급했다.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데다가
새 설비를 도입할 능력도 없어 결국 1912년 7월 일한와사전기에 매각되고 말았다. 그 후 이 회사는 1915년 9월 경성전기로 변경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인천의 발전소를 폐지됨으로써 서울 용산에서 전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신문물 보따리에 싸여 들어온 것 중에 비누가
있었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경이지만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오다’가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를 설립하면서 부터다. 1954년 제주도 사람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주)’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애경’은 바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경 사사(社史)에 의하면 ‘미향’이란 브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이다. 앞서 언급한
채몽인 씨는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남편이다.

지금도 송월동에는 일본식 주택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송월교회 밑으로 모양이 비슷한 일식 주택이 눈에 많이 띤다. 동일방직과 이천전기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집들이다. 비탈에 집을 짓고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서 골목이 아기자기 하게 이어졌다. 
세월에 못 이겨 퇴락하던 이
골목이 최근 대대적으로 화장(化粧)을 넘어 분장을 했다. 골목에 들어서면 마치 테마파크 입구에 들어선 느낌이다. 가스 밸브함을 이용해 만든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 나무꾼을 비롯해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 이름만으로도 친숙한 동화 속 장면들이 벽을 컬러풀하게 수놓았다. 골목
이름도 아예 ‘송월동 동화마을’이라고 붙였다.
“노인네들만 사는 동네라 수리하고 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그냥 살아왔는데, 이렇게
해주니 고맙지. 손자들이 오면 좋아할 것 같아요. 요즘엔 서울 사람들이 와서 사진도 많이 찍고 가더라고.”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주민 강태용 씨는 이제 곧 자신의 집도 칠해 줄 거라면서 큰 기대를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삶도 동화 같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램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송월교회 내리막길 옆에는
우물이 있다. 앞에는 녹슨 펌프도 있다. 길 가던 주민에게 물으니 오래전에 폐쇄 되었다는 말과 함께 밑에도 우물이 하나 더 있다는 정보를 준다.
밑의 우물은 뚜껑이 열쇠로 잠겨 있지만 얼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 동네에서 60년 가까이 살아 온 오익환(88) 할아버지는 송월동의
변천사를 상세히 꿰차고 있다. 그는 천안에서 철도 관련 일을 하다 해방 직후에 인천역 근처로 전근 오게 되었다.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을 때는 이 동네에 배를 부리는 선주(船主)들이 많이 살았지. 저 우물들 앞에 오징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씻었던 게 엇그제 같은데… 암튼
이 동네는 산 밑이라 그런지 물이 좋아. 아무데를 파도 물이 나왔지.”
송월동에는 일본식 가옥들뿐만 아니라 오래된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송월초등학교 밑으로 가면 인천에서는 이제 보기 드문 기와집 골목이 나온다. 1950년대 중반에 조성된 도시형 한옥촌이다. 건립된 지 반세기가
넘다보니 곳곳이 낡았지만 골목에는 기와집의 우아한 자태와 기풍이 여전히 흐른다.
만석동 쪽으로 언덕을 내려오면 경인전철 변에 닿는다.
기찻길 옆에 송월시장이 있다. 1937년 2월 송월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는데 가축시장의 기능을 하고 있어 흔히 ‘돼지장터’라고 불렀다. 만석동과
이어진 건널목에 육교가 생겼고 철로변에 높은 담이 쳐지면서 시장은 급격히 퇴락했다.

인천역은 송월동 동선 안에
있다.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이곳을 인천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동인천역이 한때 상인천역이라 불린 것에 대한 댓구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60년 9월17일에 건립된 이후 특별한 ‘성형’을 하지 않은 그대로다. 덕분에 시대물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한다.
허벅지 근육통이 생길만큼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조바심 나게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없이 광장에서 개찰구를 거쳐 플랫폼까지 평형으로 걸어간다.
무엇보다 사람이 열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열차가 다소곳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칸에 들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편안한
곳. 경인선 중에 이만한 순수함과 소박함을 지닌 역사는 없다.
인천역은 초창기에는 사람보다 화물을 주로 처리했다. 월미도가 유원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한때 앞문보다는 월미도 방향으로 난 뒷문이 더 발달하기도 했다. 광장 옆 구석에 인천역이 처음
생겼을 때 심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라일락이 힘겹게 서있다. 인천역은 열차에게 엄마 품이다. 3시간 가까이 바다를 향해 달려온 경인선
기차는 인천역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렇게 인천역은 한 세기 넘게 사람과 열차를 품 안에 받아주고 다시 라일락 향으로 기운을 회복 시켜서 먼
길로 보냈다. 

〈 그때, 이곳 송월동

인천기상대

1899년 인천, 원산, 진남포 등 해관에 기상관측소가 설치된 5년 후인 19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인천기상관측소’가 설치되었다.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여관에서 임시 기상사무실을 개설하고 기상관측을
시작했다. 이어 1905년 현 위치에 청사를 짓고 지금까지 100년 이상 근대기상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기상대 창고
1923년 4월 본관 건물 옆에 준공된 고건축물이다. 이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인천기상대 건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한때 기상대가 방을 들여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상대 측은 이
창고 건물을 보존해 인천기상대 역사, 기상 현상, 예보 생산 과정, 날씨 체험관으로 구성된 기상역사관으로 탈바꿈할
계획이다.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
인천기상대 정문 한 켠 방공호 안에 있는 지진관측소는 한국최초 지진관측의 시발점이다. 우리나라의
지진관측은 1905년(대한제국 광무9년) 3월24일 인천관측소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이 측정계는 설치 이후 1943년까지
인천의 지진을 측정했으나 1945년의 광복과 1950년 6.25 전쟁으로 중단된 뒤 20여 년 동안 암흑기를 보낸다. 1963년 3월 기상청은
지진측정기가 설치됐던 그 자리에 세계기지진관측계를 다시 설치한다. 이 지진측정기는 1995년 7월 디지털 지진측정기로 교체되기 전까지 인천 해상
등 인천지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 25차례를 측정한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 전기 발전지

인천에서의 전등 사업은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 39명의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로부터 시작된다. 자본금 12만5000원으로 세워진 이 회사는 1906년4월 당국의 특허를 얻고 옛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
자리에다 발전소를 차렸다. 100㎾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2대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처음 발전소가 있었던 남경포브 아파트 내에는 ‘인천 전기
발전지’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아사히 양조장
청주공장
1919년 10월 도원동에 아사히양조 소주공장을 개업했다. 인천에는 양조에 필요한 맑은 물이 적어
양조가 어려웠는데 도원동에서 지하수를 찾아내고 소주생산을 시작했다. 이 소주공장에 앞서 아사히 양조는 송월동에서 아사히 양조장 청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길금주소소였다.

파울 바우만
주택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1907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을 두 번이나 지내 사이또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총독 사이또는 1919년 8월 13일 조선에 부임하러 온 날
당시 경성역에서 나운규 열사의 저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인천상륙작전 시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고 1955년 3월 30일 송월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송월시장

현재의 만석고가교(인도교) 옆에 1937년 2월 설립된 가축시장이다. 질퍽한 부지에
특별한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키우던 곳이라 하여 흔히 ‘말깐(말간)’ 또는 돼지장터라 불렀다. 해방 후 만석동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많이 이용해 한때는 꽤 번창했던 시장이었으나 철도 길이 담으로 막히면서 만석동과 단절이 되면서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애경비누 이야기
1883년 개항 직후,
인천에는 서양의 증기선들이 싣고 온 박래품(舶來品)들로 넘쳐났다. 그동안 양잿물을 사용했던 조선에서 신식 ‘비누’가 날개 돋힌 듯 팔리자, 인천
거주 외국인 몇몇이 1895년에 비누 공장을 차렸다고 하나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정작, 비누가 인천에서 생산된 것은 1912년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가 세워진 후부터였다. 1962년 경쟁이 치열해지자 애경은 본사를 영등포로 이전해 갔고, 오늘의 ‘애경그룹’으로 성장했다.

오포와 싸이렌
오포는 1906년 2월 처음
실시했다. 홍예문 위에 있던 인천상비소방소의 감시탑에서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던 192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점심때가 되면 공습경보를 알리는
듯한 긴 사이렌 소리가 정오를 알렸다. 광복 후, 사이렌 소리는 정오가 아닌 자정에 울렸다.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청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를 통행금지 시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금 싸이렌 소리는 인천의 밤하늘을 매일 엄습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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