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사라)지다
그
길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려 있다
옥련동
조개
파먹으면서 살던 외딴 동네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해안가에 무의도에서 파온 하얀 모래를 깐 인공유원지가 들어서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인천은 사람사태’라는 기사가 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25전쟁 후 송유관이 끊임없이 이어져 들어오고 마을사람들은
기름 물을 먹고 살아야했다. 아낙들이 조개 흘리던 그 길, 실미도 대원들의 울분의 총성 한발이 비극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름에 관한 불편한 진실 하나. 독도(獨島)와 송도(松島). 섬 도(島)자가 붙었지만 하나는 섬, 다른 하나는 섬이 아니다.
연관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이 두 지역이 이름으로 얽히고 얽혀있다. 마쓰시마(松島)는 18세기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부르기 이전의
이름이다. 일제는 이 ‘송도’를 군함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활약했던 군함 송도함을 기리기 위해 한반도 내 몇
지역에 ‘송도’라는 쇠말뚝을 박아버린다. 1937년 인천 옥련리는 부산과 포항 지역에 이어 ‘송도정(松島町)’으로 강제 개명된다.
구한말
옥련동 일대는 한진, 옥골, 독배, 대암 등 자연마을이 있었던 ‘원우이면(遠又爾面, 일명 먼우금)’이었다. 일제의 쇠말뚝은 뽑히기는커녕 더 세게
박히게 된다. 2005년 7월, 우리 스스로 동춘동 앞바다 갯벌을 매립해 만든 국제도시의 법정동명을 ‘송도동’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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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옆 노적산 산줄기가
끝나는 양지바른 곳에 옥골이란 오래된 동네가 있다. 바다 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오그라져 든’ 마을이라 옥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곳곳에
동네의 연륜을 대변해 주는 기와집 두어 채가 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들이다.
길에서 동네 어르신 이창렬(73)씨를 만났다.
“우리가 덕수 이씨인데 고조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매립되기 전까지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그물 치고 갯벌 캐고 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늘 풍요로웠죠. 반농반어의 평화로운 부락이었는데 수인선이 지나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옛
모습을 볼 날도 얼마 안남았어요.”
새로운 수인선은 옥골을 반으로 가른다. 기찻길에 길을 내주기 위해 동네 곳곳이 파헤쳐져 어지럽다.
재개발 계획대로라면 이 마을은 흔적도 없이 전체가 엎어질 것이다.
옥골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오랫동안 기름으로 뒤범벅돼 땅이
신음을 하고 있다. 한동안 옥골은 기름골이었다. 1950년대 초 시립사격장 인근 산기슭에 미군 유류창이 자리 잡았다. 수원비행장 등 수도권 일대
미군에게 기름을 공급키 위해 지름 30m의 대형 유류저장탱크 수 십 개가 산 기슭 전체를 뒤엎었다. 탱크 하나당 용량은 1천5백 드럼을 담을
엄청난 크기였다. 인천항으로 유조선이 들어오면 기름은 POL(미군유류보급창, 옛 SK저유소)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곳까지 와서 저장탱크에
시커먼 기름을 콸콸 쏟아 부었다. 송유관 파이프는 이음새가 자주 터져 논과 밭을 흥건하게 적시곤 했다. 추운 겨울에는 바다의 큰 얼음조각이
파도에 밀려와 종종 파이프를 터트렸다.
기찻길 옆 사람들은 당시 귀하디귀한 석유를 땔감으로 펑펑 땠다. 기름이 새는 이음새에 깡통을 받쳐
기름을 받았다. 미군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순찰을 돌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철철 흘러나온 석유를 모두
깡통으로 받아낼 수는 없었다. 철철 넘쳐난 기름은 땅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비가 오면 기름이 물과 함께
고였다. 물에 떠서 두껍게 말라버린 기름층을 회 뜨듯 양철로 벗겨서 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훌륭한 땔감이었다. 왕겨에 버무려 때면 한줌의 겨만
갖고도 하루 종일 거뜬히 불을 땔 수 있었다. 남는 것은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기름도 등급이 있었다. 짙은 하늘색을 띠는 항공기 기름은
최고가였고 그 다음이 붉은색의 휘발유였다. 이런 기름은 바로 돈이 되었다. 나머지 기름들은 난방용 아궁이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집집마다 장독이나
드럼통(도라무깡)에 보관했다. 돈이 되다 보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전문적으로 기름을 훔치는 일당들이 생겼다. 당시 신문을 장식한 기름 절도
기사를 보자.
‘경기도 경찰국 수사과에서는 최근 해상과 육지에 부설된 미군 송유관을 뚫고 휘발유 300드럼을
절취한 두개의 절도단 10명을 구속하였다. 그 한패는 지난 2월 5일 송도 근처 낙도에 시설된 미군 소유 28호 및 72호 유조탱크에서 전후
3회에 걸쳐 휘발유 20드럼(싯가 336만환)을 절취했으며 또 한패는 작년 12월 인천외항 미군유류 유조선에서 POL 보급창으로 연결된
송유관에서 휘발유 70드럼 그리고 금년 2월 28일 120드럼 (도합 싯가 600여만환)을 절취해 운반선에 싣고 도주하였으나 경찰수사 결과 그
일당이 체포된 것이다.’ (경향 61. 5. 30)
기름탱크는 지난 1971년 미군 유류창이 포항으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유류저장탱크가 산에 박힌 이후 옥골에서는 그 누구도 우물을 파지 않았다. 이곳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옥골 원주민 이종림
(63)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기 산 중간 중간 평평한 곳이 당시 기름 탱크들이 놓였던 곳입니다. 기름 붓는
말이면 온종일 기름 냄새가 가시질 않았어요. 우물을 파면 기름이 둥둥 떴어요. 그 물을 끓이면 붉은 끼가 보였습니다. 어렸을 적 인천 전역에
콜레라가 돌고 저기 송도역 인근까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우리 마을엔 한사람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어요. 어른들이 그럽디다. 우린 기름 물
먹어서 콜레라 안 걸린다고.”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옥련 지역에 역이 하나 만들어졌다. 역명은 동네이름을 따서 ‘송도역’으로 붙였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79년 남인천역~송도역 간,
1992년에는 송도역~소래역 간 운행이 중지되었다. 철로가 폐쇄하면서 송도역도 문을 닫았다.
송도역은 그 기능을 다했지만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역사(驛舍)의 흔적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역사는 너무 낡아서 비가 오면 물이 새 얼마 전에 슬레트 지붕에 천막을 씌웠다.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한갓 낡은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는 이 역사는 자신이 옛날에 철도역이었음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역무원 사무실로
사용했던 방 외벽에 아직도 ‘송도’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수없이 칠해진 페인트칠에도 감춰지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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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낡은 물건 하나가
철도 정거장이었음을 명확히 말해준다. 송도역에서 학익동 쪽으로 30미터 가량 내려가면 녹슨 철탑 위에 커다란 철통이 놓여져 있다. 급수탑이다.
천리를 달려 온 화차가 목마름에 물 한모금 마셨던 곳이다. 증기기관차가 수인선을 달렸을 때 사용한 물통이니 족히 5, 60년은 된 물건이다.
비바람에 심하게 녹슨 급수탑이지만 주둥이에서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옛날 송도역은 물물교환 장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전 공터에는 번잡한 장이 섰다. 소래, 군자 쪽에서 건너 온 촌로와 수인역 쪽에서 온 아낙네가 서로의 물건을 내놓고 흥정을 벌였다.
폐선이 되면서 이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에 송도역전 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들어섰다.
시장 안 송도방앗간 이연수 사장이 과거의 이곳 풍경을
그려 줬다. “3, 40년 전 송도역 건너편에 수인선 양쪽에서 온 사람들로 늘 복잡했지. 각종 농산물을 비롯해 닭, 어류 등을 내놓은 좌판이
줄지어 있었어요.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장사꾼들의 발이 묶였고 급격히 위축된 거죠. 그 자리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뒷쪽으로 현재 이 시장이
생긴 겁니다.”
송도역전시장 조차 이제 그 명맥을 잇기 쉽지 않은 듯하다. 상권이 위축되면서 40여개의 가게만 장사를 하고 있고 몇 년
전에 번영회도 없어졌다. 시장 안 쪽으로 가면 송도초등학교가 있다. 1948년 학익국민학교의 분실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군자, 소래 등 수인선
변에 살던 학생들이 수인선 꼬마열치를 타고 이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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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는 없어졌지만 기찻길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옥골 동네 앞에는 기다란 둔덕이 엎어져 있다. 이것이 철로가 놓였던 기찻길이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외길답게 다리를
양쪽으로 뻗으면 닿을 만한 폭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조개고개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홍어회골목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조개고개’라는
이름은 그 아래편에 조개조합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어회골목’은 홍탁, 홍어회 무침 등 홍어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화학이
바다를 매립하기 전까지 이 동네는 바다를 끼고 있던 동네다. 물끝 따라 나가서 반나절 만에 망태기 하나 가득 조개를 캐오던 곳이다. 갯일을
마치고 고개를 넘던 아낙들이 하나둘씩 흘리고 간 조개들로 길 위가 까맣게 보여 조개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조개가 흔했던
곳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이 골목에 들어서면 홍어 삭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도로 양편으로 충남홍어, 흑산도홍어, 할머니홍어 등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몇몇의 홍어집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곳에 처음 홍어집이 들어선 것은 대략 40년 전쯤. 인천에 일자리를 얻은
아들을 따라 충남 대천에서 올라온 충남홍어의 김찬례 할머니가 식당을 내면서부터다. 당시 노적산 기슭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다. 훈련을 마친
예비군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간단하게 홍어무침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여기에 매콤한 맛을 진정시켜주는 조갯국을 함께 내놓았다. 바로
인기폭발.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자 아예 홍어집으로 업종을 바꿔버렸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홍어맛 소문이 번져나가면서 주변에 하나둘씩 홍어회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흑산도 홍어집 사장 정이석(63) 씨는 인하대 자리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고 이후 이곳에서 일생을 보낸 이곳의
산 증인이다.
“한때 줄서서 먹었어요. 자리가 없으면 그냥 마당에 자리 깔고 먹기도 했죠. 순전히 조갯국을 먹기 위해 홍어회를 먹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냥 앞마당 나가듯 나가서 조개를 잡아오면 됐으니까… ”
조개고개 건너편에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동양화학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잠시 운영했던 노천 풀장이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 밖에 없던 뙤약볕 아래의 풀장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시민에게
인기 있었던 여름 놀이터였다. 이곳의 행락객들도 조개고개에 와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수인선 철길 옆에는 송도역에서 조개고개를 잇는 오래된 길이 하나 있다. 세기자동차, 옥련여고 등이 접해 있는 약 400미터의 좁은 구
도로이다. 1937년에 개통한 길로 현재도 그때 쌓은 석축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길에는 비극의 불편한 역사 한 페이지가 숨어 있다.
실미도대원 탈주 루트였다.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새벽 6시30분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탈취해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육지에 닿은 곳은 옥련동 돌산 인근이었다. 몇몇 대원은 해수욕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의 송도고 밑으로
돌아 나오다가 옥골고개에서 떡장수 할머니에게 떡 1천700원어치를 사먹고 2천원을 주고 갔다.
오후 1시 30분쯤 조개고개까지 나온
대원들은 송도에서 인천 시내로 들어가는 항도여객 ‘경기 영 5-2373호’ 시내버스를 총으로 위협해 탈취해 승차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 6명과
버스기사, 여차장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인들과 조개고갯길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당시 5세)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송도 길을 벗어난 버스는 학익동~용현동~숭의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를 내처 달렸다. 바퀴가 펑크 나자
석바위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고 그들은 서울로 향했다. 그리곤 그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 그때, 이곳 옥련동 >
송도고등학교
학교명 ‘송도’는 이름은 인천의 송도(松島)가 아니라, 북한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유래한 것이다. 1906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설립을 위임받은 윤치호가 개성 송악산 부근에한영서원(韓英書院)으로 설립하였다.
6.25 전쟁으로 임시휴교를 했고 1952년 4월 송학동(현 남부교육청 자리)에 남녀 피난 학생 500명을 모아 재 개교를 했다. 이듬해 11월
답동 교사로 이전해 오랫동안 이곳에 정착한다. 이후 구월동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접고 83년 2월 옥련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준비 공사를 하던
중 재정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개성 출신 기업가 이회림 동양화학 회장이 2억원의 기부금을 송도고에 희사하고 송도학원 이사장에 취임한다. 현
교정 한편에 해군 참수리 357호정 정장으로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에서 순국한 졸업생 고 윤영하 소령의 흉상이 있다.
새인천풀장
송암미술관 입구 쪽에 있던
바닷물을 끌어들여 이용한 도크식 풀장이었다. 7, 80년대 당시 청학풀장, 율목풀장과 함께 각광받던 곳이다. 이 풀장은 동양화학과 관련 있는
동양관광개발에서 운영했는데 1976년 이회림회장은 동양화학 소유 해면 1만5천평 매립지에 8억원을 투입해 수중터널을 비롯하여 해수풀장, 수족관,
조탕(潮湯), 관광호텔, 쇼핑센터 등 동양 최대 규모의 관광지를 계획했지만 무산되었다.
능허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서 따온 이름으로 만경창파(서해)를 하늘로
날아오르듯 항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년)에 중국 동진(東晋)과 교류하고 싶었으나 육로는 고구려가 떡 버티고
있어 어쩔 수없이 바닷길을 택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능허대 밑 한나루(大津 대진)라는 나루터였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능허대 중국행은 조선조
광해군 때 까지 이어진다. 현재 주변은 완전히 매립돼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지난 88년 인공연못과 언덕에 정자가 세워진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인천시 기념물 제 8호로 지정.
송도석산
옥련동 현대아파트 부근에 있는 채석장(13만9천여㎡)으로 1987년
채석행위가 중단돼 현재는 흉한 돌산으로 남아있다. 높이 60m의 석산을 서해 낙조와 어우러지는 인공폭포를 갖춘 공원을 비롯해 유스호스텔과
복합스포츠센터, 미술관 등 다양한 계획이 세워졌지만 모두 공수표가 되었다. 심지어 큰바위얼굴 조성, 크라이밍장 등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독바위 혹은 독배로 불리던 이곳은 구한말 외국무역상사 타운센트사가 탄약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1930년 초 현재의 외환은행 뒤에서 총포상을 하던
사람이 엽총 한자루 값으로 이 석산을 샀다는 믿기지 않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송도해안도로를 공사할 때 이곳에서 돌을 파서 깔았다고
한다.
아암도
매립 이전 아암도는 송도유원지 남쪽 해변에서 500여m 떨어져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섬이다. 1989년 아암도 앞 갯벌까지 매립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해안선 끝에 남게 되었고 94년 7월 아암도 옆으로 해안도로가
개통되었다. 95년 6월 아암도 주변 400여m 구간의 철책선이 철거되면서 2000년 4월 완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인천시 출자법인인
인천도서관광(주)이 3억6천500만원에 아암도를 개인에게 팔았다가 시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사들이는 해프닝도 있었다.
인천결핵요양원
현재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인천결핵요양원은 ‘인천개항 100년사’에 의하면 1940년 11월 20일 ‘연수장(延壽莊)’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전문병원이었다. 6.25 전쟁 중 인천결핵요양원은 송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휴양소로 잠시 사용되었지만 53년 휴전 후 전쟁고아 결핵환자
22명을 수용하면서 그 기능이 다시 정상화 되었다. 인천시는 환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요양원은 병실을
증개축 했으며 앞뜰을 3천 평으로 넓히고 잔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이 때문에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가수 김정호가 1980년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고독한 여인의 미소는 슬퍼’라는 노래를 이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결핵요양원은 1996년 6월 5일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외국인묘지
청학동외국인묘지에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던 랜디스
박사, 오례당 등 외국인(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하다가 이 땅에서 숨진 66명이 안장돼 있다. 묘역은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묘역 일부가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해 관리하여 오던 중 시세의 팽창으로 1965년
3월 25일 이곳 청학동 53번지로 이장해 영원히 안식을 하고 있다. 한편 중국인 묘지는 부평가족공원에 있다.
인권의 길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유엔 인권고등성판무관실과 유네스코가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송도유원지 로터리에 이르는 250m(너비 10m)의 도로를 ‘인권의 길’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인권의 길’이 선정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거리에는 ‘인권의 길’이라고 새긴 너비 65m, 높이 50cm 크기의 표지판이 설치되었지만 이후 이 길은 시와 시민
모두의 무관심 속에 의미가 다가오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