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율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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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오늘’
찍은 사진, 현상해 보니 ‘과거’가 나왔다

율목동

7,80년대 TV 연속극에서 ‘좀 산다는’ 동네로 단골처럼 등장한 곳은 서울 가회동 아니면 성북동이었다. 풍채 좋은
한옥집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인천에도 한때 이에 못지않은 동네가 있었다. 밤나무골로 불리던 중구 율목동(栗木洞)이다. 이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밤나무도, 기와집도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근근이 남겨진 호젓하고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인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밤나무 마을 율목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쌀’ 때문이었다. 1906년 농상공부 허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가 율목동 55번지에 문을
열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다. 근업소(勤業所)는 간혹 ‘권업사’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솟을 대문 위에 걸려 있던 근업소의 근(勤)자를 권(勸)자로
잘못 읽었거나 그냥 쉽고 편하게 발음한 것으로 추측된다. 근업소는 40년대 말경에 폐쇄되었지만 현판은 1970년대 까지도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권업소 말(마을)’이러고 불렀다.
이 인천근업소 주변에 여주, 이천 등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꼬이기 시작했다. 주로 영남 출신 상인들이 미곡중개를 주름 잡았는데 업무상 일본어 능통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장사로
돈을 번 그들은 근업소 근처에 단아한 자태의 한옥을 지어 살면서 이 마을은 ‘밤나무골 새동네’로 불렸다. 차료에 의하면 1910년 당시 율목동은
2백35가구에 인구 1천49명으로 내동과 함께 부자촌의 쌍벽을 이룰 만큼 기와집이 제법 많았다. 

4, 50대 인천
중년들에게 율목동 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율목풀장’일 것이다. 율목풀장은 1972년 6월 22일 현재의 어린이공원에 개장했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닷가였던 인천에서 풀장은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었다. 염전이나 송도유원지에서 짠물로 멱을 감던 아이들은 여름방학 중에 율목풀장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렵사리 풀장에 가면 입장료 생각에 온 몸이 퉁퉁 불 정도로 물 속에서 놀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수영을
즐겼는데 당시 만해도 도심 한 가운데 노천풀장에서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가가 거의 없던 이 언덕배기는 일본인들이 9천 여㎡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1944년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사자(死者)의 땅’으로 인식돼 한동안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이 ‘풀장’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면서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하수를 퍼 올려 쓰던 이 풀장에 시체
썩은 물이 흘러든다는 괴담이 돌곤 했다. 아마 풀장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일 테지만 아무튼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이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 풀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것을 발굴했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세워져
있다.

문인석
옛 시립도서관
신관

율목동 하면 언덕 위 시립도서관을 빼놓을 수
없다. 1946년 일본인 정미업자의 별장 자리로 옮긴 시립도서관은 6.25 전쟁 통에 5천권이 분실 혹은 소실되었지만 전국에서 최초로
참고열람실을 개실하고 2층짜리 신관을 신축하는 등 한동안 전국 도서관의 ‘모델 하우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시립도서관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8년 말 폐관을 결정하고 구월동에 새 터를 마련하고 이 자리는 율목도서관에 내줬다.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은
누구나 이 도서관에 대한 추억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다. 좌석을 잡기 위해 새벽 공기를 헤치고 싸리재 고개를 거쳐 성산교회 앞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가던 일. 발걸음을 뗄 때 마다 삐걱거리던 구관 목조 계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신관 앞 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소설책들.
우리나라 건물 구조와는 사뭇 다른 목조 이층집이 도서관 마당 끝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옆에는 일본식 정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분수연못과 여러 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의 옛 주인은 ‘역무 정미소’로 이름을 날렸던 정미업자 리끼다께(力武平八). 정미소로
떼돈을 번 그는 전망 좋기로 소문난 이곳에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는 정원의 석등에 불을 켜놓고 일본 정미업자들과 함께 항구와
신흥동 정미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내려다보며 밤새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으리라. 해방 후 이곳에 있던 석등과 돌들 일부가 관리 소홀을 틈타 인근
저택의 정원으로 스며들어갔다는 소문도 있다. 
1962년 준공한 2층 본관 옥상에 올랐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트였다. 월미도,
인천대교, 수도국산, 수봉산, 청량산, 계양산… 아파트가 없던 시절, 전망 하나로만으로도 이 동네에 사는 맛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으로 일본집들의 지붕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율목동은 산을 중심으로 북동쪽 은 한옥동네, 서남쪽은 일본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옥이
있었던 곳은 거의 빌라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반대편은 왜식풍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일본동네의 분위기가 물신 난다. 이곳에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얼마 전 까지 만해도 인근에 ‘다다미방’
수리 가게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걸로 봐서 이제는 많은 집들이 외관만 왜색풍이지 내부는 현대식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끔 그
골목에서 사진기를 든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신사를 만난다면 그는 일제강점기에 ‘진센(인천의 일본어 음)’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1963년 6월 2일 일요일 대낮, 답동에 있는 무허가 화공약품공장에서 화재폭발 사고 발생해 18명이 사망하고 50명이 화상을 입었다.
69년 인천지역에서 13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콜레라가 발생했다. 70년 8월 8일 하오 송현동 쪽 동인천철도지하도가 붕괴돼 7명이 압사당하고
24명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난다. 80년대 까지 인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의 사망자 수습과 부상자 차료를 도맡아 한 병원이
기독병원이었다. 대규모 병원들이 생기기 전까지 기독병원은 인천에서 가장 규모 있는 병원이었다. 주위사람들이 조금 큰 병에 걸리면 으레 찾아가는
병원이 바로 기독병원이었다.
인천기독병원이 중구 율목동 237번지에 문을 연 것은 1952년 5월 26일이다. 실제 기독병원의 태동은 그
전 해인 1951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난지 부산에서 있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에서 인천, 강화, 천안 등 세 곳에 병원을 세울 것을
결정한 데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실제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병원 자리에 1923년 1년간 인천에 주재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이 개설한 70여평 부지에 일반 진료소가 생겨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의 개원, 그리고 1931년에 인천부인병원이 개원했다. 일제는
1940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미국 감리교 재산이었던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주로 인근 용동의 기생 혹은 신흥동의
창녀나 술집 접대부들을 대상으로 한  검진소 기능을 했다. 일본 패망 후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자국 여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하면서 재 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전쟁 후 정문에 걸린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는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라는 간판도 함께 걸었다. 황해도 벽성군 출신인 강석봉 초대 원장을 비롯해 적지 않은 멤버가 이북 출신이거나
북쪽에서 의료 생활을 하던 인연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초라한 병원이 크게 이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의 지원으로
새로 도입한 X-ray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개인병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비였지만 당시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일원에서 이 같은 최신
의료 설비가 있는 곳은 기독병원이 유일했다. 이 X-ray기 도입 소문은 레이저 광선처럼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인천, 경기 지역은 물론
충청도 지역에서까지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덕분에 ‘기독병원’은 인천의 대표적인 지명이 되었다. 꼭 몸이 아프지 않아도 일상 ‘경동 싸리재
기독병원 앞’ 이런 식으로 시내에서 길이나 위치를 말할 때는 흔히 이 병원 이름을 입에 쉽게 오르내렸다. 
이 병원 안에는 전문대학이
있었다. 1973년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해 인천간호전문학교가 병원 한 공간을 빌어 개교했다. 78년에 인천간호전문대학이 되었고 이듬해 시청 보다
먼저 현 시청 뒤편인 남동구 간석동으로 이전했다. 인산전문대학으로 변경이 되었다가 경기도 안산시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안산대학교가 된다.

동인천과 가깝고 조금만
올라가도 외졌던 율목동은 6,70년대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도집’이라 불린 유명한 도나스(도넛)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병원 옆 골목에 있던 인천도나스집은 70년 대 초까지 ‘얄개’들의 연애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곳이다. 세간에서는 그곳을
‘연애당’이라고도 불렀고 교외지도담당 선생님들의 단골 순찰 코스였다. 방금 튀겨 나온 ‘직석’ 도넛에 흰설탕을 뿌려먹던 그 맛도 맛이지만
라디오를 통해 재즈나 컨트리송 같은 음악도 곁들여 주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좋아했던 장소였다.
도넛도 유명했지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블루베리 쨈을 듬뿍 바른 샌드위치와 팥과 연유, 젤리, 파인애플 등이 푸짐한 팥빙수가 일품이었다. 여드름 듬성 난 연인들은 도나스나 단팥죽을
달콤하게 먹고 나서 인적이 드문 ‘인천의 몽마르트 언덕’ 율목공원으로 장소를 옮겨 도나스보다도 더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으리라.
신기하게도
옛 인도집 바로 건너편 길에서 즉석 도넛을 파는 노점이 있다.
“예전에 도나스로 유명했던 집이 저기에 있었다는 아세요?”
“며칠
전에 어떤 아저씨가 얘기해주더라고요. 엄청 맛있었다며 그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추억은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혀끝의 기억은 참
오래간다. 골목에는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오감을 가동시키는 추억거리들이 많다.        

율목동 골목에서는 무궁무진한 인물들의 사연이 읽혀진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맹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이다. 강화 교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바치며 암흑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인물이다. 송암이 언제부터 율목동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1935년 인천영화학교 교장에 부임하던 시절부터 1963년 8월 25일 76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 까지 율목동 25-1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대문에 커다란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동네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쉽게 알려 줄 수 있도록 했다.
원래 7칸
방이 있을 만큼 컸던 그 집은 현재 도로와 상가 등으로 잘려나갔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 낡고 오래된 기와만이 그 집의 연조를 말해주고 있다.
한동안 대문 앞에 세워져 있던 표지석은 현재 율목공원에 놓여져 있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을 기웃거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못마땅해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 그때, 이곳 율목동

인천정보산업고


이 자리는 원래 1933년 인천고(인상)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인천고는 71년에 남구
주안동으로 이전하고 그해 그 자리에 중앙초교가 설립된다. 95년 중앙초교는 연수구 연수동으로 이전하고 95년도에 현 인천정보산업고가 개교한다.
교정을 둘러보면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많이 있고 벤치는 일제강점기에 사용한 오래된 돌로 만들었으며 연못 주변도 이 돌들이 많이 깔려 있다. 본관
뒤편에 가면 옛 건물에 사용했던 돌들이 쌓여있다.         

오례당
농원

1900년 인천에 거주한 중국인 해관 통역관 오례당이 약 1만 평의 율목동 농원에 여러 종의 과수를
재배했다. 율목동 옛 시립도서관 자리도 원래는 오례당의 과수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포르투갈인으로 대지주이자 부동산 임대업자였는데 외국인들 사이에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오례당과 그 부인은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일본인 공동묘지
율목공원 아래 구석에는 ‘하라다(原田) 소하 10년 1935년’이란
비석이 하나 눕혀 있다. 아마 이 비석은 부근 일본인 묘지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율목공원은 원래 일본인들이 9천 여㎡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BBS회관

1964년 BBS경기도(인천)연맹이 조직되었다. 68년에 현 율목공원
아래 당시로서는 보긴 드문 현대식 3층 규모의 경기도 청소년회관을 기공해 현재까지 인천연맹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이곳은
인천 청소년들의 동아리, 문화 활동 주무대이기도 했고 70년대에는 대공 관련 형사들의 출입처이기도 했다. 야간 직업청소년 학교를 운영하는 등
불우한 청소년에게 장학금 등 각종 지원을 하고 있다.

성산교회 마당


옛 시립도서관 아래에 있는 성산교회에는 마당 곳곳에 오래된 I자형 돌들이 많이 깔려 있다.
일제강점기 신흥초교 위에 있던 일본절 동본원사 층계 돌 혹은 교회 아래 있었던 인천 최초의 일본인 화장터에서 이용한 돌들로 추측되고 있다. 같은
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교회 바로 아래 공영 주차장에 많이 쌓여 있었고 일부 주차장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경아대

1963년 2월 중구 율목동 244번지에 건평 45평의 아담한
국악회관이 ‘경아대(景雅臺)’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 현판은 박세림 선생이 썼다. 경아대 설립 후 인천국악협회는 기존의 시조부와 기악부 외에
민요부, 농악부, 창악부(국극부), 문예부, 정악부, 그리고 무용부를 산하에 두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영(府營)공동숙박소

당시 인천부가 설립 운영했던 일종의 사회 시설이다. 인천부는 1921년 9월 1일 시내
율목리 58에 인천 최초의 노동자 공동숙박소를 준공했다. 조선식 온돌 25칸, 바라크 2동 및 변소 1동으로 하루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숙 또는 하숙 등의 숙박도 못하는 빈곤 노동자들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숙박료는 5전, 식사 한
끼에 15전이었다. 1921년 8월 5일 부설 직업소개소도 함께 개설했다고 ‘인천부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글, 사진 :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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