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인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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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싱그러운
웃음 풋풋한 젊음 가슴에 지우지 못하네

인현동

동인천역 건너편의 중구 인현동은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제물포고 등 많은 학교가 밀집해 있었고
경인철도 동인천역과 인천의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경유하던 교통의 중심지 였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의 출입구였던 덕분에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제는 시간이 멈춰서있는 원도심으로 변했지만 곳곳에 교복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동네다. 안타깝게도 인현동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때문이었다.


1999년 10월
30일, 시내 몇 고등학교에서 축제가 끝났다. 그 기분을 이어가기 위해 학생들은 동인천역 부근 호프집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6시55분 경 발디딜
틈 없이 꽉 찬 2층 안으로 매캐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모두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입구 쪽으로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세차게
들어왔다. 그제야 학생들은 당황해서 급히 피신했다. 모두 입구 반대편 비상구 쪽으로 몰려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상구가 비상(非常)이었다.
이어 바로 비상(悲傷)의 상황이 벌어졌다. 잠시 후 학생들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54명이 화마(火魔)에 희생됐다. 인천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이 한두 명씩 포함되었다.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165명, 74년 청량리 대왕센터 88명 이후 건국 이래 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대형 화재였다. 공사 중이던 지하노래방에서 석유가 잘 타냐, 신나가 잘 타나 장난삼아 한 불장난의 결과였다. 아이들의 유골은
월미도와 팔미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래서 그런가, 10월 인천 앞바다의 파도는 유난히 세차고 구슬프다.        

아들아, 딸들아 너희는 어디 갔느냐/이제나 저제나 불현듯 문 앞에 들어설 듯한/그 싱그러운 웃음 그 풋풋한 젊음/가슴에
지우지 못하고 삼백예순 날/너희 안부 물어볼 밖에 없는 못난 아비 못난 어미를 오오 용서해 다오. (후략)

화재 현장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천학생교육회관 뒤뜰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있다. 아래 하단에는 당시 광성고 교사였던 시인 조우성
선생이 지은 ‘우리 모두 함께 듣는다’라는 제목의 추모시가 적혀있다.
인천학생교육회관은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한 축현초교가
있던 자리다. 학생들이 마음껏 즐길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불행을 맞았다는 어른들의 자책과 자성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10월 마지막 날,
학생회관 뒤편을 찾았다. 2m 높이의 위령비와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힌 추모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위령비 주변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남녀 학생들 쪽으로 다가갔다. 낯선 어른의 출현에 모두들 마득치 않은 눈치다.
“여기 회관 안에 동아리가 있어요. 일주일 한 두번
와서 놀다 가요. 이 회관 안에 놀 거 많아요”
회관에는 만화방, 보드게임방, 보컬연습장, 심지어 디스코장과 노래방도 있다. 화재사건
후유증으로 이 지역은 한동안 인적이 끊기며 적막감마저 돌기 까지 했다. 화재 발생 14년, 화상(火傷)은 어느 정도 치유되었고 기억 속에
멀어지면서 다시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에
백화점이 하나도 없던 시절, 인천의 대표적인 스쿨존 인현동에는 ‘학생백화점’이 있었다. 1층에는 문구점과 화방, 체육사와 레코드점 그리고
2층에는 DJ가 있는 분식집으로 구성된 대동학생백화점이 있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숍 인 숍’의 형태였다. 여전히 ‘대동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지금은 1층에 문구점과 화방만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70년대 여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은 일년 내내 학생들로 늘 붐볐지만 특히 3월 신학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학용품과 체육복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창 때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줄은 백화점을 감쌀 정도로 꼬리가 길었다.
신학기가 되면 외국배우의
사진이 새겨진 공책과 코팅한 책받침을 확보하기 위해 아침 일찍 주인보다 먼저 백화점에 와있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쳤다. 전쟁을 치르듯 어렵게
물건을 확보한 학생들은 DJ박스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학용품을 사고 남은 우수리 돈으로 분식을 사먹으면서 서로 그날의 전리품을 내놓고
자랑했다.
인현동에는 1남3녀(남고 1개, 여고 3개)의 고교를 비롯해 초․중학교 10여개 가량의 학교가 있었다. 반경 300m 이내에
이렇게 많은 학교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했다. 70, 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관련된 사업이 번창했다. 문구점, 체육사,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성업을 이뤘다. 용동마루턱을 기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얄개들의 천국이었다.
‘삼천리국수강산
대한면국(大韓麵國)’의 막내 면발, 쫄면의 이름을 처음 얻은 고향답게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 등 ‘당’자 돌림의 분식집들이 한집 걸러 하나씩
있었다. 이제는 학교도 많이 떠났고 학생수도 줄었지만 대동백화점 아래쪽으로는 아직도 몇몇의 문구점, 체육사, 화방, 분식집이 남아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학창시절 깔깔대며 이 거리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다. 7,80년대 젊은이들의 모임은 책방 앞에서 먼저 만나 장소를 옮기는 아날로그식
만남이었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한 눈에 보이던 5층 건물 대한서림은 인천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자 랜드마크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대한서림에서 일단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무슨 사정으로 끝내 나타나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며 읽은 책이 짧게는 시집이요, 길게는 소설이었다.

대한서림이 문을 연 지 어언 60년. 우리나라 책방 역사에 쉽지 않은 세월이다. 이 책방은 1953년 처음 문을 열었다. 78년
김순배(70) 회장은 장인이 운영했던 서점을 이어받았다. 현재의 5층 건물 전에는 그 옆 작은 2층 건물에 대한문구사와 대한일보와 함께 있었다.
그는 서점의 전문화, 대형화를 예견하고 공학도 출신답게 업계 최초로 전산화 작업을 했으며 직원들에게 유니폼을 착용하게 했다. 결국 대한서림은
국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서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세월은 이겨 내지 못했다. 지난해 8월부터 1, 2층을 빵가게에 내주고 3.
4층만 운영하고 있다. 책방이 ‘책빵’이 된 것이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책이나 빵이나 다 양식이라고 자위를 했지만 시민들은
안타까움과 미안한 맘을 가졌다. 반백년 이상 이 서점은 맞은편 동인서관과 함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서림이
‘책빵’으로 변신하자 잠시 후 동인서관도 그 자리를 스포츠점에 내주고 위쪽 학생회관 앞으로 옮겨갔다. 공간의 이동은 있었지만 인천에 이런
서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현재 대한서림이 있는 건물은 원래 별제과 건물이었다. 1, 2층 별제과점 3,4층 별다방
5층은 음악감상실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부모의 격식있는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리’ 양과점이었다. 말
그대로 이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별’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별음악감상실은 음악을 통해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던 젊은이들의 발길로 문턱이
닳았다. 가수 송창식도 무명 시절에 가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때 문인들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등 별제과 건물은 동인천 문화예술의 한 공간을
담당했다.

구멍가게의
흔적

대한서림 빌딩 옆, 낡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키 낮은 집들이 옛 인천여고 까지 이어져있다. 서울 세운상가가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고 뻥친다면 소형 헬리콥터 정도는
조립한다고 맞받아 칠 수 있었던 인현동 전자상가다. 일제강점기 때 마쓰다 양조장 건물이었던 빨간 벽돌건물을 중심으로 축현학교 담을 기댄 크고
작은 전파상과 조명가게, 그리고 전업사가 오밀조밀하게 늘어서있었다. 이 건물은 한때 디스코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훤히 보이는 천장의 뼈대는
여전히 튼실해 보인다.   
이곳은 이제 진공관 시대를 거쳐 IC, 그리고 IT 시대로 오면서 외관부터 많이 변했다. 전축 틀던 시절
스피커, 턴테이블 바늘 등 각종 부품들과 ‘도란스’ 등 전기제품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한때 한 평이 채 안된 가게부터
2층짜리 번듯한 건물 등 100여개 가깝던 상점도 지금은 30여개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가게들도 손님들의 발길을 끊겨 그저
셔터만 올려놓은 상태이다. ‘우주전자’, ‘대륙전자’ 같은 간판처럼 80년대 중반 대륙을 꿈꾸고 우주를 꿈꾸며 벤처정신으로 무장하고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했던 그 공학도와 기술자들은 이제 자신의 꿈을 이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땅 밑에도 인현동이 있다. 1972년 인천 최초의 지하상가가 뚫렸다.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늘어선 지하상가는 72년 새동인천을
시작으로 74년 동인천, 77년 중앙로, 80년 인현, 83년 신포까지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조성됐다. 차량의 원활한 소통과 안전한 보행을
위해 개통되었지만 실제로는 민방공 대피용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대피시설로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었고 환기가
제대로 안되었고 조명도 열악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ssazio’의 주인 김갑숙(57) 씨는 이곳에서 36년 동안
신발을 팔아왔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양화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1년 후 바로 사장으로 신분 상승했다.
“20여 년 전 한창
때는 당시 공무원 한달 봉급 40만원을 하루에 다 벌만큼 장사가 잘됐어요. ”
그도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어 휴대폰 판매로 업종을
바꾸었다가, 단골들을 외면할 수 없어 최근 매장 한편에 신발가게를 자그맣게 다시 열었다.

도심 속 오지, 이른바
‘똥골’

인현동에는 기찻길
옆 오두막이 있다. 보이질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곳. 동인천청과물시장 건너편 빌딩 뒤의 쪽방촌이다.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140여개의 집들이 철로를 따라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가까이 길게 늘어서 있다. 동네 한가운데 커다란 우물의 흔적이 있고 그 옆에
공동변소와 공동목욕탕이 있다. 집에는 그만한 공간을 낼 틈이 없기 때문에 골목에 공동시설을 만든 것이다. 기차가 지나가자 집들은 심한 떨림을
한다. 대낮인데도 앞을 막은 건물과 방음벽으로 인해 골목으로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 기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외엔 소리도 없다.

방향 쪽 골목은 ‘똥골’이라 불린 사창가였다. 7,80년대에는 낮이고 밤이고 역 광장에 포주들이 나와 있었다. 포주에 이끌린 남자들이 붉은 등이
켜진 골목으로 쉴새 없이 들어갔다. 이 사창가는 윗동네 그 옛날 용동 기생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흘러들어 오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집창촌’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몇 집은 밤이 되면 홍등을 걸어 놓는다.   

인현동에서
전국구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은 삼치거리이다. 학생교육문화회관 뒷길은 매일 저녁 고소한 삼치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이 골목길이 삼치거리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인하의 집’이 현재의 자리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삼치와 막걸리를 팔면서부터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후까미
양조장, 해방 후에 ‘소성주’라는 인천막걸리의 토대가 된 대화주조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이 곳은 응봉산(자유공원)과 연결되는 수맥에 지하수를
뚫어 약수로 술을 빚어 술 맛이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술은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나왔고 안주로는 인근 부두에서 싼 값에 팔리는 삼치를 튀겨
내놓았다. 이후 한두집씩 삼치를 곁들인 막걸리집이 들어서더니 지금은 15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업소마다 기름에 튀기거나 그릴에 굽는 등 제각각
다른 독특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고 있는데 어느 집이든 어른 손바닥보다 큰 삼치를 두어 토막씩 한 접시에 푸짐하게 담고 있다.
이 곳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삼치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하면서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중년이
된 그들은 이 골목을 다시 찾아 그 시절의 향수에 젖곤 한다. 막걸리 열풍 덕분에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지만 서너명이 마음껏 먹어도 2,
3만원이면 충분할 정도로 세월이 흘러도 서민적 분위기는 여전한 곳이다. 장소의 연조를 말해 주듯 인하의 집 주차장에는 100년 된 라일락 나무가
아직도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인심과 맛은 바뀌지 않았어도 거리와 건물의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2001년 이 거리는 ‘동인천
삼치거리’로 지정되었고 얼마 전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과 외벽을 치장했다. 화가 등의 손길을 거치면서 모든 가게의 간판이 ‘작품’으로
거듭났다. 삼치 맛 못지않게 간판구경하는 맛도 괜찮다. 

< 그때, 이곳 인현동 >

삼화고속
정류소
삼화고속은 1970년 2월23일 인천-서울역간 경인고속도로를 운행한다. 고속버스를 운행하면서
동인천(우리은행 길 건너편)에 작은 정류소 겸 차고지를 마련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진고속도 동인천역 앞 인현통닭 부근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삼화고속 정류소는 시외 직행버스(동인천~서울역)의 운행경로 변경에 따라 2005년 12월 폐쇄되었다.

삼성헬스장

1958년 인천에서 가장 먼저 생긴 현대식 헬스장으로 추정된다. 인천의
미스터코리아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예전에는 동인천역 개찰구 바로 앞에 있어서 승객들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선수들은 쉬고 있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그때부터 역기 등을 들곤 했다. 얼마 전에 65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눈을 닫았다.    

동인천역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 시장에 축현역(杻峴驛)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상인천역(上仁川驛)으로 역명이 바뀌었다. 다시 55년 동인천역(東仁川驛)으로 개명했고 1957년에 동인천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89년 오랫동안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광장을 상당히 먹은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핑으로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이후 빈 건물로 남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인천지하도

1967년 동인천역 번잡해지자 교통과 보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지하도를 팠다. 72년 이 지하도와 새동인천지하상가가 연결된 이후 74년
동인천, 77년 중앙로, 80년 인현, 83년 신포지하상가까지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이어졌다. 비 한 방울 맞지 않고도 동인천역에서 담동사거리
까지 갈 수 있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가 조성되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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