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화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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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시간의
닻 깊게 내린 무네미

화수동

사람만
표정이 있는 게 아니다. 도시도 표정이 있다. 느린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세상에서 화수동은 여전히 아날로그식 표정을 짓고 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 왔다고 해서 ‘무네미’라고 불렸던 이곳은 한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온갖 생물로 인천에게 젖을 물렸다. 인천의 개발
청사진에서도 비껴나 있는 덕분에 어느 때 가도 냄새와 소리로 인천인의 몸속에 체화된 강렬한 추억을 이끌어내는 몇 남지 않은
곳이다.  

‘도시산업선교회’간판이
걸린 초가집

우리는 이제 동구 화수동 ‘183번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화 시절의 노동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1961년 9월 미국 감리교의 조지 오글 목사는 화수동 183번지의 낡은 초가를 구입해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을 설립했다.
그는 추방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한국인 목회자들과 함께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화수동 주변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선교회는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으로 직접 작업 현장에 들어가 이른바 ‘노동자 의식화’ 사업을 펼쳤다. 한때 도시산업선교회는
‘도산’이라 불렸다. 도시산업선교회가 기업에 침투하면 그 기업은 도산한다며 산선을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몰아세우며 끊임없는 감시와 무차별
탄압을 펼쳤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어슬렁거렸다.
산선의 노동자교회 자리는 이제
‘일꾼교회’와 ‘사회복지선교회’로 바뀌었다. 교회 현관 입구에는 70년대 까지 15평짜리 초가지붕 건물이었던 인천산선 회관의 흑백사진과 선교회를
돕던 조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추방되는 모습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현재 이 교회는 집회 사진과 보고 문서 등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자료가
30여 박스 가량 소장하고 있다. 또한 동일방직 여공들이 피신해 있던 지하방 등 민주화 운동의 흔적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에는 교회 밖 노동의 현장, 가난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일꾼교회 담임 김도진 목사는 이제
동구푸드마켓 운영과 장애인 및 저소득층 자녀교육 등 사회복지선교회로서의 소명을 이어가고 있다.

‘민들레 국수집’과 서영남
씨(오른쪽)

화수동의 국수집
하나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민들레 국수집’은 국수 맛 때문에 뜬 집이 아니다. 그곳은 주리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매일  하늘창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천상(天上)의 식탁을 차려낸다.
2003년 만우절(4월1일)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은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공간이다. 거짓말 같이 문을 열어, 공갈처럼 많은 사랑이 모여들어, 구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믿기지 않게 10년을 버텨오고
있다. 이곳 주인장은 서영남 씨다. 그는 25년 동안 가톨릭 수사(修士)로 지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 수도복을
벗어 던졌다.
“이곳에서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무조건 가장 오래 굶은 사람이 먼저 먹습니다.” 노숙인이나 배고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꼴찌들이다. 이곳에서나마 줄서기와 눈칫밥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서 씨의 깊은 배려가 깔려 있다.
낡은 식탁
하나로 시작한 가게는 24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최근 바로 옆에 공간 하나를 더 마련했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400명에서 500명 정도. 하루 짓는 쌀만 20㎏짜리 예닐곱 포대를 풀어야 한다. 오늘 이집의 식단은 계란말이, 마늘장아치,
열무김치, 어묵조림, 미역국 등이고 후식은 수박화채다.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민들레 국수집’에는 정작 ‘국수’가 없다. 초기 식단은
국수였지만, 밀가루로는 ‘손님’들의 허기를 달랠 수 없어 메뉴를 변경했다. 언젠가 모든 이들이 배고프지 않은 그날, 국수는 그저 간식으로 내놓을
수 있길 바라며 가게 이름도 국수집을 고수하고 있다. 이곳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집배원, 회사원, 주부 등 뜻을 함께하는 순수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한다. 식당 안 식자재 창고에는 전국 각지의 발송지가 적힌 쌀, 고추장, 채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중년의
남자 한명이 검은 봉투 하나를 식탁에 슬쩍 놓고 간다.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겨져 있다. “저 분, 기장님이세요” “기장님이요?” “예, 대한항공
조종사예요”
서울 등촌동에 사는 윤종원 씨는 비행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와서 봉사를 한다. 이곳에서 5년 동안 계란말이를 도맡아
만들어 이제는 계란말이의 달인이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다.
국수집에서 150m쯤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민들레 홀씨가 떨어졌다. 아이들을
위한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이 문을 열었다.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은 물론 맞벌이 등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울려 쉬며 밥과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36㎡의 1층에는 식당이, 비슷한 넓이의 3층에는 공부방이 자리 잡고 있다.

화도진

화수동
언덕은 요새였다. 외국함대와 상선 등 이양선(異樣船)이 인천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자 조선정부는 고종 16년(1879)에 강화도에서 캐온 돌을
이용해 화도진(花島鎭)을 구축했다. 화도진은 묘도(괭이부리)북변포대, 호구(논현동)포대 등 인천 해안선을 빙 둘러싼 포대들을 예하부대로 둔
야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다. 1894년 10월 말경에 폐쇄됐고 해방 전에 인근지역이 매립되면서 터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췄다. 화도진은 지난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花島鎭圖)’를 토대로 복원됐다. 복원 공사를 할 당시 이 터에는 피난민과 도시 빈민의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100여년 전 화도진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으며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정문 옆에 약 20여 채의 민가가 있었으며 간혹 말을 탄 병사가 총 이나 창을
비켜들고 왕래했고 어쩌다 가마를 탄 양반들이 드나들곤 했다.
화도진 옆 작은 마당에는 사람 키 높이만큼의 한미수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약 체결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로 인해 동헌 안에 있는 조약식 재현 밀랍인형들이 머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도진 언덕에 올라서면 영종도와 작약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고층 아파트와 공장들 사이로 어렴풋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화도진은 100년 질곡의 역사를 품은 채 앞바다에 떠있는 ‘이양선’들을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화도진 뒤쪽 동네로 내려오면 쌍우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천 향토지에서 조차 이 우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화도진도에 우물
정(井)자가 표기된 정도다. 무네미의 쌍우물은 맑고 시원해서 화도진 병사들도 길어다 마셨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우물 중
건너편에 있던 우물은 민가가 생기면서 없어져 지금은 명칭만 쌍우물일 뿐이다.
“물맛은 좀 짰어. 그래도 물이 잘 나와서 만석동,
송현동에서도 물지게 지고 와서 하루종일 줄 서서 퍼갔지.”
19세 때 이 동네로 시집와서 50년 넘게 근처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가
우물의 과거를 전한다. 지금은 우물 뚜껑이 굳게 닫혀져 있고 특이하게도 우물 몸통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가끔 그 꼭지를 통해 물을 빼버릴
정도로 우물은 여전히 원기왕성하다. 매년 10월 살아있는 이 우물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쌍우물축제가 열린다.
화수동은 아직도
주변에 공장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들고 나는 동네다. 이런 동네에 복덕방은 여전히 중요한 필수업소다. 한쪽은 쌀가게, 다른 한쪽은
복덕방을 하는 강화부동산도 그 중 하나다. 사장 김송자(75) 할머니는 1978년에 가게 문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장사하던 강화사람이 40년
전에 취득한 양곡매매신고서와 간판을 고스란히 양도 받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쌀을
사러왔다가 동네 셋방 사정을 물어보곤 했다. 평소에 귀동냥을 해서 들은 정보로 이 방 저 방을 소개해주곤 했다. 그 댓가는 계란 한판, 박카스
한 박스 등이었다. 김 할머니는 아예 싸전 옆에 ‘강화복덕방’ 간판을 내걸었다. 물론 자격증은 없었지만 하루에도 두세 건은 거뜬히 계약을
성사시켰다. 복비는 정해진 게 없었다. 쌀을 자주 사가는 사람에게는 공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에게도 공짜.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이사 온
농촌총각에게는 월급 받은 후 주는 대로.
그에게는 낡은 다이어리 수첩이 10여권이 있다. 그 수첩에는 30여년 동안 거래한 매물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다. 수첩 하나를 들쳐봤다. 백구두 할아버지, 이빨 빠진 키 큰 아저씨, 천식 있는 아줌마, 귀걸이 많은 아줌마, 원룸 노처녀,
예쁜 제주도 색시…’ 등 신체적인 특징을 적어 놓았거나 혹은 ‘경숙이 이모, 미륭아파트 사는 젊은 엄마, 봉섭이 누나…
“다 기억하지.
그게 내 암호여. 이름은 까먹어도 그 사람 특징은 한번 쓱 보고 수첩에 적어놓으면 생생하게 기억나요. 이 동네는 전국 각지에서 직장을 찾아
올라온 젊은이들이 많아요. 방 얻으러 왔다가 중신 좀 서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간혹 있지요. 집주인들도 며느리감이나 사위감 될만한 사람을 골라서
세놓고 싶어 해요.”  
화수동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날까지 두 평짜리 복덕방 책상에 놓인 할머니 다이어리 수첩에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들이 계속 채워질 것이다.

화수동을 화수동 답게 했던 것은 화수부두다. 화수부두는 6,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옹진, 강화, 충청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이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 연평도 등 섬이었지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은 화수부두였고
선주들은 인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1960년대에 이미 자가용을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화수부두에는 수협공판장, 얼음공장,
어구상점, 식당 등이 즐비했고 새우젓 배들이 입항하는 날이면 큰길까지 비릿한 난장이 서곤 했다. 여름날 인근에 사는 아이들은 얼음공장에서
선박으로 나르는 공중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얼음조각을 주워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제 화수부두는 도시의 오지(奧地)가 되었다.
문명도, 문화도, 세인의 관심도 모두 비껴 간 안쓰러운 부두가 되었다. 옛날의 화려한 모습은 오간데 없고 고달픈 삶의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공장과 북항 개발로 포구로서의 여백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출항도 가물에 콩 나듯 하는지 경찰마크 뜯긴 선박출입통제소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한동안 비린내 맡기도 힘들었던 이 부두가 최근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5월 화수부두 수산물직매장이 문을 열었다. 부둣가
옆에 자리 잡은 이곳은 화수부두에 정박하는 어선의 선주 32명이 직접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을 판다. 철저하게 100% 자연산만 판매하고 있어
입맛 까다로운 식도락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뚝딱뚝딱~. 부두 후미진 곳에서 망치소리가 들린다. 조그만 창문을 낸 흰 장막이
사방을 두르고 있다. 틈새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전부인 그곳에 나무 배 한 척이 통째로 들어차 있다. 19세부터 어부로 살아 온
유동진(68) 씨가 혼자서 목선을 만들고 있다. 벌써 3년째다.
“9톤짜리 내 배를 만들고 있어요. 재미있어요. 절약도 하고 튼튼하게.
무엇보다 내가 내 마음대로 디자인한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배가 될 거예요.”
일종의 DIY(Do-it-yourself) 방식으로
배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연필을 들었다. 종이는 따로 없다. 구겨진 지난 신문을 두 손으로 쫘악~ 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볼펜을 쥔
손은 굳은살로 두텁다.
이제 머지않아 방수처리를 한 후 엔진, 스크루 그리고 각종 기계를 목선의 빈 공간을 채우게 된다. 이 목선이
완성되면 ‘선광호’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일생동안 그가 탄 배들은 모두 ‘선광호’였다. 다섯번째 이 선광호를 완성하면 화수부두에서 진수식을 할
것이다. 선광호 키를 잡고 부두를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가는 유 선장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림자 길어진 시간, 부두를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추억이 스며있는 비린내와 뱃고동이 바람에 실려 왔다.

< 그때, 이곳 만석동 >

이천전기

일제강점기 1938년에 설립된 군수공장으로 해방 후 변압기 등을 생산하는 이천전기로
재도약했다. 93년 삼성에 인수되었다가 98년 12월 일진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일진중공업이 되었고 2002년 일진전기로 다시 사명이
바뀌었다.

인천부립공중욕장(부영탕)

우리나라에 대중욕탕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24년 평양에서다. 부(府)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며 관리인을 따로 임명하였다. 인천에서는 1932년 신화수리(화수동)에 148.8㎡의 규모로 부립 공중욕장이 설립되었다. 욕탕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화도교회 선교원이 들어섰다. 

이즉

화수동에는 고성 이씨, 소성 이씨가 여러 대에 걸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지금의 화수2동 일대에는 조선
인조 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의 선조인 이즉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인조는 이곳에 있던 이즉의 묘를 모두 파내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관원들이 묘를 찾으러 왔을 때 짙은 안개가 껴 찾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이곳이 명당이라는
이야기다. 

황해도평산소놀음굿보존회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무당이 소 모습으로 꾸미고 농사의 풍년과
장사의 번창,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노는 굿놀이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 동구에는 황해도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 이 놀음굿이 전승되고 있고 화수동에 보존회가 있다. 화도진에서 매년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을 공연한다.
인천시 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이다.

대건중학교

화도진 부지 일부에 1945년 9월 영화중학교 53년 11월 영화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63년 대건중학교로 변경되었고 88년 중학교는 폐교되고 고등학교만 남았다. 이마저도 88년 연수구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영풍아파트가
들어섰다.

보라매보육원
1951년 3월
영종도에 김보경 원장이 설립했다. 66년 10월 현재의 위치(화수동 140번지)에 이전했다. 현재 건물은 2008년에 신축했다.

인천공작창
1937년 7월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으로 설립되었고 해방 후 1945년 12월 상공부 직할 조선차량주식회사로 발족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400여 종업원들을 불러들여 공장
안에 방치된 미완성의 기관차, 객차, 화차 등을 손질해 화차 7량을 완성시켜 인천-영등포간 시운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1950년 10월
교통부로 다시 이관하여 인천공작창으로 바뀌었다.
1980년 대전공작창으로 통폐합해 대전으로 이전했고 부지 2만3천 평에는 동부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서울식당

가장 인천적인 곳, 화수부두에 ‘서울’ 간판을 단 식당이 있다. 40여년 된 서울식당은
복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주인장 안문숙 할머니(85)가 직접 담아 온 장으로 복탕을 만든다. 복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살아있는 것을 직송해
온다. 인천에 새로 부임하는 고위공직자나 탤런트들이 많이 찾는 맛 집으로 알려져 있고 20~30년 넘게 이곳을 드나드는 단골손님들이
많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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