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화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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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냉면,
함세덕…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화평동

도시를
가로 지르는 철도로 인해 중심지에서 조금 비켜 서있던 화평동.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요리책 어느 페이지에도 없던,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냉면의 발생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냉면 삶는 냄새를 뒤로 하고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인천이 낳은 거인들의 발자취를 쫓을 수
있다. 비가 오면 인천 곳곳을 거쳐 온 빗물이 이곳에 모였다. 이 물은 갯골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화평동에서 태어난 이들은 빗물처럼 거친
바다로 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남겼다.
   

화평철교를 사이에 두고
중구와 동구가 갈린다. 동인천 지역이 한창 융성할 때는 화평철교가 도심의 화려함과 거주지의 소박함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동구에 속한
화평동의 뿌리는 평동(平洞)이다. 동네가 평평해서 얻은 이름인데 일부 지역은 평평하기 보다는 지대가 낮다. 낮다보니 비가 내리면 물이 모이곤
했다. 이 물은 갯골을 만들었다. 
화평치안센터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다리 표지석 두개가 남아 있다. ‘송현교’라고 새겨진 이 표지석은
마치 뽑다만 덧니처럼 박혀 있다. 예전에 위쪽으로 다리가 있었던 흔적인데 남은 표지석을 기준 삼아 발걸음으로 어림잡아 측량해보면 폭 3m, 길이
15m 정도의 크기이다. 이 다리 밑으로 화평동 일대로 모인 물과 바다에서 밀려들어 온 짠물이 만나 흘렀다. 수문통이라 불린 이곳부터 옛
인천극장이 있는 언덕배기 까지가 화평동이다.
화평동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아무래도 냉면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함흥냉면이나
평양냉면 측에서 보면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화평동 냉면은 일단 지름 30㎝ 가까운 세숫대야처럼 생긴 그릇에 모두들 써프라이즈. 이 특이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것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맛에도 뒤지지 않는다. 고추장 양념과 오이, 무. 열무, 깨 등의 채소 고명의 조화는
특유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같은 종류의 음식점이 한데 모이면 슬슬 ‘원조’ 다툼이 시작된다. 화평동 냉면도 예외는
아니다. 원조에 대한 규명은 결국 그 골목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보게 된다. 6.25 전쟁 이후 화평철교를 기점으로 경인철로 변을 따라 무허가
집과 가게들이 들어섰다.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서 너 평 정도의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인들이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하나 둘 개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냉면골목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현재 냉면 골목 중간쯤에 자리 잡은
‘아저씨 냉면집’의 간판을 원조 밝히기의 단초로 삼을 만 하다. ‘길 건너편 허름한 집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집으로 거짓이면 다른 집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간판의 반 이상을 할애해 적어 놨다. 이 간판이 아무 문제없이 계속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냉면집들도 이 집을
원조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양이다.
‘원조’로 추정되는 아저씨집에서 냉면을 시켜놓고 취재에 응하기를 요청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아저씨’. 시간이 좀 지나자 식탁을 맴돌면서 하나둘씩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아저씨가 냉면을 말기 시작한 것은 현재 서른 다섯살 된
아들이 태어나기 한 두해 전, 그러니까 1976년경이다. 지금은 경인선 복복선 공사로 다 헐리고 없어졌지만 건너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 등
가게들이 즐비했다. 아저씨는 솜틀집 옆 작은 가게에서 탁자 한 개를 놓고 냉면집을 시작했다. 당시 인천 냉면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인면옥의
냉면 값이 4,500원 할 때 이 집은 500원짜리 냉면을 팔았다. 지금은 4000원. 아직도 당시 경인면옥의 냉면 값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가격에 비해 양은 풍성했다. 엄청난 양을 담기 위해서 두터운 스텐레스 재질의 양푼을 개당 9,900원에 금형 떠서 특별 주문했다. 만들고
보니 세숫대야 모양의 그릇이 되었다. ‘지금의 이 그릇이 그때 만든 것이냐’고 했더니 ‘30년 넘게 닦았더니 두께가 거의 절반으로 닳았지만 그
그릇을 아직도 내 놓는다’는 다소 믿기 힘든 답변이 돌아왔다.
80년대 초 만해도 인근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제철 그리고 인천항 부두
근로자들이 작업복 입은 채로 허름한 냉면집을 찾았다. 한창 때는 새벽 6시 동틀 무렵에 가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원한
냉면으로 해장도 하고 배도 채우기 위해서다.
전성기 때는 골목 양쪽으로 23개나 있었던 냉면집이 이제는 10여 곳만 남았다. 이 마저도
곧 불어 닥칠 재개발로 인해 자리를 지키며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대신에 이곳을 고향으로 둔 화평냉면이 인천 시내는 물론 서울 등
전국으로 면발처럼 길게 퍼져나가고 있는 것에 그나마 위안 삼아야 할 것 같다.  

철길이 넓어지기 전 현재의 냉면집 맞은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양화점은 주로 맞춤과 기성품을 병행하는 집이었다. 특히
인근에 공장들이 많이 있었던 까닭에 군화를 물들인 안전화를 많이 팔았다. 기성화를 갖다가 파는 구둣방도 몇 집 있었다. 길 한쪽 줄이 통째로
철거되었다. 두 어집은 동인천 쪽으로 이전해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다. 이곳 양복점은 경동 거리 양복점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B급이랄까.
간판도 내부 장식도 화려하지 않은 동네 양복점이었다. 럭셔리 고급양복이라기보다는 서민들이 마음먹고 한 벌 장만하는 수수한 양복들을
만들었다.
이들 틈에 솜틀집들이 있었다. 그중 인천에서 가장 오랜 솜틀집은 ‘은율면업사’. 황해도에서 피난 온 박재화 씨는 고향 은율에서
하던 목화업을 이어가 이곳에서 은율면업사를 열었다. 아들 박현석 씨 그리고 손자 박길주 씨에 이르기까지 2000년까지 3대째 솜틀집을
운영하였다. 10여 평의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기름때 묻은 솜틀기계 하나. 60년대 방직공장에서 쓰던 중고를 사다 개조한 것이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민들이 사용하던 이불속 목화솜을 가지런히 펴는 작업에 정성을 다했다. 솜뭉치 속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연탄불도 없는 구들장에서 온 가족이 한 이불에 덮고 자던 기억, 가난한 살림을 줄여 큰맘 먹고 첫
신접살림으로 장만했던 일 등. 솜이불에는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이제 솜 트는 기계 소리를 더 이상 화평철교 인근에서 들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은율면업사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솜틀기계는 고인의 유언대로로 송현동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오늘도 박 씨 3대는 좁은 골목길에 자리 잡고 대지이발관 박정양 씨, 연탄가게 유완서 씨를 이웃으로 두고 여전히 솜을 틀고 있다. 

화평동
옛거리
함세덕 일가(어린아이가
함세덕)

화평동을 냉면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운
동네다. 화평동 골목에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의 태가 묻혀 있다.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기와집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동네를 거닐다보면 먼저 ‘함세덕’이란 이름 석자와 만나게 된다.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은 1915년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년 조선문학에 희곡 ‘산허구리’를 발표하면서 연극계에 명함을 내민 뒤 39년 1막짜리 단막극 ‘동승’으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무의도 기행’ ‘도념(道念)’ ‘해연’ 등 20여 편의 역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돈기에 나온 그의 작품은
가난과 자유가 주 테마였고 토속적이고 때론 치열한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40여 년 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함구 대상’ 작가였다.
그의 생가가 궁금했다. 번지 주소와 사진 한 장만 갖고 탐문한 끝에 마침내 생가를
찾아냈다. 반가움도 잠시, 폐업한 소주방으로 변해 버린 집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옥상에 올라가서
뒷집을 내려다 볼 수 있을까요”
“뒷집에 뭐 볼게 있다고…”.
뒷집의 ‘정체’를 몰라 마득치 않은 눈치를 보이는 아줌마의 시선을
뒤로 하고 이웃집 옥상에 올라가서 생가를 내려다보았다. 낡았지만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옥상에서 보니 기다란 경인선 철도길이 한눈에 들어 왔다. 그는 이른 새벽 화평철교를 털컹거리며 지나는 철마 소리에 잠을 깨고
수문통에서 묻어나온 바다 특유의 내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평동의 바람과 냄새는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35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고개’라는 시는 19세까지 인천에 머물렀던 시절에 쓴 것이다. 이 ‘고개’가 혹시 집 앞
‘화도고개’를 맘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앞서 나간 것일까.
다른 골목, 화평동 37번지에서는 우리나라 미술계를 대표하는
‘거목’과 마주한다. 1919년 이곳에서 태어난 석남 이경성 선생(2009년 작고)은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무엇보다 인천시립박물관 시절 6.25 전쟁의 난리통 속에서도 귀중한 문화재를 몸으로 지켜냈다. 박물관 아래 시장 관사 방공호에 문화재급 유물
19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55점 등 유물 200여 점을 포장해 옮겨 놓았다. 그의 이런 행동이 없었다면 중요한 유물들은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비평 1세대로 미술행정가와 평론가, 화가로 일생을 살았으며, ‘한국미술사'(1962) ‘한국근대미술연구'(1975)
‘한국근대회화'(1980) 등의 저술을 남겼다.

냉면 골목 중간쯤, 주위 분위기와 동떨어진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입구에는 ‘평안수채화의 집’이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수채화가
박정희(90) 할머니가 거주하며 이웃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집이다. 박 할머니는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따님이다. 송암
선생과 함께 율목동에 살다가 결혼해서 1949년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작고)가 콘크리트 건물로
짓고 ‘평안의원’이란 간판을 걸었다. 지금은 건물 외벽 전체에 당시 평안의원의 모습과 의사 가운을 입은 남편 유영호 박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 건물이 제일 높았겠네요”
“지금도 제일 큰데… 내가 이 동네 터줏대감이여.”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제2공립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이후 30년 동안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서른 살 때부터 그림을 이웃에게 가르치다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가 키워 낸 제자는 200여명이 된다. 붕어빵 파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주부, 학생 등 지위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이 안에선 모두 평안한 예술가였다.
박 할머니는 아직도 현역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50점 정도를 그린다.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그림값은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수채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정작 주위와 나누고 싶었던 건
그림이 아니라 사랑인 듯했다.


인천극장

지금은 동인천역이
북쪽으로도 출입구가 나있고 북광장도 있지만 예전에는 인현동 쪽으로만 나있고 송현동 쪽은 철로로 막혀 있었다. 화평동은 중심가와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사람들의 동선(動線)과 심리적으로 인해 변두리로 치부되었다. 이런 화평동에도 한때 인천극장이란 영화관이 있었다. ‘인천’이란 지명의
이름을 딴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은 삼류극장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인천 주변의 개봉영화관과는 달리 서울에서 이미 개봉이 끝나 스크린에서
내려버린 영화 두 편씩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화수동, 만석동, 전동의 꼭지점 역할을 하면서 ‘변두리의 중심지’였던 극장 주변은 바로
앞에 화수자유시장이 자리 잡고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건달들도 등장했다. 가끔 인천극장 앞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지역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지금은 마트, 헬스센터 등 복합상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극장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극장에서 냉면골목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황인의원이 나온다. 병원간판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 ‘since 1958′ 이란
표식이 있다. 병원 개원이 ’58년 개띠‘로 인천에서는 연조 있는 병원임을 은근히 내세운 것이다.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고 비교적
중심가에 자리 잡은 덕에 환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동네병원 격이지만 인천에 종합병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의
환자들과 전염병 치료에 한몫을 담당했다. 굳건히 한 지역을 고수하며 대를 이어서 산재를 당한 주변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의술을 펼치고 있다. 

< 그때, 이곳 화평동 >

화평철교

옛 인천여고 앞길에서 송현동으로 가는 내리막에 있는 경인선 철교를 말한다. 당초 철로는
1899년 동인천역 앞 대한서림 쪽으로 휘어져 있었는데 1900년도 일본철도운송조합에서 직선화하며 이 철교가 생겼다는 설이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 약 7.5m로 자동차 두 대가 교차하기에는 쉽지 않은 철교를 1964년 11월 폭 20m(차도 14m, 보도 3m) 폭으로 확장했다. 이후
약간의 확장 공사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우지하고 있다. 

화수자유시장

‘화수’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옛 인천극장 바로 앞에 있는 화평동 생활권
시장이다. 원래 이 자리는 대한성냥공장이 있었고 공장이 이전한 후 40여 전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시장들은 지붕이 없었는데 이
시장은 70년대 초 튼튼한 철근으로 엮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그 아래 상가와 노점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화도진터에 있던 달동네가 공원으로
개발되고 피난민 동네가 아파트로 변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천극장이 나가면서 그 자리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시장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평안 수채화의 집

국내 최고령 수채화 화가 박정희(朴貞嬉·90) 화백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그는 예순이
넘은 1985년에야 어릴 적 꿈인 화가에 도전했다. 30여년 가까이 수채화가로 활동한 박 화백은 전시회 수익금을 시각장애인 장학금, 개안수술비,
점자도서관 건립비용 등으로 지원한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5남매를 키워온 과정을 담은 일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2001)는 당시 생활사와 교육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손으로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려 넣은 원본은
국가기록원에 기증될 계획이다. ‘평안’이란 이름은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가 이 자리에서 ‘평안의원’을 개업한데서 비롯되었다.

인천극장
동인천 부근에 있었지만 동시상영관으로
삼류 취급을 받았다. 한때 불량배가 많기로 소문난 극장이었다. 1955년 3월 이민 씨와 김태훈 씨가 연극 전문극장으로 개관하였다. 이듬해
1956년 4월 24일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었다. 1960년대 시민극장에서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오다 2001년 9월에 문을
닫았다.

함세덕 동승
문화재청은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 초판본을 근대문학유물로 목록화 했다. 이 작업은 개화기부터 1950년대까지 발간된 문학관련 저작물 중 문화재로서 연구·보존 가치가 높은
작품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의 희곡집에는 ‘동승’ ‘무의도기행’ 등 5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각 작품 첫머리마다 홀수 별면에 삽화를 넣어 극의
배경을 짐작케 했다.

삼화목욕탕

화평동 만화로 사거리에서 송현초교로 가는 좁은 골목길에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
개장한 목욕탕이다. 그동안 주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영업을 한 목욕탕으로 현재 인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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