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 대문 옆 돌기둥, 개항기 역사 품고 잠들어 (박물관이 들려주는 인천 이야기)
출처 : 기호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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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철 대문 왼쪽에 서 있던 돌기둥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 기둥에 새겨진 7글자 중 ‘부도(敷島)’라는 한자였다. 일제강점기 신흥시장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 부도정(敷島町)이었고, 당시 인천을 대표했던 유곽(집창촌)이었기 때문에 기둥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런데 돌기둥이 서 있던 신생동 28-1번지는 부도정에서 500m 넘게 떨어진 당시 궁정(宮町)에 속해 있던 곳이다. ‘부도’라는 지명이 새겨진 돌기둥이 어떻게 해서 한참 떨어진 여기에 서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돌기둥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 첫머리에 등장하는 ‘敷島’라는 글자는 부도정이라는 지명을 뜻한다. 1900년대 초까지 이곳은 기정동이라 불리던 전형적인 조선인 마을이었다. 1902년 부도루라는 성매매업소가 처음 들어선 이후 업소들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유곽을 형성했고 일대를 부도유곽이라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본인들의 거리를 일본식 지명으로 바꿨는데 그때 부도유곽이 있던 기정동은 부도정이 됐다. 그 아래 ‘一力樓’는 부도유곽에 자리했던 성매매업소의 이름으로 주소지는 인천부 부도정 38번지(중구 선화동 38)였다. 주소지를 제외하고 일력루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력루의 이름이 등장하는 자료는 1929년 간행된 「속편 인천항」이라는 책과 1931년에 만든 「경성인천전화번호부」가 유일하다. 그나마도 상호명과 전화번호, 주소지 등 아주 간략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1937년 제작된 「대경성사진첩」이라는 책에 소개된 부도유곽에 일력루의 이름이 빠져 있어 1937년 이전에 폐업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지막 ‘納之’라는 글자는 비석을 세운 목적을 알려 준다. 즉, 돌기둥을 헌납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 주체가 앞서 말한 부도유곽 내 일력루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에서 우리는 이 돌기둥이 1937년 이전 어느 시기에 부도유곽에 있던 일력루라는 성매매업소에서 만들어 바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성매매업소에서 사찰로 1900년 4월 진언종의 본산인 금강봉사에서 조선 포교를 위해 지어진 사찰로 동인천 이마트 쪽의 해안가 언덕에 건물을 짓고 ‘금강봉사 출장소’라 불렀다. 1905년 인근 언덕을 절개해 부지를 마련하고 대사당과 본당을 신축한 뒤 편조사라 이름 붙였는데 초대 주지였던 오카모토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한때 신도 수가 200호에 이르렀다 한다. 2천300여㎡의 부지에 4~5개의 사찰 건물이 있었고, 본당과 대사당이 위치했던 중심구역에는 1970년대 신축된 4층 규모의 인천여상 실습실이 들어서 있다. 편조사의 정문은 동인천 이마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돌기둥이 서 있던 대문은 위치상 편조사 후문 자리로 대문 안쪽 민근홍 씨 자택이 자리잡은 곳은 사찰의 외곽 구역에 해당한다. 특이한 것은 해광사의 돌기둥처럼 시주자의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업소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으로, 개인의 건강이나 가족의 화목보다는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 돌기둥을 시주했다고 볼 수 있다. # 비석 아닌 기둥
우선 전면 상단과 하단의 다소 거친 표면에 혹뜨기(울퉁불퉁하게 돌을 마감한 모양)로 한 양각 장식, 그 사이의 표면을 다듬어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글씨가 없는 나머지 삼면은 전체적으로 거칠었다. 전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뒤에 글자를 새겨 넣는 일반적인 기념비의 형태에 비춰 볼 때, 비석으로 보기에는 표면의 장식이 과하다는 느낌이었다. 구멍의 크기가 작지 않아 경첩의 크기와 문의 규모도 상당했을 것이며, 재질은 나무가 아닌 금속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경첩 구멍이 중앙과 하단에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의 높이는 기둥의 절반 가량 됐을 것이고, 장방형이거나 중앙이 높은 아치형 문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인천 역사의 한 조각 아쉬운 것은 처음 이 돌기둥을 봤을 때 그저 기념비의 하나로 판단해 글자가 없는 반대편 돌기둥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돌기둥까지 조금 더 자세히 봤다면, 그리고 그 내용을 주인장에게 알려 줬다면 지금 박물관 우현마당에는 한 쌍의 돌기둥이 서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돌기둥이 박물관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처음 그 존재를 알려 주고 답사도 함께했던 박물관 자원봉사자 장회숙 씨, 주인장 민근홍 씨를 소개해 준 중구투어 코디네이터 류옥경 씨,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에 기증해 주신 민근홍 씨께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릴 뻔했던 인천 역사의 한 조각을 복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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