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구소식

하늘빛 대문 옆 돌기둥, 개항기 역사 품고 잠들어 (박물관이 들려주는 인천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9-05 10:45
조회
474

          출처 : 기호일보


2014년 09월 04일 (목)  지면보기   |   16면기호일보 [email protected]

개항장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도시 인천에는 유독 근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은 인천이라는 도시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갖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에, 혹은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사물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을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그 이야기들이 모여 한 시대의 역사를 이루는데도 말이다.

이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유물과 유적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박물관 학예사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 맞는 주제를 선택해 격주로 전해줄 것이다. 연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인천’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의미있는 도시인지 알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장(野帳)은 박물관 학예사들이 유물 발굴 등 현장 조사를 실시할 때 기록하는 장부(수첩)를 말한다. <편집자 주>


하늘색 철 대문 왼쪽에 서 있던 돌기둥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 기둥에 새겨진 7글자 중 ‘부도(敷島)’라는 한자였다. 일제강점기 신흥시장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 부도정(敷島町)이었고, 당시 인천을 대표했던 유곽(집창촌)이었기 때문에 기둥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그런데 돌기둥이 서 있던 신생동 28-1번지는 부도정에서 500m 넘게 떨어진 당시 궁정(宮町)에 속해 있던 곳이다. ‘부도’라는 지명이 새겨진 돌기둥이 어떻게 해서 한참 떨어진 여기에 서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돌기둥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
‘부도일력루납지(敷島一力樓納之)’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의 비밀을 풀어야만 이 돌기둥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敷島’라는 글자는 부도정이라는 지명을 뜻한다. 1900년대 초까지 이곳은 기정동이라 불리던 전형적인 조선인 마을이었다.

1902년 부도루라는 성매매업소가 처음 들어선 이후 업소들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유곽을 형성했고 일대를 부도유곽이라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본인들의 거리를 일본식 지명으로 바꿨는데 그때 부도유곽이 있던 기정동은 부도정이 됐다.

그 아래 ‘一力樓’는 부도유곽에 자리했던 성매매업소의 이름으로 주소지는 인천부 부도정 38번지(중구 선화동 38)였다. 주소지를 제외하고 일력루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력루의 이름이 등장하는 자료는 1929년 간행된 「속편 인천항」이라는 책과 1931년에 만든 「경성인천전화번호부」가 유일하다. 그나마도 상호명과 전화번호, 주소지 등 아주 간략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1937년 제작된 「대경성사진첩」이라는 책에 소개된 부도유곽에 일력루의 이름이 빠져 있어 1937년 이전에 폐업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지막 ‘納之’라는 글자는 비석을 세운 목적을 알려 준다. 즉, 돌기둥을 헌납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 주체가 앞서 말한 부도유곽 내 일력루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에서 우리는 이 돌기둥이 1937년 이전 어느 시기에 부도유곽에 있던 일력루라는 성매매업소에서 만들어 바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성매매업소에서 사찰로
돌기둥을 발견한 곳은 인천여상 후문에서 신흥동 방향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막다른 골목에서다. 골목 끝 널찍한 마당이 딸린 단층 양옥집의 철 대문을 받치고 있던 돌기둥은 이 집 주인인 민근홍 씨가 기증한 것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불교 진언종의 편조사(遍照寺)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00년 4월 진언종의 본산인 금강봉사에서 조선 포교를 위해 지어진 사찰로 동인천 이마트 쪽의 해안가 언덕에 건물을 짓고 ‘금강봉사 출장소’라 불렀다.

1905년 인근 언덕을 절개해 부지를 마련하고 대사당과 본당을 신축한 뒤 편조사라 이름 붙였는데 초대 주지였던 오카모토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한때 신도 수가 200호에 이르렀다 한다.

2천300여㎡의 부지에 4~5개의 사찰 건물이 있었고, 본당과 대사당이 위치했던 중심구역에는 1970년대 신축된 4층 규모의 인천여상 실습실이 들어서 있다. 편조사의 정문은 동인천 이마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돌기둥이 서 있던 대문은 위치상 편조사 후문 자리로 대문 안쪽 민근홍 씨 자택이 자리잡은 곳은 사찰의 외곽 구역에 해당한다.

부도유곽 내 성매매업소 일력루와 일본 사찰 편조사와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력루에서 돌기둥을 만들어 편조사에 시주하면서 그 내용을 새겨 넣었다는 것인데,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흥동 해광사(당시 화엄사)에도 남아 있다. 일력루를 운영했던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편조사의 신도였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해광사의 돌기둥처럼 시주자의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업소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으로, 개인의 건강이나 가족의 화목보다는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 돌기둥을 시주했다고 볼 수 있다.

  
 

# 비석 아닌 기둥


돌기둥을 처음 봤을 때 기둥이라기보다는 기념비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글자가 워낙 깊게 새겨진데다 글씨도 꽤 좋았기 때문이다. 돌기둥을 기증받은 뒤 자세히 살펴보니 비석으로 보기에는 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우선 전면 상단과 하단의 다소 거친 표면에 혹뜨기(울퉁불퉁하게 돌을 마감한 모양)로 한 양각 장식, 그 사이의 표면을 다듬어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글씨가 없는 나머지 삼면은 전체적으로 거칠었다. 전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뒤에 글자를 새겨 넣는 일반적인 기념비의 형태에 비춰 볼 때, 비석으로 보기에는 표면의 장식이 과하다는 느낌이었다.

기둥의 우측 중간과 하단에는 5×3㎝의 구멍이 2.5㎝의 깊이로 뚫려 있는데 무언가를 잡아주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한 쌍으로 이뤄져 있던 돌기둥이었기 때문에 없어져 버린 반대쪽 돌기둥에도 같은 양식의 타공이 있었을 것이고, 양쪽 기둥의 구멍이 잡아줬던 것은 문을 여닫는 데 사용했던 경첩이었을 것이다.

구멍의 크기가 작지 않아 경첩의 크기와 문의 규모도 상당했을 것이며, 재질은 나무가 아닌 금속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경첩 구멍이 중앙과 하단에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의 높이는 기둥의 절반 가량 됐을 것이고, 장방형이거나 중앙이 높은 아치형 문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인천 역사의 한 조각
돌기둥에 새겨진 7글자, 서 있던 장소, 형태 등을 단서로 이 돌기둥은 일제강점기 부도유곽의 성매매업소 일력루에서 편조사에 시주했던 후문의 기둥임을 알게 됐다.

아쉬운 것은 처음 이 돌기둥을 봤을 때 그저 기념비의 하나로 판단해 글자가 없는 반대편 돌기둥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돌기둥까지 조금 더 자세히 봤다면, 그리고 그 내용을 주인장에게 알려 줬다면 지금 박물관 우현마당에는 한 쌍의 돌기둥이 서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돌기둥이 박물관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처음 그 존재를 알려 주고 답사도 함께했던 박물관 자원봉사자 장회숙 씨, 주인장 민근홍 씨를 소개해 준 중구투어 코디네이터 류옥경 씨,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에 기증해 주신 민근홍 씨께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릴 뻔했던 인천 역사의 한 조각을 복원할 수 있었다.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부도유곽(敷島遊廓)
유곽이란 메이지유신 이후 공창제를 도입한 일본이 성매매업소를 모아 놓은 공간, 이른바 집창촌을 말한다.

  
 

190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유곽인 부산 녹정유곽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에 자극받은 인천 화개동(지금의 신흥동) 일대의 색주가 17곳이 각 800엔씩을 공동 출자해 부도루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것이 인천 유곽의 시초다.

때마침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으로 많은 일본군이 인천에 주둔하면서 부도루는 호황을 맞이했고, 업소가 하나둘 늘어나자 지금의 신흥시장 입구로 유곽이 형성돼 부도유곽이라 불렀다.

개업 당시 부도유곽의 화대(花代)는 주간 3엔 50전, 야간 3엔, 하룻밤에 5엔 등 시간에 따라 차이를 뒀고, 술과 음식도 함께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의 부침에 따라 문을 닫는 업소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문을 여는 업소도 생겨나 1932년 부도유곽에는 부도루 외에 송산루·일력루 등 10개의 업소에 78명의 창기가 종사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공창제가 폐지되면서 암암리에 사창으로 운영되다가 1960년대 초 사회정화 차원에서 이곳의 유곽을 숭의동으로 이전시키는데 그곳이 지금 ‘옐로우하우스’가 됐다. 그리고 유곽이 있던 자리에는 신흥시장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도유곽의 업소들은 주로 신흥시장 입구에서 옛 국제경양식 방향으로 뻗은 길(서해대로 454번길) 양쪽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돌기둥을 시주했던 일력루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원래 길다란 형태의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우측 건물은 철거돼 골목길로 사용되고 있고, 남겨진 좌측 건물은 ‘골목집’이라는 음식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내부와 외부 모두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그때의 쓰임에 맞게 변형됐지만, 상당 부분 남아 있는 내부 구조를 요모조모 살펴보면서 당시 유곽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