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마을을 꿈꾸다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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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가 확장되면서 생겨난 최근의 마을들은 ‘이웃들이 함께 사는 삶터’보다는 경제논리에 따라 ‘짧은 기간에 완성되어 이주하는 곳’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계양역에서 경인아라뱃길을 건너가면 만나게 되는 공기가 맑고 아담한 장기동 역시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가 도시확장에 의해 도시민들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도시와 농촌이 결합된 마을이 되었는데요.

  다양한 생활패턴을 가진 주민들이 짧은 시간 안에 어울려 지내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운 화합이 이루어지는 ‘함께 사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농촌 원주민과 도시 입주민간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에 찾아가 김여현 선생님과 동네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의 김여현 선생님

 

 

장기동은 어떤 동네인가요?

  계양구 장기동은 인천이지만 인천이 아닌(?) 동네일 수도 있다.(웃음) 인천과 서울, 김포의 3개 도시 경계지점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전에 농촌과 우시장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는데, 부농들이 많았고, 우시장(牛市場)인 황어장터가 있다 보니 풍요롭고 여유로운 동네였다고 한다.

  동네에 있는 계양초등학교는 1932년에 개교한 학교인데, 이주민이 많이 생기는 통에 올 들어 처음으로 1학년이 다섯 반까지 늘어났다.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 수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웃음) 옛부터 인구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네에 오래 사셨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웃들이 3대에 걸쳐 동창일 정도로 토착민들이 많이 살고 계신다.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은 어떤 모임인가요?

카페 회원이 1700여명이나 되는 걸 보니 상당히 활발한 것 같습니다.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은 처음에 장기동으로 이사 온 입주민들이 정보교환 차 만든 온라인 카페다. 회원은 많지만 이용하는 사람들만 이용한다.(웃음) 우리 삶인 오프라인에서도 구체적인 활동을 만들려는 구상을 할 때, 이미 온라인에서 훌륭하게 주민간 소통,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아까웠다. 그러다 보니 주민 모임을 만들 때도 이름을 동일하게 가져가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어떻게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개인적으로는 시댁과 살림을 합치게 되면서 이사 갈 곳을 찾고 있었다. 대상지를 한참 알아보다가 20번째에 장기동을 알게 되었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이주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와 경로당이 5분 거리에 있고, 성당이 가까웠던 것이 이주의 기준에 맞기도 했지만, 동네가 아담해서 이웃과의 거리가 가까운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부모님을 모시다 보니 아이들과 살 때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 같다. 가족이 함께 사니까 더 재밌기도 했고. 이사 와서 성당을 다니다 보니 동네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게 되었는데, 관계가 생기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고, 그 안에 있는 갈등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마을이 보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건축 일을 오래 했었는데, 건축은 건물만이 아니라 사람과 땅, 생활 등도 함께 살펴야 하는 일이다. 이런 관심들이 아름아름 모여서 자연스레 마을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올 8월 15일에 열린 '찾아가는 별빛 영화관' 2회 모습. 계양초등학교에서 <소중한 날의 꿈>을 상영했다.
 

 

마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사 온 뒤에 알았는데, 동네 이웃들이 벼농사를 많이 지으시더라. 그런데 이사온 사람들은 여전히 마트에 가서 쌀을 사먹는다. 또 배추같은 경우에 김장철이 되면 일시에 많이 필요하다. 이미 주변에 배추밭이 많음에도 대형 마트에 가서 배추를 사서 쓴다. 이런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지금 동네 안에는 동네에서 오래 거주하신 원주민과, 도시화 되면서 들어온 이주민들이 함께 살고 있다. 원주민들은 “이사온 사람이 동네를 얼마나 알겠어”라는 생각을, 이주민들은 “지금은 좋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터”라고 생각한다. 동네 안에 너무 좋은 자원들이 많은데도 이렇게 사는 건 너무 별로지 않나?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내가 살던 곳을 추억하지도 못할 동네'로 남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장기동 내의 농산물이 소규모로 자연스럽게 유통되다 보면, 서로 다른 생활형태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이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웃음) 그러다 보면 동네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로컬푸드 시장을 정착시킬 수도 있고. 

'로컬푸드'와 '친환경 행사'를 통해서 도농이 공존하는 마을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금은 서로 관계를 만들고 있는 단계이다.

 

  그 일환에서 작년부터 봄·가을 정기 벼룩시장을 시작했다. 남녀노소 나와서 자기 물건을 판매한다. 전혀 관심 없던 원주민들도 아이들이 왁자지껄 놀고 있으니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었다. 3회째에는 장소가 비좁아서 못할 정도였다. 300여명의 마을주민이 참여하셨는데, 소박하지만 마을문화로 정착해 가는 중인 듯해서 뿌듯하다.

  근데 이게 굉장히 웃기다. 아이들은 백원에 물건을 사와서 자기가 천원에 팔기도 하고,(웃음) 예술하는 분들이 오셔서 체험행사를 하기도 한다. 우리 마을의 시설을 하나씩 소개하는 코너를 운영하기도 한다. 한번은 우리 동네 빵집들을 소개했다. 동네에 빵집이 몇 개 있는데도 서로 잘 모르는 것이 아쉬워 기획했다. 사전에 사장님들께 가게를 대표할만한 빵을 천원에 100개씩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드려서 벼룩시장 때 판매했다. 가게는 홍보의 계기가 되니 선뜻 참여해 주셨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인기였다. 그렇게 하루를 동네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밖에 김포 쪽에 버섯 농장이 있어서 그날 재배한 버섯을 그날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동네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쉬웠다. 이후 공동구매 형태로 버섯 농장과 연결해서 신선한 작물을 공급받았다. 판매자는 홍보의 계기가 되니 적극 협조하고, 구입한 엄마들도 좋아했다. 다음은 태권도장과 함께 연계해서 행사를 해 볼 생각이다. 하려고 했던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시작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함께하는 사람들도 재미있어 한다.

 

▲'별빛 영화관' 상영 사진

  황어장터 기념관 광장에서 연<별빛영화관> 행사도 같은 취지다. 주민들이 자주 만나길 바랐다. 도심과 먼 장기동의 지리적 특성 탓에 문화생활이 힘든 점을 고려하기도 했고, 나중에 아이들이 “내가 살던 곳에서는 여름날 밤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별빛 아래 영화를 봤다”며 살던 곳을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마 난관이 많았으면 안했을 텐데 남편도 선뜻 해보자고 힘을 실어주고, 아이들은 포스터를 만들고 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시작했다.

  마침 인천영상위원회에서 무료로 문화소외지역에 ‘찾아가는 시네마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더라. 작년에 인연이 닿아서 올해 2회째 시행했다. 여름밤에 남녀노소 모여 가족영화를 보며 따듯한 마음을 느끼고 돌아간다. 이런 것들이 기반이 되어서 하나씩 콘텐츠를 늘려 가다 보면 마을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지 돈을 많이 들일 필요 없이,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일들을 하나씩 늘려가고 싶다.

 

▲황어장터라는 명칭은 옛날 이 일대에서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황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된 데서 유래되었으며, 조선시대부터 잡화와 곡물뿐 아니라 소를 거래하는 우시장(牛市場)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24일 600여 명의 주민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다가 이은선이 일본순사의 칼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40여 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심혁성·이담·임성춘·최성옥·전원순 등이 옥고를 치렀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 지역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인천 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2005년 5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출처 : 황어장터 3·1만세운동기념관 [黃魚場- 三一萬歲運動記念館] (두산백과)

 

 

장기동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역사적인 자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황어장터라는 풍요로운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황어장터 기념관>과 <부속 광장>이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적 역사성이 있는 곳인데, 마을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동네에 매우 상징적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소 현대인의 삶과 괴리된 느낌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서 별빛영화관 등의 문화행사와 연계해서 연결고리를 만들려 한 것이다. 계속 황어장터에서 행사를 고집하는 이유다.

  구지 유럽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나. 그런데 시대가 지날 때마다 역사적 흔적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나중에 과거를 회상할 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마 “나는 누구지?” 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옛 일을 떠올릴 때 기억할 만한 것들이 많으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겠나. 황어장터의 경우 너무 좋은 역사적인 자료일 수 있는데 개발논리 때문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이는 걸로 남아 있어야 기억한다. 그래서 개발 때문에 역사가 묻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아있는 시설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황어장터 3.1 만세운동기념관 전시실과 초입에 있는 나무

 

동네 일을 하면서 인상깊었던 일이 있었다면.

  작년 별빛영화관이 끝나고 동네에서 오래 사신 할머니들이 오셔서 “수고했어” 하고 한마디 해 주시면서 “내년에는 뭐 봐?” 하고 물어보셨다. 그 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큰 돈 들여서 거창한 행사를 치러서 얻는 성취감도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동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앞으로 미래사회는 우리가 낡았다고, 올드하다고 버렸던 것들에 의해서 세워질 지도 모른다고. 건축에서는 건물을 짓는 것 뿐 아니라, 건축 이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콘크리트가 쓰레기가 되었을 때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건물을 계속 새로 짓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식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개발은 더 많은 콘크리트를 양성하려는 계획인데, 이게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재고해 봐야 한다.

 

힘들었던 적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구청과 일하면서 유연하지 않은 느낌 때문에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요즘 서울에서는 그늘진 곳, 사람들이 잘 살피지 않는 곳부터 돌보곤 하는 것 같다. 시정이 마을 일에 어울리게 진행되는 것 같다. 인천도 주민과 관이 서로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되는데, 주민이 무언가를 제안하러 관에 갔을 때면 제안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해보자고 계속 제안하는 중이다.(웃음)

 

 

▲ 3.1 만세운동 이은선 지사 순국 추모비

 

행복한 장기동 사람들

http://cafe.naver.com/janggidongpeople

 

 

글 : 이광민 (사업지원팀)

사진 : 김여현, 이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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