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노동,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 주민자치 인문대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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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 인문대학 3강

 마을과 노동,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마을과 사회적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김성훈ㅣ민들레의료생협 부이사장


  오늘 이야기는 레츠라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마을의 문제, 노동의 문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이야기하려 한다. 덧붙여서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2)사회적경제 조직이라고 하는 자활기업,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을 포함해서 마을만들기, 마을살리기 , 마을살이 등에 대한 고민들을 같이 나누면 좋겠다. 어떻게 마을과 노동의 문제를 레츠로 푸는가를 먼저 말씀드리겠다.

  인천에도 지역통화 시스템을 사용하는 분들이 계신 줄로 안다. LETS를 영문 이니셜로 풀면 ‘Local Exchange Trade System’이 된다. exchange 대신에 employment 라고 쓰기도 한다. 직역을 하면 ‘지역 교환 거래 체계’, ‘지역 고용 거래체계’라고 불리는 시스템이다. 교환에 초점을 두면 화폐적 성격을 다루는 지역통화운동 이야기가 되지만, 사실 교환의 본질적 요소는 ‘고용’에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마을에서 고용하는 문제, 지역사회 고용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지역(로컬)은 글로벌과 대립되는 개념도 있지만, 커뮤니티의 개념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시대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사회의 위기, 두 번째로는 생명의 위기다. 사회의 위기는 각종 양극화, 차별, 배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사회를 통해서 생존해 나가는데, 인간의 공동생활집단인 사회가 양극화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형태가 심해져서 공동생활 집단 자체가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생명의 위기라고 함은 기후변화, 에너지, 식량의 위기 등을 들 수 있다.


1) 순환하며 지속가능하지 않는 것. ‘돈’

  자연생태계에서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존재의 모습을 ‘생명성’이라고 한다면, 생명성에는 <관계성>, <다양성>, <순환성>, <영성>이 있다. 그중에서도 순환성을 이야기하자면, 한 개체생명은 자연생태계 안에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고 순환되는 과정을 겪는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순환’이라고 하는 측면이 잘 일어나야지만 (순환하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살게 된다. 이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성장(팽창)하는 것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2) 돈과 암세포의 공통점

  원래 돈의 논리는 “상품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벌어서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돈을 투자해서 상품을 만들어 더 많은 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품이란 것 자체는 인간의 복리증진을 위해 필요한 것일 수 있는데, 돈의 논리가 적용되면서 상품 생산의 이유가 우리 마을, 지역사회 사람들의 필요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는 대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고려해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 기업활동이고, 기업의 논리다. 그래서 사실 모든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다. 필요한 것을 생산해 주는데 특별히 사회적 목적이 따로 필요한가? 그런데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이윤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돈의 특징은 <이자에 기반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독일 경제학자 마그릿 케네디는 “예수가 태어날 시점에 1$를 복리이자시스템에 기반해 저축을 하면 1990년 정도에는 지구 체적의 몇 십 배 정도의 돈이 쌓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생태계 안에서도 순환이 아닌 오로지 팽창(성장)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는 숙주 속에서 자라서 숙주를 쓰러뜨릴 때까지 성장하고, 숙주와 함께 죽는다. 상생, 조화 없는 팽창의 결과는 공멸이다. 기본적으로 지속 불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는 시스템상의 문제는 사람 사이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문제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1) 임금노동사회의 출현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사회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전(수십 만 년 동안)의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이 출현한 것이다. 사회의 사전적 정의가 ‘인간의 공동생활 집단’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크게 달라졌을까?

  이전까지는 신분제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삶을 살았으나, 산업사회 이후 ‘개인’들이 출현했다. 자신들이 농사짓던 농토나 생활기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도시로 던져(쫒겨)졌다.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임금노동사회>가 인류에게 처음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요즘 이야기하는 사회적경제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2) 허구적 상품의 등장

  상품은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상품이 아닌데 상품이라고 여기는 상품이 있다. 칼 폴라니는 이를 ‘허구적 상품’이라고 표현했다. 즉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판매를 목적으로 탄생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허구적 상품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바로 사람, 자연, 돈이다.

  부모님이 자식을 낳은 것이 시장에 팔기 위해서일까? 만일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이유가 시장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 순환과정의 결과가 시장이 아니다. 우리 근처에 있는 산, 들, 땅은 수십억년 전부터 있었을진데, 언제부터 누구의 소유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또 돈(화폐)은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거지 그 자체가 상품은 아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들이 <사람>을 <임금>으로, <자연>을 <지대>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돈>으로 치환시켰다. 이 셋이 상품이 아닌데 시장에 구겨 넣여진 결과, 사회가 몸살을 앓게 되었다.


“상품이 아닌 것이 제 자리를 찾게 하자”

   그래서 상품이 아닌 것이 다시 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안을 찾는 방향이 관계성, 다양성, 순환성을 고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돈의 논리가 아닌, 사람들이 협동하던 방식으로 어떻게 살았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품앗이, 두레, 계, 향약 등이 있다. 이게 농촌이라는 농업생산형태에 기반해서 협동해 살아가던 방식이다. <품앗이>는 지역통화에, <두레>는 협동조합에 가까울 것이다. <계>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association(협회, 단체)이다. 즉 사람들이 서로 상호보존하기 위해 모인 틀로, 구지 이야기하자면 공제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향약>은 도덕, 윤리와 같은 것으로, 마을 공동체 내의 자율적 도덕과 윤리 강령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마을을 마을답게 만드는가? 당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농업생산 방식 자체가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물질적, 생활조직을 하는데 훨씬 수월하게 만든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게 곧 마을의 성립조건이다. 즉 마을은 1)같이 함께 협동해서 먹고 사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더해서 2)’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양인들은 이를 ‘운명공동체 의식’이라고 표현한다. 그게 사회적 경제의 기본 세계관이다. 이 둘을 복원해야 한다.

  개인주의 세계관은 “우리가 저녁 식탁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의 자비심 덕택이 아니라 이기심 덕택”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250년을 이 룰에 의해 이끌어 왔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하는 경제인의 사고방식. 그렇게 사고하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경제인의 인간상은 “자기 이기적 이익과 쾌락을 위해 교역하는 인간”이다. 이로 인해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과연 어떤 것들이 사라졌을까?

‘돈의 공동체’아닌 ‘사랑, 우애, 정’의 공동체로 변화하기


1) 共有 와 公有의 공동체

  우리가 마을이라고 하는 것은 잘 느껴지지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마을이 뭔지 말하기가 어렵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마을을 이야기하기 힘든 것이다. 마을이 성립하기 위한 두 가지 틀은 ‘共有’와 ‘公有’ 가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은 물리적 측면에서의 마을만 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면 실제로 거기 산다는 측면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 측면에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 共과 公은 똑같이 ‘공’이라고 발음하지만 각각 함께의 의미/공공의 의미를 지녔고, 둘 다 ‘나-너를 떠난 우리의 감각’을 말한다.

  ‘나’와 ‘너’는 실체가 있어서 보여지는 것인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하지 않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린왕자라는 동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감각을 갖지 않으려 한다.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가 무엇이며 뭐가 흐르고 있는가? 뭐가 흐르도록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에너지 차원에서 서로 교류하고 있는가?


2) 시장과 정부에 의해서 변화된 공동체의 성격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사라지면 인간은 끝이다. 공동체의 성격이 ‘사랑과 우애와 정의 공동체’에서 ‘돈의 공동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건을 바라보면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수고와 감사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내가 돈을 벌어서 샀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을 잃게 된 것이다. 이것을 무너뜨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장이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 경쟁하는 관점이 생기니 서로를 대립적 관계로 보게 된 것이다. ‘함께함’이라는 느낌보다 개별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보는 것을 합리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영역을 잃었다. 두 번째는 정부다. 사적인 것 외의 공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다 정부 소유가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시장이 생기며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 상황 속에서 당시 노동자들은 평균수명 30세 이하라는 처참한 삶을 살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장의 실패다. 시장은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스스로 실패를 증명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정부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이로 인해 전체주의, 국가사회주의, 복지국가 모델이 나왔다. 하지만 관료제의 비효율성, 정보의 비대칭성 등의 문제로 인해 역시 실패했다. 자본가를 대신해 관료가 자본가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제3의 길을 찾는 시점에 다시 시장에게 전권을 맡겼는데, 시장의 원리가 자유주의 경제학이니까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3) 세계관 변화의 필요성

  그렇다면 대안의 길에서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시장과 정부가 아니면 다른 누가 될 것인가? 지금 우리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누구를 주체를 삼을 것인가? 또 그 주체가 일하는 방향이 共有와 公有의 방향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또 우리 의식을 만들어가는 활동이 정말 그렇게 가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기능이나 방법보다 생각하는 방식, 즉 세계관이 달라지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사고방식이 근대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개인이 등장했을 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의식이 생겼다는 점에서 의식의 발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워진 개인이 너(타인)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립하지 못했다.

  ‘나’ 까지만 하고 시장경제, 산업혁명의 속도로 빨려 들어간 결과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논리가 등장했다. 산업혁명으로 먼저 나라를 발전시킨 곳이 ‘내 자유의 확장’을 위해 제3세계를 이용하고 식민지화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 나라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런 나라들의 삶의 방식들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밑바탕에 있는 윤리, 도덕 관점에서 보면 이는 악마적 세계관이라 볼 수 있다. 내 자유의 확장을 위해서 너를 이용하고 노예로 부리는 사람이 훌륭하고, 당하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세계관이 우리에게 생긴 것이다.


“내가 너를 만나 우리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내가 되지 못한다.”


1) ‘나’는 ‘너’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사람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물질문명이 아닌 정신문명의 측면에서는 큰 후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차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생명성을 발현하는, 나답게 살고자 하는 자유로운 존재다. 누구에게도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내가 있는 것만큼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신분적으로 자유로워진 내가 나 홀로 주체였을 때는 내 자유가 제약되기 때문에, 너를 만나 서로 주체로서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관계로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의 서로주체성의 철학의 내용이다.)


2) 기계적 사고 ->유기체적 사고 -> 공동체성의 사고로

   한 가지 더 근대 이야기를 하면 공장제 기계 대공업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기계이다. 기계를 보면서 우리 세계관이 기계를 닮게 되었다. 기계가 고장나면 문제가 있는 부품만 교체하면 정상 작동이 된다. 작동되는 것이 중요하니 얼마든지 교체해도 무방하다. 이 관점이 사람도 기계처럼 다루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기체를 보면 상처가 났을 때 자기치유와 자기복원을 한다. 기계와 유기체의 가장 큰 차이점인 것이다. 원래 자연생태계에서 살아왔던 <공동체적>, <자연적 세계관>이 <기계적 세계관>으로 인해 인간 생활 집단도 유기체로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잃어버리고서 사람을 도구화하고 대상화하게 되었다.

  다만 유기체적 세계관에만 머물러 있어도 곤란하다. 개미와 꿀벌 집단도 유기체적으로 산다.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즉 의식의 세계관으로, 홀로주체가 아닌 공동체적 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철학자 김상봉은 “내가 너를 만나 우리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내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만 강조하면 개인주의 폐해가 등장하고, 우리를 강조하면 전체주의 폐해가 등장함을 앞에서 설명했다. 인류는 250년 동안 이 정신분열 속에서 답을 못 찾고 있다. 한편에서 제도로서는 시장이냐 정부냐로 난항을 겪고 있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그리고 서로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키기 위해 협동하는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계관의 중요한 방향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지, 너와 그렇게 만나고 있는지, 그런 우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너를 형성하고 네가 나를 형성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이는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우리가 ‘나’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내 안에는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친구가 (담겨)있다. 내 의식 자체는 타고난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의식이기 때문이다. 


3) 다시 ‘짚신을 신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근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문제를 현대에 맞추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 갈 건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라다크라던가 SBS 다큐 최후의 제국을 보면 원시공동체/섬마을에 고립된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교한 내용이 나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누타 섬이나 라다크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고,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 전부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단순히 회귀하자는 것은 낭만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까지 처절하게 경험한 이후의 인류가 만들어갈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인간이 인간답게 살며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켜서 살아갈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이냐는 과제가 남은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압축성장이 진행된 한반도에서 만들어 나갈 새로운 문명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간중간 공황으로, 금융위기로 실패를 드러낸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 유럽사회는 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지속가능한 삶,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흐름을 취재하던 중 한밭레츠를 10분간 다뤘다.


<한밭레츠 소개>

1) 설립배경
  97년 IMF사태를 계기로 한국에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당시 신빈곤의 문제, 만성적 실업의 문제가 등장하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IMF 질서를 받아들이고 외자개방 등을 시작한 것이다. 완전 고용이 이루어지는 시스템 안에서 “기업에 고용되기만 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2) 지역에서 고용하는 방식, 어떻게 답을 내릴 것인가?
  사람들은 돈(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이 없으면 먹고살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꼭 중앙은행의 돈이어야만 할까? 마을 돈을 만들어 쓰면 안 될까?를 묻게 되었다. 즉 마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고용해주는 ‘마을고용 시스템’들을 만들어 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돈의 논리/시장의 논리에서 공동체적 관계의 원리로 점차 바꿔 나가고, 서로의 삶의 모습을 보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자는 취지에서 한밭레츠가 시작되었다.(1999)

  모델은 간단하다. 주변에 목공소를 차린 목수가 계신다. 돈 없을 때 힘든 게 뭔지 물었더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미루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의사에게 가서 똑같이 물어보니 “좋은 농산물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농부에게 물어보면 “창고를 지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미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 때 세 사람이 서로에게 필요한 품을 제공하고 지역화폐 ‘두루’를 받는다.
  시장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사라지면 목수는 목수로서의 기능을 못 한다는 것이다. 돈이 있든 없든 목수/의사/농부인 것은 그대로인데 돈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돈을 지우고 관계의 복원을 통해 우리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한밭레츠의 출발
  레츠는 1983년 캐나다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꼭 우리가 옛날에 하던 품앗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과거에는 1:1 노동력 교환 품앗이였지만, 분업사회 안에서는 동일한 노동으로 바꿀 수 없다. 따라서 화폐라는 매개체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도움을 준 사람에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받아도 되는 ‘다자간 품앗이’, ‘지역 품앗이’ 형태를 띄게 되었다.
  한밭레츠는 99년도부터 준비해서 2000년 2월에 창립, 70명 정도의 회원과 함께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70명의 회원을 일일이 조사해서 생활정보지같은 형태의 거래목록을 만들어 공유를 했다. 한밭레츠 이후 서울/경기 지역의 이름난 단체들 스무 곳에서도 레츠를 시도했는데, 1년 정도 안에  전부 망했다. 시스템이 가진 사회적 효용성․필요성 등이 큰데도 실제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뭘까? 레츠가 안 되는 이유와 97, 98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만들어진 뒤 <조건부 자활근로 자활기업>이 안 되는 이유, 2006년 사회적 기업 육성법 만들어지고 생긴 <사회적 기업>이 안 되는 이유, 2010년 안전행정부 발 <마을기업>이 만들어지고 안 되는 이유가 모두 똑같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오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한밭레츠가 성공사례라고 볼 순 없어도, 망하지 않은 사례이기에 말할 수 있다. 과연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4) 공동체 없이 시스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망했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애초에 ‘거래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츠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1)자본주의 화폐경제를 해결하겠다는 대안경제운동, 2)개인주의로 인해 마을이나 지역사회가 해체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지역공동체 복원운동이라는 점이었는데,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마을공동체가 미리 있지 않으니 거래가 되지 않았다. 시스템 자체가 거래를 발생시키지 않으며 시스템으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관계가 그렇다. ‘공유의 의식’같은 의식이 우리 안에 있고, 관계망이 있어야 하는데 대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 안 되는 것이다. 마을이 없는데 <마을기업>이 성공할 수 있을까? 사회를 먼저 재구성하지 않았는데 <사회적 기업>이 성공할 수 있을까? (대부분 ‘사회’는 사라지고 ‘기업’만 남는다.) 그래서 공동체를 만드는 문제가 중요하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레츠를 제안하면 “필요한 게 없으니 거래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상징적인 지점이다. 70명 사이에도 주고받을 것이 많은데도 그렇다. 개인 간 거래가 어려우니 상시적으로 거래할 곳이 필요하겠다 싶어 가맹점 전략을 취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용실에 레츠를 제안하면 “세탁소, 식당이 하면 하겠다.”고 하신다. 세탁소, 식당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경제인다운 합리적인 생각이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합리적 경제활동은 이어한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자활기업,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이 안 될 수밖에 없다.


5) 품앗이 만찬, 품앗이 학교, 품앗이 놀이
  서로 돕고 협동하고 나누는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유지했는지 고민하며 세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대단한 실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마을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권장하고 싶다.
  사람들은 누구나 공동체를 경험하는데, 다른 게 아닌 가족에서 경험한다. 사회적 경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가정이다. 가정이야말로 무상교육, 무상급식이 일어나는 곳이지 않나. 인간의 가치와 사랑의 가치, 우애의 가치, 돌봄의 가치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장경제가 강해도 우리는 사랑을 배우며 그 마음속에서 자란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자본주의적이지만은 않다. 비자본, 반자본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게 가능성이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건 없이 주는 행위 안에는 시장 논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혈연 아니면 친한 관계에서 가능하다. 어떻게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품앗이 만찬>
  원시 공동체를 보면 모닥불에 둥그렇게 모여 밥을 먹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동생산/수렵/분배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단지 사람 맘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해야지만 개별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꽤 오랫동안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엄마까지 전체 틀 안에서 보호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이게 공동체의 기본이다. 자본주의 250년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만큼 수만 년 간 인류의 DNA 속에 새겨온 더 강력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함께 먹어야 한다. <품앗이 만찬>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포트락 파티’를 차용해 만들었다. 각자 먹을 음식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만들어 와서 나누어 먹는 것이다. 음식을 가져다 놓으면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한다. 그때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식사 후에 모르는 사람끼리 짝을 지어 10분~15분간 이야기 나누도록 한 다음, 전체가 모여 자기가 만난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 소개할 때 “이분은 품앗이에서 무엇을 제공할 것이고 무엇이 필요하다”고 알린다. 생활정보지로 이미 다 보여주었으나, 실제로 사람과 면대면 접촉을 한 뒤에는 분명 달라진다.

  삶의 욕구 차원에서 기본적인 필요 이후에는 문화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식사와 소개가 끝나면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선물 1가지 이상씩 가져오도록 주문했다. 음식을 할 때도, 선물을 고를 때도 받을 사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연히 정성을 들이게 된다. <대안경제>라는 말 앞에는 붙는 수식어 중 ‘선물의 경제’, ‘증여의 경제’라는 말이 있다. 거래가 아닌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출산준비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가져온 유모차를 두루로 구입했다. 마트에서 유모차를 샀다면 별 느낌이 없었을 테지만, 아이를 태우고 다닐 때마다 그 가족과 그 집 아이가 생각난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생긴 것이다. (사랑 우애 정 등)이렇게 관계가 맺어진 것이 700가구 정도 된다.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쿨라’ 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원시 부족에서는 주고받는 물건 사이에 영혼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 영혼의 이름이 쿨라다. 이게 미신인가? 아니라고 본다. 유모차를 끌고 다닐 때 살아 있는 관계성 속에서 느꼈던 것. 이게 영적인 것이다.


<품앗이 학교>
 사람들에겐 각자 잘하는 것이 한가지씩은 다 있다. 뜨개질, 외국어, 컴맹탈출, 요가, 다도 등등. 또한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한 자기 성장욕구, 배움의 욕구가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이다. 품앗이 학교는 잘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 강사가 되어 클래스를 만들어 함께 진행하는 소모임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과외하듯 관계를 가지면 불편하고 비용도 잘 안 나와서 이런 형태가 되었다. 모든 것이 돈을 내고 하는 방식인데, 이건 관계로 푸는 것이다. 기능을 배우는 측면도 있지만 서로 생활을 나누게 되고, 레츠 거래도 늘어나게 된다.


<품앗이 놀이>
  레츠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레츠는 꼭 사무실이나 실무자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계모임처럼 하면 된다. 2시간의 워크숍을 거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설계한 프로그램이다.
  먼저 본인이 살면서 ‘필요로 하는 것 다섯 가지’를 쓰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에 필요한 다섯 가지를 잘 꼽지 못한다. 아마 구성원을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아반지는 쓸 수 없으니까.(웃음) 한편으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목록화 해놓고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 곳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까 첨부터 끝까지 돈 생각만 하고 사는 것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려놓는 게 핵심이다. 돈을 지우고 내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면 반드시 ‘사람’과 ‘생활’이 떠오른다. 이걸 누가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구체적인 내 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물신화된 삶을 산다는 건 상당히 무서운 것이다. 즉 돈이라는 신을 숭배하고 사는 것인데, 사람의 의식체계가 내 생활과 사람관계에 중심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전도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걸 다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만일 누가 거래목록에 “중2 수학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쓴다면, 공동체 놀이를 통해 그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는 복합 정보를 알게 된다. ‘교육에 관심이 있다’라던가, ‘말투를 보니 어디 사람이구나’ 등등. 그렇게 사람을 알고 만나게 된다. 발표가 끝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목록을 적는다. 남에게 줄 것을 먼저 적게 되면 뭔가 시장에 내다 팔 특출한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못 쓴다. 그런데 필요한 걸 먼저 쓰면 “아! 필요한 게 그거야? 그 정도면 내가 할 수 있어”하고 다가가게 된다.
  일례로 젊은 시절부터 폐병을 앓아서 빨리 걷지 못하는 어르신이 있었는데, 그분이 한밭레츠에서 하신 일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을 동사무소까지 데려다 주고 산책하는 일이었다. 내가 앞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는 자체로 내가 갓난아이와 치매 어르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 것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10~15명이서 워크숍을 하면 많으면 30%정도의 필요가 해결하게 된다. 얼굴도 봤고, 관계도 생겨서 당장 거래할 수 있다. 계정관리를 할 사람만 정해지면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6) 노동의 본질은 창조성에 있다.
  삶에서 필요한 것들은 계속 바뀐다. 필요로 하는 것들은 공동체의 누군가를 통해서 채워진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본질은 노동자이고, 노동이 인간의 본질인 이유는 먹고사는 것이 아닌 ‘창조성’에 그 핵심이 있다. 지금 노동이 불행한 이유는 어떤 노동은 때론 하면 할수록 인류에게 해악이나, 월급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몰리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 작업, 행위를 각각 구분했다. 1)이 노동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서로의 필요와 니즈를 책임져 주는가?(다른 사람에게 유용한가) 2)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을 느끼며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나의 생명성, 고유성, 의식성이 담기는가) 3)노동행위가 누군가에 의한 타율적 지배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노동인가?(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자기실현을 하는 노동) 이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의 전제로 마을이라는 삶터/일터 속에서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켜 줄 수 있는 관계망이 있어야 한다. 가진 재능을 나누며 서로 배우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각자의 필요를 확인하고 서로의 아픔들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들자.


7) 마을공동체 형성의 황금률
  ‘과천 품앗이’가 한밭레츠와 함께 유일하게 망하지 않은 곳이다. 비결은 월례회의에 있다. 매달 회의를 한 것만 가지고도 망하지 않았다. 각자 생활의 필요가 항상 바뀌기 때문에 매번 확인하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꾸준함이 중요하다.
  마을공동체 형성의 황금률을 말씀드리겠다. 공자님은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 하셨다.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했다. 같은 이야기다.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등에 틀림없이 적용되는 황금률은 “나부터 베풀어라.”다. 처음 레츠 가맹점을 제안했을 때 “다른 가게가 하면 나도 하겠다”의 방식으로는 연대와 협동이 되지 않는다. 남들은 그러든지 말든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밭레츠 회원 중에서도 초창기에 가입한 한의사, 카센타, 편집, 인쇄 종사자 등 몇몇 분은 내가 아무리 두루가 많이 쌓여도, 전부 쓰기보단 내가 먼저 해야 시스템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만약 망하더라도 선의를 가지고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공동체는 이런 것들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다른 사람도 베푸는 사람이 되게끔 누군가는 에너지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묻고 싶다. 나부터 할 수 있는가? 이게 공동체를 만드는 핵심이다.

8) 질의응답


Q) 아무리 베풀어도 얻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정적으로도 존중이 없다고 느낀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A) 줄 수 있는 만큼만 주시라. 한밭레츠도 쓰기만 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 어떻게 할 것인가?의 논쟁이 많았다. 도덕적 헤이 현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중 하나의 대안으로 -의 제한선을 두었다. 하지만 못 믿어서 생긴 현상을 극복하고자 시작했는데, 우리도 못 믿어서 제도를 만들어서 풀어야 하는 걸까? 믿는 것부터 시작하자 하고 출발한 건데.
  장발장의 유명한 장면인 성당에서 촛대를 훔쳐 나오는 씬에서 경찰이 신부에게 은촛대의 출처를 묻자 신부는 “내가 준 것”이라고 말한다. 신부의 사고방식이 사회적경제의 사고방식이다. 이세상의 그 무엇도 누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건데 내 걸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것은 아닐까? 단 둘의 관계에서라면 뺏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겠지만, 선의를 가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한사람에 에너지를 쓰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절대 어둠을 가지고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불을 켜는 수밖에 없다. 인정해야 한다. 당신을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백하고 몰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사람이 없다. 이러고 나서도 심각하다면 그런 것의 상당부분은 심리치료의 영역이 필요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Q) 마을 일은 누가 주도적으로 하나?

A) 누군가 한사람, 최소한 한사람은 자각하는 조직가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올인해서 주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 속에서 지도력을 찾아서 그 지도력이 주민을 변화시켜나가도록 촉진하는 사람이 조직가다. 사람들의 필요를 관찰하고, 그들이 만나도록 돕고 연결시켜주며 서로의 삶의 필요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다리를 놓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형식으로는 레츠 거래로 드러나지만, 다른 이의 삶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일정부분 훈련이 되어야 한다. 프로그램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판만 짜는 게 조직가가 아니라 그 삶을 살겠노라 약속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선의에서 생겨나는 구심력이 또 다른 선의를 만들 수 있다.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 가지고 있는 수백만의 두루 이상의 힘을 갖게 된다. 그동안의 관계 속에서 보여줬던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는 사람이 된다. 이것을 만들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간에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 생겨도 이 힘이 튼튼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회개와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웃음) 어쨌거나 처음 시작은 세계관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너무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Q) 조직가는 언제 보람을 느끼나?
A) 소설가 이외수는 <청춘불패>라는 책에서 ‘나쁜놈 은 ‘나 뿐인 놈’이라고 풀이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문제이고 과정 속에서 풀릴 일이지, 나 혼자 율도국을 차려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의를 주고받을 때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과 보람이 있다.
  온갖 종류의 사람 만나지만, 마을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귀인이 그냥 나타나나? 여러 사람이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자기 것을 흔쾌히 내놓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의 속기/사진 : 이광민(사업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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