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마을을 꿈꾸다 -강영희 사진작가 [시사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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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마을을 꿈꾸다[문화&사람] 강영희 사진작가

김영숙 기자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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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승인 2015.01.08  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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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지막 날, 배다리에 있는 마을사진관 ‘다행’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장은 젊은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뱅쇼(=와인에 게피를 넣어 끓인, 감기에 효능이 있다는 프랑스 차)를 한 잔 권했다. 젊은 손님들은 주인장인 강영희(45ㆍ사진) 사진작가의 제자들이었다. 세밑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자 찾아온 것이다.

부평구 부개동에서 태어나 지금은 부평5동에 산다는 강씨와 배다리의 인연이 궁금했다.

“1997년도에 인천인권영화제 사무실을 동구 송림동으로 옮겼어요. 그때 동구로 들어와 마을활동을 같이 했죠. 당시 송림동 빈민지역에서 철거 반대 활동을 하다가 2007년 배다리에 들어와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사진작가와 영화제, 그리고 마을활동. 세 단어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강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감수성 많은 소녀, 예술을 만나다

   
▲ 강영희 사진작가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조용히 책만 읽는 아이였어요. 성격이 예민해서 다른 친구들과 노는 게 피곤하고 힘들었죠. 부평구 부평2동에 있는 부일여중에 입학했는데, 학교가 약산이라 불린 산 아래에 있었어요. 봄 소풍을 그곳으로 갔는데, 거기에 핀 꽃들이 좋았어요. 그때 꽃을 관찰하고 일기를 많이 썼죠”

강씨는 고등학생 때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이 전혀 없다. 대신 집 근처에서 학생증을 맡기고 빌렸던 카메라와 그 사진관의 현관문이 정지된 화면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전공인 전산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면 꼭 하고 싶었던 전국 하이킹 일주와 성격 활달하게 바꾸기, 외국 배낭여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7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에서 자유로움을 한껏 느낀 강씨는 돌아오자마자 부평4동 성당에서 열린 1회 인권영화제를 만났다. 1996년 11월이었다.

“대학 축제 때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1991. 프랑스)’을 상영했는데 정말로 신선했어요. 우리나라와 미국의 ‘빤한’ 영화와는 달랐죠. 그때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져 <씨네21>을 정기 구독했는데 거기서 인권영화제를 소개한 기사를 봤어요”

인권,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다

‘특히 공짜라는 게 좋았다’는 그는 인권영화제가 열린 5일간 꼬박 극장에서 지냈다. 해고자ㆍ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화두로 한 다양한 영화를 만났다.

“한마디로 쇼크였죠.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어요. 그전까지는 나름 양심껏 살면서 정의를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며 부당하고 잘못된 것에 분노하는 제 모습이 당혹스러웠어요”

강씨는 모든 영화를 보고난 후 편지를 써서 영화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에 보냈다. 그 후 먼저 활동하던 선배의 꼬임에 빠져 ‘영화마을’이라는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2회 인천인권영화제 때부터는 조직위 사무국에서 활동했다. 그 이후 서울에 있는 영화아카데미 학원에 다녔고 한겨레 영화연출학교 등을 수료하며 영화에 관한 안목을 키웠다.

강씨는 이를 바탕으로 인천지역에서 인권을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영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적은 보수에도 흔쾌히 열정을 쏟아 작품을 만들었지만, 정작 강씨의 비싼 카메라나 편집장비가 고장 났을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또한 작업을 의뢰했던 단체들이 후원으로 돈이 생겼을 때는 다른 프로덕션에 의뢰하는 모습을 보며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중요한 경험을 했죠. 사회운동을 한다는 이들의 한계를 봤어요. 입장과 태도가 일치해야한다고 말하지만 배려를 모르는 사람들한테 전망이 보이지 않았죠”

비싼 장비를 구입할 능력이 없어, 영화보다는 대학시절의 사진동아리 활동을 바탕으로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래도 인권영화제 활동은 계속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생활과 일치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찾아서

   
▲ 강영희씨의 작품 ‘코스모스 들판이 된 산업도로.

“영화를 계속 튼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권영화제로 우리 현실을 명확히 본 것 외에는 인권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죠. 주변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백날 해봐도 소용없다고 느꼈어요”

강씨는 2007년 공공미술 활동을 하고 있는 ‘퍼포먼스 반지하’와 함께 ‘아트(art) 인(in) 시티(city)’라는 소외지역 생활환경개선을 위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곳 배다리에 들어왔다.

당시 배다리 지역을 이등분하다시피 하는 산업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투쟁이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 정치와 생활, 문화예술이 적극적으로 만났다. 지역의 원주민들은 그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젊은 예술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2009년, 강씨는 지역의 예술인들과 ‘지역공동체문화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그램명이 ‘다행(多行)하다’였다.

“사람들은 그림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문화예술에 선망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누리면서 살지는 못하죠. 인간이 궁극적으로 예술을 지향한다면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벽화를 그리고 사진, 영상, 글쓰기 등을 진행하고 발표회도 했죠. 여러 사람이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다 보니 기구나 공구들을 보관하거나 작업하는 공간이 필요해, 이 사진관의 전신인 작업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강씨는 그 공간의 이름도 마을공동체 창작공방 ‘다행(多行)하다’로 지었다. 당시, 가수 이적의 ‘다행이다’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연극, 금속공예, 목공예, 뜨개질 등을 하던 예술가 5명이 함께 시작한 ‘다행’은 현재 분화해 각각의 독립공간으로 확장됐고, 강씨만이 마을사진관으로 ‘다행’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네 주변을 찍어라. 그러면 네가 보인다

강씨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한부모나 지역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사진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수업을 인문학이라 강조한다.

“수강생들의 집과 주변, 이웃들을 찍어오라는 과제로 수업을 시작해요. 내 주변을 바로보고 이해하면 그게 나인 거죠. 그걸 찍어 모으면 전시회가 되는 거예요. 기술적 사진수업보다는 인문학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수업을 추구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놓치고 살아가는데, 자신을 살펴야합니다. 제발, 꽃을 찍지 말라고 해요. 꽃 예뻐요. 진달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예뻐요. 하지만 당신들과 상관없죠. 하지만 그 진달래를 사랑하는 연인이 밟고 떠났다면 의미가 있죠. 그것을 삶에서 찾아야합니다. 삶과 생활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그 힘으로 자기 인생과 주변을 볼 수 있는 법을 가르칩니다”

강씨는 렌즈로 세상을 보면 그전에는 안 보였던 다른 세상이 보인다고 했다. 특히 사랑스러운 마음이 풍족할 때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사진에 묻어나온다고 덧붙였다. 연인이나 아기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면 피사체가 새로워 보이는 게, 그 이유란다.

소박하지만 거대한 꿈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특별한 계획 없어요. 돈 욕심도 없고요. 교통비나 핸드폰비만 있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죠. 2014년은 온 국민이 너무 힘든 일을 겪었어요. 모든 정치인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얘기하지만, 모든 게 무너져 국민의 상실감이 크죠. 이제는 평온해졌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사람과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 마을 만들기로 회복하려해요. 내 이웃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쓰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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