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동(新興洞), 그 서글픈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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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新興洞), 그 서글픈 출발

[문화칼럼]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11-08-08 16:41ㅣ 배성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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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 1
 
부도유곽

1883년 1월 단행된 인천의 개항은 한적했던 조선인 어촌마을 제물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거리는 수많은 외국인과 새로운 문물로 넘쳐났으며, 문학동 인천도호부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인천의 중심도 제물포항 일대에 자리 잡은 개항장으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침이 있었고, 인천부청과 시청이 있었던 시절만큼 번영은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항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개항장 언저리로 발길을 조금만 옮기면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개항장이 근대성과 차이나타운이라는 새로운 콘텐츠로 사람들을 끌어들였음에 비해 그 언저리 동네는 여전히 불편하고 낙후된 생활환경을 간직한 ‘구도심’으로 남아 있다.

새롭게 흥하는 동네, 신흥동

개항장 언저리에는 유독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가는 동네가 많다. 신흥동이 그렇고 신생동과 신포동이 또한 그렇다. 1983년 신흥2동과 선화동을 합하여 만들었던 신선동도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식 지명을 우리식으로 고쳐 쓸 때 새롭게 붙여진 이름인데, 모두 새로울 ‘신’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광복을 맞아 암울했던 과거를 떨치고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작명한 이의 뜻이 느껴진다. 신흥동이라는 이름도 새롭게 흥하는 동네가 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리라.

제물포가 한적한 어촌마을이던 시절 신흥동은 인천도호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에 속해 있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사실 이곳을 부르던 특별한 이름도 없어 마을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쓸쓸한 바닷가였는지 지금은 알 도리가 없지만, 번성했던 마을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것은 개항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각국조계에서 바라본 인천공원

조선인 마을로 모여든 일본인

개항 당시 일본은 개항장 중앙의 노른자위에 자신들의 전관조계를 설정했지만,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인천으로 모여든 자국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다. 조계 내에 거주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조선인 마을로 넘어오면서부터 일본인들의 활동영역은 개항장 바깥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의 공간이었던 선창리 바닷가 마을도 점차 일본인들에게 잠식되기 시작하였다. 1890년 일본인들은 신생동 인천여상이 있는 언덕마루에 인천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에 대신궁(大神宮)을 두었다. 이곳은 일본 조계로부터 1km가까이 떨어진 조선인 거리였다. 천황의 시조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섬기는 일본 신사를 조선인 거리 한복판에 두었던 것이다.

기생들이 많아서 화개동(花開洞)이라

사람들이 모여들자 기생을 고용하는 요릿집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대신궁이 있던 인천공원에 수명루(水明樓)와 명월루(明月樓)라는 고급 요정을 개업하였고, 이어서 언덕아래로부터 신흥동 일대까지 요릿집이 줄지어 들어섰다. 모두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요릿집이었으며, 한 집에 보통 7~8명의 기생을 고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딱히 이름이 없던 바닷가 마을이 화개동(花開洞)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화류’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꽃 ‘화(花)’자는 기생을 지칭하는 것이고, 기생들을 고용한 요릿집이 많은 동네를 화개동이라 부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개동이라는 이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인천 이사청이 인천부 감리서를 대신하였고, 일본 조계 바깥 조선인 마을도 일본식 행정지명인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조선식 지명이었던 화개동이 화정(花町)으로 된 것이다.


부도유곽

특별 요릿집 부도유곽(敷島遊廓)

화개동에 모여든 요릿집이 연회가 가능했던 일반 요릿집이었다면, 이른바 유곽이라 불리던 특별 요릿집도 생겨났다. 부산의 녹정유곽(綠町遊廓)이 유명해지자 1902년 인천에서 성업 중이던 17개 일반 요릿집이 각각 800엔씩을 출자하여 기정동(己井洞; 지금의 신흥시장 입구)에 ‘부도루(敷島樓)’라는 특별 요릿집을 개업하였다. 부도루가 호황을 누리면서 아예 행정지명을 부도정(敷島町)이라 하였으며, 구미원(驅黴院)이라는 성병치료소까지 두게 되었다. 1929년에는 부도루 외에 송산루, 일력루 등 모두 9개 점포가 성업 중이었고 창기 수가 7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부산의 유곽에 여관을 뜻하는 ‘관(館)’이 붙었다면, 요릿집에서 기원한 인천의 유곽에는 ‘루(樓)’가 붙어 있는 게 특징이다.

해방 이후 주 고객이 일본인에서 미군과 연합군으로, 행정지명이 부도정에서 선화동으로 바뀌었을 뿐 부도유곽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1961년 5.16쿠테타 이후 집권한 군사정부가 사회정화차원에서 선화동 유곽을 숭의동으로 이전시켰고 유곽이 있던 자리에는 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선화동은 1983년 신흥2동과 합하여 신선동에 속했다가 1998년 신선동이 신흥동과 통합되면서 현재 신흥동에 속해 있다.

개항장이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생활공간으로 조성되었다면 주변의 조선인 마을 신흥동은 일본인들의 유흥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항장 언저리에 있었기에 일본인들의 저급한 도시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신흥동의 서글픈 출발이었다.


*사진은 김식만 치과병원 원장이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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