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동의 약속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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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의 약속은 “현재진행형이다”

[문화칼럼]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11-10-03 20:58ㅣ 배성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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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 1

신흥동(新興洞), 두 번째 이야기 – 요릿집이 떠난 자리에 정미소가…

인천의 최대수출품 쌀

개항 직후 인천의 주 수출품은 대두(大斗), 우피(牛皮), 금 세공품 등이었다. 1890년 일본에 대흉년이 들자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 상인들은 쌀 수출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그 해 조선은 유래 없는 풍작을 이루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헐값에 사들인 쌀을 일본에서는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특히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질이 견고하면서도 쌀알이 치밀하여 일본 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이 지역의 쌀들은 인천항을 통해 수출되기 시작하였고,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쌀은 인천항 최대 수출품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통의 정미(精米) 방법은 땅바닥에 벼를 직접 깔아놓고 타작을 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모래와 흙이 섞이는 경우가 많아 낱알의 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고려정미소 굴뚝. 그 너머에 오쿠다정미소가 있었다.

인천, 정미업을 시작하다

그 무렵 일본 효고(兵庫)현 출신 무역상 신토오 시카노스케(進藤鹿之助)는 인천에서 직접 정미소를 경영하여 정선된 품질의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천정미소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열고 4마력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정미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인천 최초 기계식 정미업이다. 이 정미소에서는 쌀을 백미가 아닌 현미 상태로 도정하여 ‘개량현미’라는 이름으로 수출하였다. 인천정미소는 각국조계지역인 홍예문 아래에 있었는데, 여기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가 인천에 입항하는 승객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끌었다고 한다. 

얼마 뒤 나카사키 출신의 곡물무역상 오쿠다 사다지로(奧田直次郞)가 미국인 무역상 타운센드(W. D. Townsend)와 합작으로 타운센드정미소를 열었다. 인천정미소와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정미소였지만, 타작방식 인천정미소와는 달리 마찰방식을 사용하여 더욱 깨끗한 백미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천의 정미업은 수출판로를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지역으로 확대해가면서 인천 제일의 산업으로 부각되었다.

요릿집 작부와 정미소 여공들

개항 이후 신흥동 일대로 몰려들었던 요릿집 작부들이 새로 생긴 유곽으로 빠져나갔고,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대 요릿집들마저 조금 더 장사가 될만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주변과 개항장으로 하나 둘씩 옮겨갔다. 그렇게 요릿집들이 빠져나간 신흥동 해안가로 정미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10년대 들어 정미업이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처음 정미소가 들어섰던 개항장 안쪽으로는 더 이상 공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인천에서 정미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본 자본들에게 1918년 신축된 항만시설에서 가까운 신흥동 해안가는 공장부지로 제격이었다.

1919년 3월 요시다 히데지로(吉田秀次郞)가 오쿠다(奧田)정미소를 여기에(현재 신흥동 대림아파트 자리) 개업한 이래 가토오(加藤)정미소, 나오노(直野)정미소 등 일본 자본이 설립한 정미소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에 더하여 1936년 수인선 종점인 인천항역이 인근에 설치되면서 신흥동 일대는 인천 정미업계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고, 정미소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들이 주변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정미소의 종업원들은 대개 여성들로 1932년 당시 인천의 16개 정미소 여공은 모두 1,3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정미소 작업이라는 게 도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쌀겨와 티끌을 제거하거나 도정된 쌀을 포장하는 등 섬세함을 요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여성들의 생산력이 우월하였고, 임금도 남성근로자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사업주들은 여성종업원을 선호하였다. 개항 초 일본인들의 유흥을 위해 몸과 웃음을 팔았던 요릿집 작부들처럼 일제강점기 신흥동에 모여든 정미소의 여공들도 헐값에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이는 곧 일본 자본의 재산 증식으로 이어졌다.

눈물과 피를 갉아먹는 ‘정미소’

일본인 정미소에서 근무하는 조선인 여공들은 민족적 차별과 더불어 성적 차별이라는 이중 핍박 속에서 생계를 유지해 가야만 했다. 형편 없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이어지면서 여성노동자들의 불만은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급기야 1924년 가토오정미소에서 두 차례 파업이 시작되었다. ‘임금을 올려야 살겠다. 조선여자라고 하여 대우를 냉대하지 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에 참가한 400여명의 여공들은 자신들을 능욕했던 일본인 감독관의 야만적 횡포와 민족적 차별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두 차례 파업에도 처우개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0년대 언론에서는 ‘노동자들의 눈물과 피를 갉아먹는 정미소’라 하여 정미업자들의 노동력 착취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당시 가토오정미소 여공들의 파업은 일제강점기 인천 지역 노동운동의 효시로 되었다.

새롭게 흥하라 하였건만…

전편에서도 다루었듯이 일제강점기 인천부 화정(花町)이었던 이 곳은 해방이 되면서 신흥동(新興洞)으로 되었다. 근대기 인천 제일의 산업이었던 정미업의 호황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정미공장은 한국인들에게 인수되어 고려·삼화· 협신·대륙정미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면서 잠시나마 새롭게 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시설이 파괴되고, 소규모 정미업을 담당하는 방앗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정미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까지 근근이 유지되던 신흥동 정미소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고, 정미소 건물들은 현대사회의 부산물인 대형마트와 고층 아파트로 대체되었다. 그 틈새에 자동차 도색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고려정미소의 붉은 벽돌건물만 쓸쓸히 남아 당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한때 수인역 사거리에서 인천여상 인근까지 붉은색 정미소들이 즐비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이면 일터였던 정미소로 향했던 노동자들의 출근행렬로 장관을 이뤘을 신흥동 골목은 그 시절 활기는 잊어버린 채 이제는 한적한 동네로 남아버렸다. 어찌 보면 이 역시도 개항장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청 이전 후 침체기에 있던 개항장 일대가 근대건축물과 차이나타운, 문화지구 조성 등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 활기를 되찾아 갈 동안 이 곳 신흥동을 포함한 개항장 언저리는 여전히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동네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새롭게 흥하자던 신흥동의 약속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인천 최대 규모였던 가토오정미소 전경

1929년 인천부 지도에 표기된 가토오정미소와 오쿠다정미소(붉은색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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