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구소식

답동(畓洞) - 긴담모퉁이 따라 생겨난 동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0-01 09:32
조회
722

http://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16632&thread=002001004&m_no=&sec=10


답동(畓洞) - 긴담모퉁이 따라 생겨난 동네

[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12-09-13 17:03ㅣ 배성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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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담모퉁이길
[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3)

'긴담모퉁이'라는 길이 있다. 답동 신협건물에서 싸리재 기독병원까지 이어진 길을 말한다. 이 길은 1907년 이미 번화가가 되어버린 화정(花町;지금의 신흥동)과 싸리재의 경인가도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신작로이다. 율목동에서 인천여상이 있는 언덕까지 완만하게 흘러내린 구릉지대를 남북으로 절개하고 그 양쪽에 축대를 쌓았기 때문에 '긴담모퉁이'라는 맛깔스러운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그래서 긴담모퉁이 길은 양쪽으로 정말 긴-담을 안고 있고, 긴담의 서쪽이 답동이다.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되다

개항장과 그 언저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탁계현(濁溪峴)이라 불렀던 이곳 역시 조선시대에는 인천도호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에 속한 해안가 구릉이었다. 인근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개항 이전에는 매우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터인데, 아래쪽 신흥동에 요릿집들이 들어설 무렵 이곳 답동 언덕은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개항장에 유입되는 일본인이 날로 증가하자 이곳에서 사망한 일본인들의 사체를 매장할 장소가 필요했고, 주거지 외곽지역에 공동묘지를 두게 된 것이다. 처음 이곳에 묘지를 둔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사망한 일본군과 1884년 갑신정변 때 참살당한 일본군 이소바야시(磯林眞三) 대위 일행 등 사체 23구를 매장하면서부터이다. 개항 초기 일본인들은 이곳과 신생동 해안가에 묘지를 두었는데, 각각 육군묘지와 해군묘지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88821일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은 육군묘지 인근 토지 13,539평을 조선 정부로부터 차입하여 일본 거류민의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수백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묻혀 있던 탁계현 공동묘지는 지금의 신흥초등학교에서 송도중학교 일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부지에 걸쳐 있었다.

모여든 일본인, 새로 난 길

개항장에 자리잡지 못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영역을 침범해오기 시작했고, 공동묘지가 있던 탁계현 주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공동묘지 한쪽으로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학교가 옮겨오고, 일본 사찰이 들어서면서 일대는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황량하던 공동묘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일본거류민회는 1902년 인근 율목리에 새로운 공동묘지를 조성하여 탁계현 분묘들을 이장하였다. 황량했던 탁계현 일대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07년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이주민들을 위한 도로, 즉 싸리재 경인가도에서 신흥동을 남북으로 잇는 긴담모퉁이길(지금의 답동로)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정감 있는 이름을 가진 긴담모퉁이길은 사실 조선지계로 넘어온 일본인들의 생활편의를 목적으로 생겨난 신작로였던 것이다.
일본인 공동묘지
처음 붙여진 이름 답동(畓洞)과 사정(寺町)

개항 이전 주변지역과 함께 두루뭉술 탁포(坼浦), 탁계현(濁溪峴)이라 불렸던 이곳에 답동(畓洞)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1903년이다. 그해 8월 관교동 일대에 있던 부내면을 개항장으로 이전하면서 답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원래 논이 많아서 '논골'이라 불렀고 이를 한역하면서 답동이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해안가 구릉지대에 논이 많았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일본인 공동묘지를 이전하면서 생겨난 동네가 아니던가? 어쨌거나 처음 붙여진 이름 답동은 1905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일본식 지명 '사정(寺町)'으로 변화한다. 일대에 동본원사(東本願寺), 묘각사(妙覺寺), 명조사(明照寺) 등 일본 사찰이 많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일본 어린이를 위한 학교

답동 끄트머리에 있는 신흥초등학교 역사는 개항 초기부터 시작된다. 개항장 내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개항 당시 인천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게 아동교육은 중요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일본 사찰인 본원사 승려들에게 교육을 위탁하였는데, 인천으로 유입되는 일본인이 증가하자 1892년 일본거류민회에서 전임교사를 초빙하고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 문을 열었다. 하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학생을 감당할 수 없어 1898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교사건물을 짓고 이전하기에 이르렀다. 이 학교는 해방이 될 때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초등교육기관으로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신흥초등학교)
신흥초등학교 본관 건물 앞 화단에 포탄 3점이 남아 있다. 이 포탄은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 앞바다에서 자폭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호 포탄으로 일본인들은 이를 전리품으로 삼아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이 학교 화단에 전시했던 것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까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것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60년이 훌쩍 넘은 오늘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21세기 학생들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사뭇 궁금하다.
신흥초교 본관 앞 포탄
동본원사(東本願寺)와 답동성당(畓洞聖堂)

신흥초등학교 동쪽 언덕에 '답동 로얄맨션'이라는 높다란 아파트가 위치한 곳이 인천 최초의 일본인 사찰 동본원사 자리이다. 일본 진종(眞宗) 오오타니(大谷)파의 본원사는 1884년 포교를 시작하여 1886년 인천지원을 설립하였으며 1888년 개항장 내에 임시본당을 건립하였다.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힘입어 신도 수가 늘어나자 189910월 공동묘지였던 이곳으로 이전해 온 것이다. 1910년대까지 본원사로 불리던 이 사찰은 1920년대 지금의 송도중학교 자리에 서본원사가 들어서면서 동본원사로 개칭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사정은 다시 답동으로 되었다. 그리고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이곳을 답동이라 부르는 것은 그 중앙에 우뚝 서있는 답동성당 때문일 것이다. 인천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90년으로 프랑스 빌렘(Wilhelm. J) 신부가 제물포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변변한 건물 없이 포교활동을 벌였지만, 1897년 지금의 자리에 고딕양식의 단층 성당을 건립하였고 1933년에는 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증축하였다. 높은 빌딩이 많지 않았던 시절 인천시내 어디서든 답동성당 첨탑을 볼 수 있었다 하니, 인천시민 누구에게나 경건함을 느끼게 했던 건물이다.

개항장 언저리에 자리한 답동은 개항장 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후 이곳에 주거지, 학교, 사찰 등이 들어서면서 신작로가 뚫리고 번화가로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이 건설한 신작로에는 '긴담모퉁이'라는 정겨운 한글이름이 붙어있다. 일찍이 신태범 선생은 그의 저서 <인천 한세기>에서 "긴담모퉁이와 배다리라는 특이한 지명은 시가지의 현황으로 보아 얼마간 명맥을 유지할 것 같으나…."라고 했지만, 불과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길에는 '답동로'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어 있다. 그렇다 해도 길 양쪽의 긴-담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 길은 '긴담모퉁이'로 불릴 것이다.

  동본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