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구소식

똥고개, 고개 사이에 똥을 품고 있던 달동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13 09:15
조회
830
인천의 숨은 이야기
똥고개, 고개 사이에 똥을 품고 있던 달동네
  
글_이성진(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교사,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조선 말기,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많은 근현대사의 유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속의 인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통해 인천의 숨은 매력과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천의 또 다른 기억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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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근현대사에서 전쟁의 중심에 서 있는 비운의 도시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는 외국군의 통로였으며,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 때는 군수품 보급처 역할을 하였다.
가장 인천을 크게 변화하게 한 역사적 사건은 아무래도 해방과 한국전쟁이었다. 해방은 일본이 미연합군을 상대로 4번이나 아군과 적군이 번갈아 점령하고 탈환하는 치열한 전쟁터였던 까닭에 토박이 인천사람들은 직접적 피해를 당하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토박이 인구가 적다.
특히 송림동 부처산 일대와 8번지 일대는 인천상륙작전 시 미군으로부터 집중 포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 70~80%가 좌익성향이었던 까닭에 요시찰지역이었다고 한다.

송림동 8번지일대는 한국전쟁 이후로 황해도 연백, 장연, 해주, 벽성, 송화 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움집을 짓고 살면서 거대한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1951년 1.4후퇴 이후주로 황해도 해안에 속해 있는 연백, 장연, 송화, 초도 등지의 피난민들이 강화도를 거쳐 인천으로 직접 들어와 송림동 8번지 언덕 꼭대기까지 움집을 닥치는 대로 짓고 살았다. 곧 수복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 보다 가깝고 수월한 곳에 임시방편으로 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몸만 담는 곳인 까닭에 그냥 몸만 누울 수 있는 공간이면 되었다.



그러나 휴전이 되면서 고향으로 금방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뿌리 뽑힘의 절박함과 고통에서 뿌리내림의 절박함으로 바뀌게 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배를 타던 피난민들은 부도로 나가 배를 타야 했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배다리시장을 나가 악착같이 벌이를 해야 했다. 황해도 피난민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고 아주 성실하게 일을 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송림 4,6 동 일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피난민들은 이곳에 눌러 앉아 뜻하지 않은 배고픔이란 고통으로 벗어나는 처절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갔다. 장사 수완이 좋은 피난민들은 죽자 살자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고, 부두에 나가 짐을 나르다가 병을 얻어 거동을 못하는 경우, 장사로 돈을 벌어 운수업 등 다른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망해 그냥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똥8번지 인간들이 가방 줄이 기냐 아니면 푼돈이라도 밑천이라고 가진 게 있냐. 그저 가죽만 남은 제 몸뚱이 하나에 주렁주렁 뒤웅박 매달 듯 애새끼만 내질렀지. 변변한 벌이도 없는 집구석들만 다닥다닥 처마를 맞대서 집집마다 서로 쌀 꾸러 가기도 어려웠어. 애새끼들은 제비새끼처럼 주둥이를 짝짝 벌리고 먹이 달라고 목소리를 쥐어짜지 사내들이라곤 대낮부터 막걸리나 깡소주에 취해 빈둥거리지. 그런 인간들이 동인천이나 송림시장 모퉁이에 나가 노점이라도 할라치면 건달들이 엉겨 붙었지.”(조혁신, 단편소설집 뒤집기 한 판  ‘부처산 8번지 똥 8번지’)

1960, 1970년대 장사로 큰돈을 벌어 신도시로 이사 간 피난민들이 늘어갔지만 그들이 떠나간 자리는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충청도, 전라도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 일단 조선이연(현 현대제철), 대성목재, 동일방직, 대한 중공업, 한국유리 등 굴지의 공장이 있었고,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평-주안으로 연결되는 경인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충청도 서산, 당진 등 농촌 젊은이들이 대거 인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왔다. 그리고 연안 여객노선이 원활하게 연결되면서 전라도에서 올라온 이농민들은 똥고개 8번지에 정착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네 아버지가 처음 부처산에 들어왔을 땐데 사실 이곳은 딱히 땅임자가 없었거든. 솥단지 걸고 흙바닥에 이부자리 먼저 깐 놈이 임자였지. 근데 그래도 먼저 자릴 틀고 앉은 사람들에게 텃새란 게 있었어. 동네 건달들이 벽돌장 올리고 판자에 못질한 후 네 아부지한테 텃세를 놓았어. 어지간한 사내들은 건달들에게 쥐어터지고 땅값 명목으로 돈 뜯기는 게 일쑤였는데 갑수 아부지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공갈이었지.”

똥 8번지. 이런 척박한 삶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거칠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건달패와 어울리면서 범죄에 빠지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그런 건달패들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결국 사회적 문제를 자주 일으켜 경찰들이 인천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우선 달려오는 곳이 바로 똥 8번지였다고 할 정도로 깡패 동네로 알려졌다고 한다. 황해도에서 피난 온 부모님이 송림동 8번지에 정착하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한 바 있는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영배 교장(60)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 어릴 때 친구들 중 열에 일곱 여덟은 깡패가 되었어요. 감옥에 여러 차례 갔다 온 전과자가 부지기수예요. 그 애들 젊었을 때는 엄청 났어요. 사는 게 다 구차했고 그렇게 나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저는 부모님께서 구세군 교회에 나가셔서 새벽마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어떻게 나쁜 길로 가지 않은 경우예요. 어머니께서 항상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데 어떻게 나쁜 길로 가겠어요.”



1970년대부터 주안일대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송림동 일대 주민들 중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있는 주민들은 주거환경이 쾌적하고 교육환경이 좋은 신시가지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똥고개도 이런 주거환경 변화에 따라 도시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똥8번지도 그 개발 바람에 비껴가지 못하고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아파트가 건축되었다.

똥 8번지. 달동네는 잠자리와 먹는 공간을 빼고는 모든 생활공간은 공동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식수문제였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물을 길러야만 했다. 혹시 누가 새치기라도 하면 싸움이 났다. 바로 앞산에 수도배수지가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아래 동네에서 물을 퍼다 써야만 했다. 장마철이나 추운 겨울철에는 정말 물통을 이거나 지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정말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질척한 흙바닥에 고무신이 미끄러워 넘어지기라도 하고, 눈이 내려 미끄러운 언덕에서 미끄러지라도 하면 애써 떠온 물을 왕창 쏟아 버리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 다음 문제는 분뇨처리였다. 똥차가 언덕 위까지 올라올 수 없어 똥지게로 져서 날라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동네보다는 더 많은 처리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제때 처리를 해 주지 않아 똥통이 차고 넘쳐 똥냄새가 온 동네를 진동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도 감수해야 만 했다.
“이즈막 기준의 고민은 바로 인간이 남기고 간 흔적, 다름 아닌 똥, 유식한 말로 인분을 치우는 일이었다. 기준이 세든 건물의 화장실은 재래식 변소였는데 쓰는 사람이 많아 한 달이 채 못 돼 변을 퍼내야만 했다. 변소간 치우는 것이야 똥구멍을 봉하지 않은 이상 누구나 당해내야 하는 일인데 무슨 죽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산동네에서 분뇨차라 일컬어지는 똥차를 불러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조혁신 단편소설 ‘똥막대 한 자루’)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똥고개에 살면서 똥 하나 처리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 자체가 웃음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바다에 똥을 버리거나 수도국산 옆을 지나 화수동, 만석동으로 가는 고개에 양배추, 호박, 복숭아 등을 키우는 밭에 똥거름을 주는 까닭에 똥을 담아 삭히는 똥통이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똥고개라고 하였다. 그리고 1977년 똥고개 근처 송림6동 예수 대주중공업 뒤편(현 아시아경기대회 배구장)에 송림위생처리장을 설치하여 인천 지역의 똥을 처리하였다. (유동현, ‘골목, 살아지다’)



송림동은 안송림과 바깥송림으로 분리되어 있다. 안송림은 옛 현대극장 뒤편에서 서흥초등학교에 이르는 동네를 일컫는다. 이곳의 가옥이나 골목형태는 비교적 넓고 좋은 편이다. 그렇지만 이 동네도 아래동네에서 윗동네로 올라가면 주거형태가 골목형태가 점차 열악해지고 언덕 형태에 맞춰 집들이 들어섰고, 그 집 따라 골목이 형성되어 좁고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안송림은 주로 평안도 피난민들이 해방직후 터를 잡고 살았고, 한국전쟁 때도 피난 갔다가 돌아온 평안도 피난민들과 1.4후퇴 때 월남한 평안도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해방직후 월남한 사람들은 공직자, 의사 등 엘리트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평안남도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교회가 제3교회이다. 중구 송학동에 있는 제일교회는 신의주를 중심으로 하는 평안북도 피난민들이, 제2교회는 황해도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이다. 이들 피난민들은 월남전에는 고향에서 지주나 상공업 종사자, 전문직 종사자 등 중산층 이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제3교회가 이곳에서 복음병원을 건립해 의료선교를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평안도라는 지역적 연대감이 유난히 강해 장사를 해도 한 번 거래를 하고 믿음이 생기면 다소 비싸더라도 단골이 되어 주는 등 상부상조하는 틀을 유지하면서 뿌리 뽑혀 내려왔지만 빠른 시간 내에 뿌리내리는 악착스런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그들만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동네를 ‘안송림’이라고 하였고, 그곳을 강화, 김포, 검단 등지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첫 관통이었던 까닭에 인천의 다운타운이 되었다. 그 바깥 동네를 ‘바깥송림’이라고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바깥송림은 지역적 연대감이 없는 관계로 언제나 안송림에 비해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황해도 피난민들이 대거 들어와 바깥송림에 삶의 터전을 잡았는데, 평안도 피난민들과는 달랐다. 인천과는 비교적 근거리에 접해 있는 연백, 장연, 송화, 초도 등에서 분단을 준비한 피난을 내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다에서 고기를 잡거나 배를 몇 척 가지고 생활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로 화수부두를 중심으로 배를 타는 일을 하면서 생활을 했던 까닭에 생활기반을 잡는데 많은 어려움과 시간이 걸렸다. 황해도에서 피난 온 엘리트층들은 주로 제2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인천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에 비해 바깥송림에서 정착한 황해도 피난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1960,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부평, 주안, 만석동, 학익동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공단이 만들어지거나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충청도, 전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송현동, 송림동 일대는 이들에 의해 세대교체가 된 것이다. 안송림에 살던 평안도 사람들도 주안 등 신개발지역으로 이사 가고, 바깥송림에 살던 황해도 사람들도 신개발지역이나 아래동네로 이사하고, 그 자리에는 충청도, 전라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사람이 모이면 그곳에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그에 따라 볼거리, 먹거리가 반드시 뒤따른다. 송림 로타리 시티은행 송림지점 뒤편으로 야채경매장과 야채노점상이 활성화되었다. 이곳에 1971년 정한직 등 3인이 현대상가를 건축하여 분양하였다. 점포당 300~350만원으로 분양되었다. 그리고 노점상들을 건너편 동부시장으로 이전시켰다.
현대식 상가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은 노점상이 있는 동부시장으로 발길을 옮겨 갔고, 현대상가는 쇠퇴하였다. 입주한 상인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결국 세금체납으로 시장으로 허가도 못 받았다.
동부시장은 1971년 12월 송림6동 50번지 일대에 개장되었다. 현대상가 건축을 추진하면서 쫓겨난 노점상들은 현대극장 건너편으로 이전하면서 형성되었다. 농협, 원예협동조합 등 금융기관이 소재하고 있으며, 원예협동조합과 야채시장을 통해 비교적 신선한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어 현대상가보다 더 번성하였다.

현대시장은 1960년 경 개설된 시장으로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재래시장이다. 복합시장인만큼 농축산물, 가공식품, 의류 등 다양한 물건들을 살 수 있는 곳이기에 강화, 김포, 서구 주민들이 농수산물을 팔고 난 후, 물건들을 다시 사가는 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인천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인천의 길과 시장’)

시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모이는 곳에는 볼거리도 항상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송림3동 동부시장 건너편에 2층 500평 규모의 영화상영관이 들어섰다. 바로 현대극장이다. 동시상영관으로 개봉관에서 이미 상영된 영화를 몇 달이 지난 후 재상영하는 2류 극장이었다. 텔레비전이 보편화되기 이전이라 영화는 그 당시 문화생활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했다. 한 번 극장에 들어가면 2편 영화를 보는 까닭에 반나절은 그냥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현대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쇼 공연장이기도 하였다. 유명 가수나 유명 코메디언의 쇼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극장은 송림동 랜드마크가 되어 바로 옆 자리(현 파리바케뜨)에 현대예식장, 현대상가, 현대시장 등 ‘현대타운’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비록 일류극장이 아니고 삼류극장이라고 해도 그만큼 극장이 갖는 위상은 매우 컸고, 동네의 자존심이었다. 일류극장은 개봉관을 말하는 것이고, 이류극장은 일류극장에서 상영한 영화를 3-4개월 뒤 재상영하는 극장으로 한편만 재상영하는 재개봉관이었다. 삼류극장은 재개봉관으로 개봉관에서 상영한 지 6개월~1년 뒤 재상영하는 재개봉관으로 2편을 상영하는 극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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