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숭의동
살아(사라)지다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로터리에서 돌고 돈다
숭의동
숭의동
교차로에는 오래된 로터리가 있다. 그 로터리를 돌면 여의실도 갔고 깡시장도 갈 수 있었다. 더 돌면 ‘109번지’ 전도관 동네와 옐로우하우스에도
다다른다. 한때 그 로터리를 돌아야 도심에서 교외로, 교외에서 도심으로 오갈 수 있었다. 도시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오늘도 숭의로터리는 하염없이
자동차를 원심력으로 돌리고 또 돌린다. 로터리는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돌리고 있는데 숭의동의 시계 바늘은 멈춰
서있다.
심하게 낡았음에도 요즘 인천에서, 아니 대한민국 골목 중에서 가장 ‘핫’한 곳, 숭의동 우각로문화마을. 안전행정부 차관은
예고도 없이 전격 방문해 주민과 함께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어느 여름날 인천시장은 들렀다가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갔다. 공중파를 비롯해
거의 모든 TV 화면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 동네는 얼마 전에는 제1회 대한민국지방자치박람회 우수향토자원 30선에 선정되었다. 전국 145개
향토자원 중에서 뽑혔다니 그 경쟁력이 대단하다. 우각로문화마을의 오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동네의 어제는 터프하고 와일드한 것으로
‘핫’했다. 사람은 밟고 있는 땅을 닮는다고 했던가. 쇠뿔고개, 황골고개 라는 거친 옛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지형만큼이나 거칠기로 유명했다.
창영동, 송림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오르기를 극도로 꺼렸다.
600여 가구 중 절반은 빈집이었다. 15년 이상 끌어온 재개발
계획은 계속 공수표만 날렸고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다. 체온 없는 빈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소굴’이었다. 비행청소년, 술주정뱅이 그리고
쓰레기 더미가 집 하나씩을 차지했다. 주민들조차 자신의 동네를 무서워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동네가 점점 희미해질 즈음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동네 언덕으로 올라왔다. 작가·화가·도예가·연극인 등 예술인의 영역도 다양했다.
그들은 빈집부터 색칠했다. 알록달록 울긋불긋 총천연색.
아니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저렇게 색감이 없지 촌스럽게. 그동안 너무 칙칙한 무채색에 둘러 싸여 살던 주민들을 위한 배려였다. 일단 겉모습으로
동네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아예 몇몇 예술인은 짐을 옮겨와 눌러앉고 다른 이들은 빈집을 작업 장소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해 20명의 예술인이 마을 주민이 되었다. 빈집이 공예방으로, 영화제작소로, 작은 도서관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대낮에도 돌아야 했던
경찰 순찰도 사라졌다. 문화마을로 알려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늘었다. 골목마다 셔터소리와 함께 감탄사 그리고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순찰 대신
순례의 발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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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각로 문화마을 위에는 성채와
같은 거대한 건물이 서있다. 흔히 ‘전도관’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동인천, 주안, 개건너는 물론 앞바다
섬에서 인천 항구로 들어 올 때도 희미하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이 건물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알렌이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의 한 대학의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휴전 후,
한 종교단체의 집회가 남한 땅을 온통 휩쓸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년 9월16일 동산중학교 앞 넓은 벌판에 엄청나게 큰 천막들이
쳐졌다. 수없이 많은 솥단지들이 돌맹이 위에 올려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천막 안에서 열광적인 집회를 가졌다. 원래 닷새
예정이었으나 이틀을 연장하며 밤낮으로 열렬한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바로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였다. 그 종교단체 이름은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였다. 지금은 천부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수많은 신도들의 벽돌을 이고 지고 언덕을 올랐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방팔방 산 밑에서 개미처럼 꼭대기로 올라오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잖아. 새벽 4시까지 기도하던 그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옆집에 살면서 전도관에 다니던 경숙이 엄마는 소사신앙촌으로 들어간다며 이 동네를 떴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
40여년 간 전도관 주변에서 살고 있는 장춘자(74) 할머니의 기억 속 한 줄거리다.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조
씨라는 서울사람이 이 건물을 매입했다. 6개월 정도 비어 있다가 신발공장 3개가 세 들어 왔다. 직공들이 많아 별도의 기숙사도 있었다. 2,
3년간 운영하다가 공장은 이전했다. 1984년 이 자리에 예루살렘교회가 들어섰다. 다시 열광적인 집회가 이어졌다. 매주일이면 교인을 가득 실은
수십대의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꼭대기로 향했다. 주민들이 반복되는 그 혼잡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결국 버스는 공설운동장에 세워졌다.
30여전의 모습처럼 교인들은 걸어서 109번지로 올랐다.
9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시 전도관은 비었다. 불 꺼진
성채는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산꼭대기의 1700여평 땅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주황색의 양철 지붕에 올랐다. 알렌이 왜 여기에 별장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육지로 많이 변했지만 월미도는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 왔다. 갯바람이 코에 스치는 듯했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기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숭의동에는 ‘여의실(如意室)’이란 동네가 있다. 현재의 남구청사와 청소년회관 일대를 일컫는다. 흔히 여우실이라고 부르는 이 동네는 조선왕조
개국공신 김균의 후손들이 600년 동안 살아 온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었다. 6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고(故) 김은하(1923∼2003)
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의실에는 오랫동안 김씨 문중의 선영이 있었다. 일제 말이었던 1940년, 일본 사람의 거주지가 도심에서부터
점점 확장해오면서 현 숭의로터리 일대까지 밀려왔다. 주변에 도로가 뚫리고 선영과 마을이 두 동강 나자 선영을 시흥시 미산동으로 이장했다.
1996년에 종가와 사당마저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구청 종합민원실이 들어섰다.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던 종가터에 지난 2006년 11월
여의실 문중 종친과 남구학산문화원이 주축이 돼 표지석 하나를 세웠다. 현재의 민원실 바로 앞이다.
인천남중학교 후문 가까이에 있는 여의실
경로당에서 김용식(81)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여의실 토박이다.
“이 일대가 온통 배밭이었어요.
저기 시온교회가 들어선 자리는 배밭 주인이 살던 집이고. 남구청 밑으로는 온통 미나리깡이었지. 어렸을 적에는 거기서 붕어와 미꾸라지 잡아먹곤
했어요. 한때 구청 자리에 미군이 포를 설치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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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교대 터도 여의실 문중의
땅이었다. 개성공립사범학교는 6․25 전쟁으로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숭의초교 교실 몇 개를 빌어쓰고 있었다. 개성사범학교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해 문중이 땅을 내놓으면서 는다. 1953년 4월 숭의동 203번지에 학교 부지를 확보한다. 당시 그 땅은 야산이었고 다른 한편은 온통
미나리밭과 물구덩이었다. 학생들은 방과 후는 물론 일요일에도 등교하여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 이 학교는 인천사범학교에서 인천교육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오늘날의 경인교육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1990년 인천교대가 계산동으로 떠난 그 자리에 남구청과 청소년회관이
들어섰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교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일자형 건물이다. 한눈에 봐도 주변 건물과는 사뭇 다르다. 건물 모퉁이에
머릿돌이 박혀 있다. ‘단기 4289년 9월’로 돼 있다. 1956년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는 청소년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던 회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은 청소년회관과 남구의회 청사를 이어주고 있다. 옥상에 오르니 옛 교사(校舍)의 모습이 더 뚜렷하다.
이런 이유로 영화제작 관계자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
“거의 다 그대로예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손상된 게 별로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에게 수업 후는 물론 체육시간에도 체력단련으로 벽돌을 날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1967, 68년에
이곳에서 공부했던 6회 졸업생 김병진 씨(한국우주소년단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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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동 철로변에 가면
나무냄새가 난다. 나무 켜는 소리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인선 철도길 따라 목공예 관련업체 30여 집이 모여 있다. 대부분 30년
넘는 집들로 처음에 배다리에 터를 잡았으나 철도길과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원동을 거쳐 이곳 숭의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다시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은 특화 거리가 되었다. 목공예점은 나무 현판부터 계단 손잡이 같은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고 목공점은 주로 문짝과 창문틀 등 큰 나무 물건을
만든다. 7, 80년대에는 바둑판도 빠지지 않는 인기품목이었다. 명절이 되면 주문이 밀려 철야작업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중국 기성품이
많이 들어와서 예전만 못했는데 최근에 웰빙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일감이 늘고 있네요”
신정목공예 안희식 대표의 말이다. 작업장 가운데
요즘에 보기 드문 나무물통 하나가 놓여있다. 드라마 ‘동이’의 소품으로 방송국에 10개를 납품하고 남은 하나다. 드라마 ‘대장금’의 소품 몇
점도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기계대패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옆 가게 한일공예사에 들렀다.
“이제는 이 일을 배우려고 하는 애들이
없어요.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장들이 그만두면 이 일도 맥이 끊긴다고 봐야죠.”
김종필 사장에게 손으로 하는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자 몇 가지 시범을 보이는데 30년 장인답게 손놀림이 민첩하다.
“팔만대장경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우리가 그 후예라고 봐야지요.”
그는 몇 년 전 송도 151층 인천타워 모형을 주문받아 나흘 동안 밤샘 작업을 해서 3m짜리 모형으로 납품했던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인천타워 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든 모형도 폐품 처리됐을 것을 생각하면 영 마음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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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 깡시장이 있었다. 한동안
인천시민의 농산물 공급을 책임지던 숭의철교 옆 도매시장이었다. 지금은 ‘숭의청과물시장’이란 이름이 붙은 4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작은
시장이다. 7, 80년대 까지 만해도 인근의 김포, 강화는 물론 충청도, 전라도에서 신선한 청과물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중개인의 경매
외침소리가 매일 새벽을 깨웠다. 길 건너편을 포함해 주변에 100여개의 가게가 문을 열었고 철교 밑에도 노점이 장사진을 쳤다. 이제는 15여개의
가게만 문을 열뿐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시장이 되었다.
“새댁 때 이곳에 와서 장사했는데 이젠 할머니가 되었어. 20여 년 전
농산물시장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이 폭삭 죽었어.”
옛 경매장 뒤편 한 귀퉁이에 문을 열고 있는 할머니의 안타까운 푸념이다. 시장
뒤편으로 가면 가게 문들은 다 닫혀 있고 행인조차 뜸해 황량하다. 이제는 택시기사에게 숭의청과물시장 보다는 시장 옆에 있는 ‘풀 나이트클럽’
가자고 해야 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게 상인의 얘기다.
시장에서 철도길 따라 도원역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가로수 공원에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돌 하나 세워져 있다. ‘한국철도 최초기공지’ 표지석이다. 1897년 3월22일 중절모를 쓴 서양인과 도포를 입은 조선인 등 수십 명이
구릉에 모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2년 후 1899년에 개통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 첫삽을 떴다. 그 삽질이 한국철도 110년의
초석이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표지석이 세워진 곳은 기공식 첫 삽을 뜬 곳이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400여 미터가
정확한 장소라고 표지석에 써 있다. 그러니까 현재 진로아파트 남쪽 부근 숭의철교에서 박문삼거리로 가는 도로가 올바른 자리로
추정된다.
< 그때, 이곳 숭의동
>
우각역
우각역은 주위에 민가가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알렌만을 위한 역이었다. 알렌이 자신의
별장을 오르기 위해 정차한 역으로 역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 사진도 없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선로가 직선화되면서 숭의동 쪽으로 지나가자 이
역은 존재 가치가 없어져 1906년에 사라진다. 숭의동 109번지 자동차정비소 뒤쪽 골목길에 선로가 지나갔던 축대 흔적이
남아있다.
영제한의원
1945년 이전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한의원이다. 70년 가까이 전수된 우강침법과
보뇌환 등으로 각종 희귀질환 등을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한의원의 전신인 영제한약방을 개설한 우강 노학영은 6,70년대 당시 지역 내
기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79년 6월 수봉공원 팔각정 건립에도 1504만원을 기탁해 팔각정 이름은 그의 호를 딴 우강정(佑江亭)이다.
숭의동 다복아파트
일제강점기 다복아파트 터에는 면화(솜)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물품은 남구청 건너편에 방공호 등 그 흔적이 현재도 남아있는 마굿간으로 옮겨졌다. 마굿간은 일종의 물류창고였다. 마차로 수인선 남부역으로 운송돼
인천항역을 거쳐 선박으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구청 주변에는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나가야 영단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다복아파트는 군수공장 터에 1975년 10월 준공되었다. 인천개발공사에서 다복맨션아파트라는 명칭으로 100가구를 분양했다.
와룡양조장
인천남중학교 정문 건너편 현재의
태양아파트를 중심으로 1970년대 까지 있었던 양조장이다. 지금의 수봉탕 목욕탕 까지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의 높은 굴뚝에 흰
페인트로 ‘臥龍釀造’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고구마로 주정을 뽑은 검은 색 폐수가 공장 앞 큰 저수지로 흘러나왔다. 겨울이 되면 이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탔다. 현재 폐허로 된 제물포시장은 저수지 바로 옆 논을 매립하여 지은 것이다. 인근에 가죽공장이 있었고 침례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성애원이 있었다.
숭의동 극동아파트
1968년 4월16일 인천 최초의 시 공영아파트 자리이다. 현재 그 터에는 11층 규모의
극동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한편 인천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는 1975년 주택공사에서 건설한 현재는 수봉공원 인공폭포가 된 도화동 AID아파트다.
주인선
경인선의 주안역과 수인선의 남인천역
사이에 가설되었던 주한 미군의 화물 철도(길이 3.8㎞의 단선 철로)로 주안역의 ‘주’자와 남인천역의 ‘인’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1957년
부평 미군부대와 남인천역 근처에 있던 미군부대 간 물자 수송을 위해 가설되었다. 1959년 5월 31일 준공하고 7월 업무를 개시했다.
남인천역은 1980년대 인천과 논산 사이의 입영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1990년 이후 부평미군기지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1992년경부터 주안역과
남인천역 구간의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 2005년 주인선 폐선 부지 1.4㎞ 구간, 27,990㎡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제물포역 쪽에 잘려진
주인선 철교가 일부 남아 있다.
옐로우하우스
해방 이후까지 운영되었던 선화동 유곽이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정리하자 현재의 숭의동 지역으로 옮겼다. 건물을 지으면서 당시 미군부대에서 노란색 페인트를 얻어다 칠했기 때문에 ‘옐로우하우스’란 별칭을 얻게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 단층 혹은 2층 건물이었다. 연안부두에 들어온 선원들이 한 달가량 이곳에 머물기도 해 한창 때는 서른두 집에
340명의 아가씨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집창촌이었다. 다시 출항을 하기 위해 선주들이 이곳에 와서 술 취한 수많은 선원들을 업어서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집창촌이 포함된 숭의1동 3·4통 3만3000㎡가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숭의자유시장과 숭의평화시장
숭의운동장 옆에는
숭의자유시장과 숭의평화시장이 마주 보고 있었다. 1970년에 지어진 숭의자유시장은 체육사와 냉가공업점 등이 있었으나 공설운동장의 재개발로 철거가
되었다. 옆에는 1966년 12월 영사실 천장에서 원인모를 불이나 전소되었던 도원극장이 있었고 목조 창문과 문을 만드는 목공예점이 많이 있었다.
1971년 개설한 숭의평화시장은 초기에 주변의 도원동과 숭의동 지역의 주민은 물론 제물포역 인근 주민들이 채소 경매시장과 이 시장을 이용하면서
활성화되었지만 현재는 그 기능이 거의 상실한 상태다.
일제강점기 관사
마을
남구청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나가야(長屋) 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나가야 주택은
한 건물 안에 여러 가구가 밀집해 거주하는 일본식 다세대 주택이다. 주변에 공장과 관사가 많이 밀집해 있었으며 이 일대는 공장 근로자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영향 탓인지 현재 이 동네에는 일본종교인 천리교 경인포교소가 자리하고 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