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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공간’ <싸리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7-24 11:41
조회
241

 


 



  ‘싸리재’는 지금의 중구 경동 일대를 일컫던 이름이다. 경동은 경성(서울)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라는 뜻으로 지어졌는데, 사람들은 행정명인 경동보다 싸리재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했다. 얼핏 토속적인 느낌을 자아내지만, 당시에는 인천의 최신 유행을 이끌던 최대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을 만큼 양복·양장 차림의 사람이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양복·양화점 30여 곳이 들어서 성업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알 만하다. 번화가답게 향도백화점(인천 최초의 백화점)에서는 진기한 양품들을 판매했고, 조흥은행, 상업은행 등의 금융시설이 들어서 있었으며, 대형 병원인 기독병원과 십 수 개의 개인 의원, 약방·약국들이 의료타운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일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었던 애관극장에서는 영화 뿐 아니라 각종 시사회와 정치행사가 열렸으며, 100여명의 연극인을 배출했던 극단 돌체를 필두로 여러 소극장들이 있었다. 그 밖에도 인천에서 신호등이 처음 켜진 곳이 경동사거리(1961)이며, 경인간 최초 전화 개통지(화신양복점)도 이 곳이었다고 하니, 싸리재는 그야말로 사람과 문화가 모여 있던 중심지였다. *


 



▲ cafe 싸리재 전경. ⓒ인천시 마을공동체 지원센터


 


  세월이 지나면서 지역은 쇠락하게 되었고, 거리는 한적해졌다. 그랬던 이곳에 작년 가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싸리재>가 생겼다. 원래 이곳은 36년 째 의료기 판매를 하던 곳(인천에서는 한 자리에 가장 오래 영업한 의료기구상이라고 한다.)이었는데, 5개월여의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싸리재의 박차영 대표를 만나 옛 동네, 그리고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1960년대로 추정되는 싸리재 모습(좌), 인천 최초 백화점 향도백화점 전경(우)



과거의 싸리재

  박차영 대표는 “공식적인 기원은 아니지만, 중국 청나라 때 행정구역 구획을 나누는 기준이 3리마다 한 섹터 씩이었다.”며 “그래서 싸리재라는 말의 어원이 ‘쌈리’, ‘싸리’ 하고 부르다 보니 삼리재길이 되고, 나중에 싸리재길이 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당시 경동에는 부유한 조선인들이 주로 살았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삼륜차가 지나다니던 곳도 싸리재 길이었다. 싸리재에 상업지구가 형성된 것은 1925년부터인데, 인천 최초의 상가(‘항도백화점’, 양과자점인 ‘부영당’, 고서점 등)및 포목전(베, 무명, 옷감을 파는 점포)이 생기면서 싸리재 거리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 옛 경기의료기 모습(좌)과 리모델링 후(우) 모습  ⓒ박차영


 


▲ 박차영 대표. 실내 한켠에는 의료기 매대가 남아 있다.


 


문화와 소통의 공간이 되기까지
  박 대표는 36년 전부터 싸리재에서 의료기 사업을 해왔다. 당시에는 세를 들어서 운영을 하다가 22년 전 바로 옆자리에 있던 현 건물을 인수한 뒤로 쭉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던 곳이 어떻게 문화공간이 되었을까? 박 대표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늙어가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나이가 하나둘 늘어가면서 알게 된다.”며 운을 떼었다. 그는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더라도 삶에서 꼭 해내야 하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그의 희망이자 목표는 귀농이었다. 90년대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의 발기인이기도 했던 박 대표는 목표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강화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지금 내 목표는 무슨 의미일까? 왜 시골에 가려 했을까?” 라는 질문이 들었다고 한다.


  2012년, 그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나서 홀로 배낭을 메고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여행은 1년 동안, 1185km를 걸은 뒤에야 끝이 났다. 그는 “시골은 도시완 달리 사람 사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해체되어 버렸다.”며 밭일을 돕고 들밥 한 그릇 얻어먹는 그런 정이 사라졌다며 말을 이어갔다.


  “농촌이 고령화되고, 일이 바쁘다 보니 들밥 할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집에 가서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려 해도 길어서 내 오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꺼내 준다. 그건 얻어먹는 게 아니라 뺏어 먹는 거다. 어디든 읍내만 가면 마트가 있다. 마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니 이웃 간에 할 일이 줄어들었다. 그 때 나는 왜 시골에 가려고 했을까?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차라리 내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장이었으면 합니다.”

  도보 여행 이후, 그에게 일은 ‘장소의 개념’에서 ‘생활의 개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그는 살아오면서 구입하고, 줍고, 때론 주변을 통해 얻게 된 것을 모아놓고, 그 곳에서 열심히 사는 주변 이웃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도 들으며 토론하는 등 공간을 통해서 다양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변화를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공사는 넉 달 반이 지나서야 끝났다.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경기의료기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옛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cafe 싸리재”가 되었다. 박 대표는 “내가 있건 없건 이 공간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되고, 공간을 통해서 문화와 커뮤니티의 장이 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늘 틀이 없는 삶, 즉흥적인 삶을 살았다는 그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고 편하게 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종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기 쉬운데, 그런 대화는 마치 테스트하는 것 같아서 쉽게 피곤해져요. 여기서는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편하게 대화해요.” 그래서인지 젊은 단골손님 중에는 레포트 쓰러 왔다가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나중엔 자기 어머니랑 같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이를 떠나 인간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의료기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카페 수입이 많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교류하는 장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 맨 꼭대기 상량에는 선명한 붓글씨로 “龜 昭和 五年 四月 五日 午後 三時 立柱 上樑 龍”(귀 소화 오년(1930년) 사월 오일 오후 세시 입주 상량 용)이라는 글자가 씌여 있다.



잠들어 있던 과거와 마주하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다. 83년이 지난 건물을 수리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았는데, 가급적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옛 느낌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감탄이 터져 나온 것은 지붕 공사 작업 때였다. 뽀얀 먼지 사이로 드러난 천장 꼭대기 상량에서 선명한 붓글씨로 적힌 “龜 昭和 五年 四月 五日 午後 三時 立柱 上樑 龍”(귀 소화 오년(1930년) 사월 오일 오후 세시 입주 상량 용)을 발견한 것이다. 목재회사 이름과 전기 배선, 그리고 애자 보들도 83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놀라움의 순간을 경험했다”며 그때의 감격을 전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9월 16일(등기부상)에 기존에 ㄷ자 이던 한옥의 전면 일부를 헐고 2층 목조로 증축하여 지어진 줄은 알았지만, 당시 상량식 때 천장 대들보에 써 놓은 글귀와 마주하니 그 의미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 싸리재 2층 모습


 


추억이 가득한 그 곳으로
  “한 번은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저 중앙초등학교 나왔는데 혹시 저 모르시죠?’ 라고 하시더군요. 오랜만에 옛 동네에 들렀다가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으니까 반가웠던 거죠.” 그는 이제 시작한 싸리재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참 뒤에 왔는데 그때 그 카페가 이 곳을 지키고 있으면 얼마나 반갑겠냐”며 잊혀져 가는 동네를 장소로 하여금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i-view, ‘골목 살아(사라)지다-경동’ 일부 인용
(http://enews.incheon.go.kr/main/php/search_view_new.html?idx=9506§ion=11§ion_sub=12&where=and)


 


싸리재
인천 중구 경동 169

032-772-0470

http://blog.daum.net/pcy1950



사진 : 싸리재, 인천시 마을공동체 지원센터

글 : 이광민 (사업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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