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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의 주민모임을 찾아가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7-28 16:29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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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정동 열우물이 궁금해! ③

<해님방> 송기찬 선생님 인터뷰



▲십정동 전경

부평구 십정1동은 1960년대 말 선인학원 공사로 인해 집단이주한 도화동 철거민들과 1970년대 주안 수출 5·6공단이 개발될 때 모여든 노동자 가족들이 형성한 주거지역이다. 세월이 흘러 동네 주변에는 아파트가 하나 둘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곳은 아직 그때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 공장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주간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시설이었는데, 동네 안에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탁아방인 ‘해님놀이방’과 ‘해님공부방’이 1986년 문을 열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어져 온 ‘자모회의’, ‘실무자회의’, 94년 11월에 청소년 공부방을 열면서 시작된 ‘자원교사회의’ 등의 주민조직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마을일을 함께 의논하고 풀어가기 시작했는데, 보육문제와 여성문제 뿐 아니라 십정동의 생활문제에도 관심을 확장하면서 공동체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생활이 늘 불안하고, 하고 싶은 것이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실현시키기 어려운 상황을 이웃들이 함께 해결해 가며, 그 과정에서 불평등과 소외를 줄이고 없애서 주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해님방. 가난하지만 이웃들이 서로 도우며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바람 속에서 해님방은 오늘도 마을과 주민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 해님방 소개글 일부 인용




  
▲해님공부방 사진. 해를 거듭하며 공부방도 옷을 갈아입었다.


Q)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60년대부터인데, 어떤 계기로 86년에 공부방이 만들어졌나.

나도 당시에 활동하지 않았기에 전해 듣기만 했다. 만석동에서 활동하던 여성민우회 소속의 활동가가 말하자면 파견 형식으로 이쪽에 와서 활동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아마 지역조사를 통해서 현장을 찾다가 필요를 느껴서 오게 되었겠지.


Q) 어떻게 공부방으로 이어졌을까? 당시 시민운동 또는 학생운동 단위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것인가?

  당시 지역빈민운동, 여성빈민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마을과 만나게 된 것이다. 민우회에서 어떤 조직 단위의 사업으로 진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시작한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민우회 소속이었던 활동가에 의해 시작된 것이니까 단체의 한 분과 사업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공부방 활동


Q) 인천에는 오래전부터 도시빈민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다. 그중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해님방인데. 개인 단위에서 시작한 일이 어떻게 오랫동안 진행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일단 오랫동안 꾸준히 하신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충원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구심점이 되어준 덕분에 다음 활동가가 생겨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충원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냥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 해님방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다시 공부방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되어서 서로에게 힘을 주고, 동네를 변화시키는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Q) 공부방 사업이 중요 이슈일 수밖에 없던 환경적 요인이 있었을 것 같다.

아이들 숫자가 많고, 그 아이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은 어느 빈민 지역이나 마찬가지다. 해님방은 공부방 보다는 탁아방이었고,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생긴 곳이었다. 해님방을 시작했던 분들이 빈민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여성들의 보육 문제에 직접적인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포함한 동네 주민들과 함께 같이 활동하다 보니 필요가 생겨서 공부방을 열게 된 것이고, 시간이 지나 아이들 성장 시기에 맞춰서 청소년 공부방을 열게 된 것이다.


Q) 공부방을 이용하는 학생은 몇 명인가? 함께하는 사람들도 궁금하다.

지금은 초·중학생 17명. 그리고 상근 교사 2명, 자원교사 3명, 내가 반상근으로 함께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로서 방과후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Q) 선생님이 처음 십정동과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그때 학생가의 분위기 또는 사명감 때문인가?

뭐 그런 셈이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대학 졸업 이후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대학 4학년 때 온 것이 인연이 되었다. 20대의 사명감으로 왔다가 눌러앉은 것이다.(웃음) 그냥 하다 보니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 어느 순간 특별한 목표를 위해서라기보단 동네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계속 만난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


Q) 해님방에서 육아 외의 다른 활동도 있었을 것 같다.

많이 있었다. 예전에는 공동생산활동도 많이 했었는데 부엌팀이라고 해서 같이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밖에 마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여성교육 같은 것들도 많이 했다. 교육이라면 주로 한문, 한글, 영어교실 같은 것이다. 그밖에 동네 주거환경개선사업(재개발) 문제에 개입하기도 했고, 인근 동네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 연대활동도 있었다. 그때는 공부방사업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지역주민과 만나고, 쉼터에서 모이고, 교육활동, 독서회 등을 통해 공부를 했다. 다양하게 많이 있었다. 주민회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다.


Q) 주민회라는 건 어떤 것인가?

말 그대로 주민조직이다. 지역 자치조직·주민 자치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다만 외부 단체 사람들이 결합해 있었고, 사실상 지역주민이 많이 참여하기보다는 활동가들이 많이 모여서 연대활동을 하고 그랬다. 많은 주민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단체들에도 하나둘 없어지게 되고, 규모가 작아지게 되었다.


Q) 주민들만 있을 때와 외부 활동가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를 것 같다. 해님방 또는 다른 단위가 동네에서 함께 살면서 하는 일들로 인해서 동네가 어떻게 변화되었나?

글쎄. 동네가 어떻게 변했을까? 공부방과 관련해서는 동네 전체 아이들을 포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웃들이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방황하지 않고 잘 자랐다”고 말해준 정도? 주민자치조직으로서의 활동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마을에서 만나고 마을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삶을 나눴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다. 우리가 직접 만나고 함께 하는 주민은 많지 않아서 행사에 참여하는 주민은 많아도 동네 자체가 어떻게 변했다는 것은 보는 시선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주변 이웃 중에선 “개인적으로 모임을 갖다가 동네와 지역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해주신 분은 계셨다.


▲생태교육 프로그램


Q) 동네에 저소득층 주민이 많다고 들었다. 경제활동을 계속 하고 있음에도 주민들의 상황이 나아질 여지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해님방에서는 사회적 모순이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궁금했다.

해님방이 소득을 늘리게 하기 위한 경제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부업 같은 것을 함께 하면서 경제공동체 등을 계획한 적은 있었는데, 각자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그만두었다. 부업이 수입을 낫게 해주는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지 따지자면 자녀들 교육비가 들지 않았다는 정도? 소득을 증진시키기 위해 활동한 건 아니니까. 소위 말해 가난하더라도 도와 가며 살자는 공동체 의식이 주된 것이었다.


Q) 그래서 개발 문제가 마을에 들어왔을 땐 생활이 나아질 수 있었던 가능성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지금은 시기적. 상황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개발을 둘러싼 입장도 다른 것 같다.

개발 문제로 인해 동네가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게 되었다. 이 이슈는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 마음속에 떠나겠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면서 정주의식이 옅어졌다. 그래서 우리 마을을 가꾸겠다는 것보단 떠나겠다는 생각이 더 많은 것이다. 지금은 한 해 한 해 살아갈 뿐이지 동네를 가꾼다거나 동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은 잘 없다. 이게 가장 어려운 점이다. 언제는 전면 철거 방식의 개발이 들어오면 공동체는 흩어지게 될 것이다.


Q)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는데도 흩어질 수밖에 없는가?

내가 알기로 인천에서는 더 이상 집단으로 이주할 장소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개발이 된다면 아마 뿔뿔이 흩어지겠지. 반지하방이나 임대 주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동네처럼 싸워서 이주단지를 쟁취해 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떠날 사람들은 이미 떠났고, 어르신도 많다. 동네의 반 정도가 이미 빈 집이다. 빈 집은 외지인이 개발 이익을 보기 위해 구입했다가 팔지 못하고 비워놓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누가 쓸 수도 없다. 쓰기 위해서는 고쳐야 하는데 그 비용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해님방도 새로운 대안이랄지, 궁리를 해야 되는데 딱히 답이 있지는 않다. 이런 상태로 20년을 지나왔다. 지금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쪽에 가깝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이후를 계획하다 보면 현재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는 느낌 때문이다. 개발은 나중 문제고 지금은 눈앞에 놓인 일부터 하자는 것이다.


Q) 십정동 안에서 다양한 활동 단위가 만났으니 서로 의지도 하고 인상깊었던 일들도 많았을 것 같다. 교류하고 있는 단위들이 있다면?

보통 마을잔치 같은 큰 행사를 할 때에 부녀회 등과 만나서 함께 하는 정도다. 이런 경우는 개별 행사에 해당되는 것이고, 해님방은 주로 공부방을 중심으로 한 졸업생들, 부모님들과 많이 만난다. 지금 해님방에서 주최하는 사업은 공부방 사업만 있으니까.

그밖에 두레박이나 거리의미술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있으면 참여하는 정도다. 단체로 연결되는 것은 공부방 연합회나 지역아동센터 협의회 활동을 하고 있고. 마을 잔치때는 준비위원회를 꾸려서 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단체 외에도 부평남부자활에서 만난 통장, 부녀회와 함께 준비한다.


Q) 비슷한 환경에 있다가 바로 옆쪽은 아파트로 변했다. 박탈감이나 위화감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아파트 주민과의 관계는 어떤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처음에 아파트 쪽에서는 공부방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정문 앞에 이런 시설이 있으니까 집값이 떨어진다거나, 공부방 아이들이 아파트 아이들을 물들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해님방에서도 나서서 해명하거나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각자 사는 모양대로 지내고 있는 상황이다. 위화감은 없다. 누군가는 속으로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만날 일이 없으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엔 아이들이 아파트 놀이터에 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가끔 아파트에서 어쩌다 한 번씩 아이들을 봐달라고 공부방을 찾는 경우가 있다. 아이가 3시에 하원을 하는데, 부모가 4시에 퇴근하니 1시간만 돌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특별히 싫은 건 아니지만 "공부방 교과과정이 있기 때문에 한 시간만 봐주는 건 어렵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면 가능합니다."라고  말하면 보내지 않더라. 근데 프로그램 내용 안을 살펴보면 사실 거의 공부를 안 한다.(웃음) 그래서 안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잔치 같은걸 해도 일부러 오시지는 않는다. 그냥 별개로 살아가는 것 같다. 참여할 생각도 없고, 부를 생각도 없는 그런 거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백영아파트는 참여해서 축제를 함께 꾸리고 있다.


Q)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은가.

십정동 주민들은 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직업이 미장이고 목수고 일용직 노동을 하기 때문에 연결점이 생긴다. 또 시골에서 올라와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예전 시골의 공동체문화가 살아 있는 부분이 있다. 반면에 워낙 없이 살다 보니 분쟁의 여지가 생긴다. 집주인과 다투는 문제, 알콜 문제, 방음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싸움이 나는 문제 등의 분쟁이 생기니까 다투지 말고 친하게 지내고 살자. 얼굴 트고 인사하고, 그런 걸 바라는 거다. 그게 잘 되면 마을 공동의 조직. 주민회로 모여지면 제일 좋겠다.





글 : 이광민(사업지원팀)

사진 : 해님공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