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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연계한 읽을거리 및 볼거리, 지원센터 결과자료집과 마을공동체 만들기 공모사업과 관련 자료 등을 함께 나눕니다.

골목 살아(사라)지다 - 내동

읽을거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3-07 10:26
조회
901

http://enews.incheon.go.kr/main/php/search_view_new.html?idx=9543&section=11&section_sub=12&where=and (title like '%골목%' or content like '%골목%')


골목
살아(사라)지다

시간이
공간을, 공간이 시간을 이어주며 곱게 늙은 동네


내동

한때
‘안골말’이라고 불리던 내동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골목어귀에서 파란 눈의 선교사와 구한말 조선의 관리들을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언덕 마루턱에는 백범 김구의  정신이 흐른다. 그는 이곳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며 신서적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뜬다. 인천축항에서의
강제노역과 인천민들의 구명 운동 등을 통해 ‘의열청년’ 김창수는 ‘독립운동가’ 김구로 다시 태어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라고 말했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다. 스무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자를 위해 어머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해 전 기억이 어제 인 듯 새롭다.’
‘인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  -백범 일지 중에서-


백범이 노역한 인천
축항공사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지방
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다. 인천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길래 그는 서둘러 인천으로 발걸음을 했을까.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 그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했다. 이른바 ‘치하포사건이다. 이 일로 5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해주감옥에 수감됐다가
당시 가장 힘든 감옥이라고 알려진 내리(내동)의 인천감영(인천감리서)으로 7월 26일 압송되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 고종 황제의
사형 집행 정지령이 내려지고 무기수로 감형되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내리로 왔다. 인천항 내의 유명한 물상 객주집에
기숙하면서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며 아들에게 하루 세 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인천인들은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김구의 의연함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거가 마음에 와 닿아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가장 적극적이며 헌신적으로 나선 이는
강화 출신 김주경이었다. 그는 강화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강화의 인물로, ‘양반에는 이건창(李健昌)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였다. 인천 유생비밀결사의 지도자 유완무와 순검 김정근은 아예 그의 탈옥을 모의한다. 유완무는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일종의 ‘특공대’를 조직해 한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그를 구출하려는 계획까지 짰다.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 전 백범은 1898년 3월 19일 인천 감옥을 스스로 탈출했다.
이후 1911년부터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14년 인천감옥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죄수번호는 55호였다.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가 1915년 인천감옥에서 가출옥되었다. 이렇듯 인천은 1919년 상해 망명 이전 김구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당했던 곳이다. 그가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라며 해방 후 맨 처음 인천을 순시한 이유는 당연하고 충분한 것이다.



인천감리서
전경


백범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인천감리서는 조선정부가 1883년 내동 83번지 마루턱에 설치하였다. 개항장 제물포의 조계지 관리를 비롯해 외국인 입출항의
외교업무와 무역 ․ 관세의 통상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감리(監理)를 파견했다. 감리아문 청사는 한옥 단층 건물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옥에 유리창이 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은 커다란 삼문(三門)으로 열려 있었다.
1888년 제물포를 찾은 프랑스의 세계적 여행가
샤를르 바라는 그 때의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음날 아침,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물포만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조선의 이 커다란 마을은 길 하나와 몇 개의 좁은
골목들로 얼기설기 짜여져 있으며 특히 그 곳을 관할하는 널찍한 관아는 끝이 약간 올라간 큰 지붕을 이고 있었는데, 중국과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한 관아는 바로 인천감리서이다.
후에 감리서는 인천부(현 인천시청)의 역할에 개항장재판소와 학교 기능까지 함께
한다. 행정, 사법 기능에 교육기관이 들어선,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복합행정타운’이었다. 눈에 띠는 것은 감리서에는 감옥이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죄인이 볼기 맞는 비명소리가 담장을 넘어 인근 민가에 들렸다고 한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인천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수는 30명으로 수업 연한은 4년이었다. 첫 졸업식에는 9명, 2회 때는 단 한 명만 졸업했다. 이후
공립상업학교로 개편되고 1922년 현재의 송림초교 터로 이전하게 되는데 후에 이 학교가 바로 인천고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언덕에
아파트를 세운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1972년 2월에 법원이 석바위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대한준설공사가 들어섰다. 이 회사는 후에
한진그룹에 속하고 1990년 한진종합건설이 된다. 한진은 1996년경 이 건물을 헐고 ‘인천신포스카이타워’라는 지하 2층 지상 12층의 아파트를
짓는다.
거대한 성채와 같은 이 아파트는 응봉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월미도를 휘돌아 올라오는 바닷바람을 막으며 갈라놓았다. 현재 옛
감리서 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풍만한 몸매의 세 명의 나체 연인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아파트 상가에 입주한 불가마
사우나에서 세운 듯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터에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끌어내 볼기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아파트 바로 옆에 자유공원과 신포동을 이어주는 언덕길이 나있다. 적당히 경사진 산자락에는 이국풍의 예배당과 세월을 품은 주택들이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감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도심의 언덕길이라고 얘기한다면 ‘인천애(愛)’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핀잔 들을까. 그림엽서에
담아도 모자람이 없다. 이 길을 경계로 왼쪽은 외국인 조차지, 오른쪽은 조선인 부락이었다.
이 길은 성공회 내동교회로 이어진다.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1956년 현재의 위치인 성누가병원 부지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내동교회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전몰장병을 추모하기위해 그 유가족들이 모금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기념성당이다. 50년대 말 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내동교회를 얘기하면서 의사 랜디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조선식 온돌이 있는 성누가병원을 열고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낙선시(樂善施·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병원이름을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 뜰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동교회 언덕길을 내려오면
붉은 서양식 주택이 하나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흔히 ‘내동 벽돌집’으로 부르는 유항렬 저택이다. 유항렬은 한국 최초의 도선사(導船士)이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선사 자격증을 땄다. 조선우선주식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한
바다 사나이다. 해방 후 일본인 도선사들이 모두 떠났을 때 구호물자를 실은 선박들을 홀로 인천항으로 안내했다.
그가 살던 이 주택은
223㎡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에 지어졌다. 건축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튼실하게 보인다. 벽돌아치와 굴뚝
등이 이국적인 모습을 풍긴다. 이 저택은 복도를 통해 각 실로 연결되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다다미를 깐 일본식 방과 목조 게단 등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테라스. 이 테라스는 남쪽으로 나지 않고 서쪽으로 향해 있다. 그 서쪽에는 팔미도가 있다. 그는 이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각도를 잡아도 팔미도가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바다가 멀어졌다.

안이 궁금해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다. 바로 옆의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집에 사람이 사나요?”, “오늘은 없을
거예요. 주말에 가끔 서울사람들이 와요.”
“누가 오는 건가요.”, “그 후손들이 오는 것 같아요.”
건축은 한번 세워지면 사람의
수명보다 긴 세월을 버티며 동네를 지킨다. 이제 그 누구도 테라스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를 바라보지 않지만 그 집은 언덕에 기댄 채 바다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인천항 갑문 친수 공간 한 편에는 한국도선사협회가 그를 기리며 세운 기념비가 있다. 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로 알려져 있다. 1922년 발간한 '인천내리교회역사'에는 내리교회가
정동장로교회보다 2년여 앞선 1885년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돼 있다.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7일 마침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하늘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었다.
얼마 전 내리교회 본당 바로 옆 비탈진 언덕에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 제물포웨슬리관이 복원되었다. 오랫동안 내리언덕의 풍광에 한몫했던 옛 내리교회 예배당이다. 각종 역사 관련 책자에서
내리교회를 얘기할 때 마다 등장했던 사진 덕분에 눈에 익숙하다. 이전의 교회를 허물고 선교사의 도움 없이 1950년대 초 순수하게 내리교인의
헌금으로 봉헌한 성전이었다. 그동안 설계도면이 없어 복원에 애를 먹었는데 미국 뉴저지연합감리교에 소장돼 있는 도면을 발견해 다시 짓게 되었다.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을 연 교회다. 그 현장이 교회 아래쪽에 있다. 돈비어천가 음식점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그 부근에 ‘동서개발회사’라는 간판을 단 하와이 이민사업 대행사가 있었다. 회사 대표는 미국인 데쉴러였다. 그는 전국의 큰 도시와 항구에 이민
모집 방(榜)을 붙였다. 
‘기후는 온화하여 심한 더위가 없음으로 각인(各人)의 기질에 합당하며 월급은 미국 돈으로 15원,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함.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주가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그러나 희망자는 거의 없었다. 다급해진 사업 대행자 데쉴러는 내리교회의 존스(趙元時) 목사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존스
목사는 곧바로 내리교회 신도와 인천항 부두 노동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수는 121명이었다. 이중 50여명은 기독교 신자였고 나머지는
부두노동자, 농민, 그리고 군에서 퇴직한 하사관들이었다. 출신지별로 보면, 제물포(인천) 67명, 부평 10명, 강화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등이었다. 오늘날의 인천 관내 지역에 사는 사람이 86명이었다.
이민선이 떠나는 날 제물포부두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불어 전송 나온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이민 사무를 맡아보던 조선정부 기관 수민원(綬民院) 총재 민영환도 경인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와 그들을
전송했다. 희망을 안고 떠나는 이민이었지만 첫 이민선이 떠난 제물포 항은 슬픔 그 자체였다. 그때 항구에는 3개의 바다가 생겼다고 한다. 땅에서
환송하는 사람들의 눈물바다, 또 하나는 배 위 사람들의 울음바다, 그리고 제물포항의 통곡바다였다.

그들은 이틀간의 항해 끝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1차 신체검사를 받은 후 104명(통역관 2명 포함)만이 갤릭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3주 만인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항 외곽 샌드아일랜드에 닿았다. 상륙하기 전 또 한 차례 신체검사가 있었다. 호놀룰루 보건위생관이 나와서
정밀검사를 한 끝에 4명의 안질 환자를 골라냈다. 그들은 결국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한 채 왔던 길을 거슬러 귀국했다. 동서개발회사에서 처음
접수할 때부터 눈에 붉은 기운만 돌아도 불합격시킬 만큼 신체검사는 엄격했다. 끝내 24명이 중도에서 탈락하고 97명만이 호놀룰루에 발을
내디뎠다. 이처럼 신체검사가 까다로웠던 것은 바로 그 해 조선에서는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이다. 동서개발회사는 1903년부터 약 7천500여 명의 조선인을 하와이로 이주시켰다. 이 회사는 폐업하고 해방 후 여러 세대가 들어와 사는
집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그 자리에 인천예식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동서개발회사 윗길은 동인천과 신포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이 길을 통하면
용동마루턱에 있던 미락제과 앞으로 나오면서 큰길로 연결되었다. 이 길을 알고 있는 인천 토박이들은 동인천에서 신포동으로 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 이 골목에는 80년대 중반까지 토담벽을 한 초가집이 있을 만큼 변화가 더딘 동네였다.
내동에서 중앙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크라운볼링장이 나온다. 1968년 원래 미군 댄스홀이었던 곳을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로 문을 연 원조급 볼링장이다. 한때 이곳에서 볼 좀 굴려야
인천의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 학생시절 그곳이 궁금해 쪽문으로 훔쳐보았던 적이 있다. 자동화되기 전에 핀을 일일이 손으로 세웠던 핀보이들의
험상궂은 시선에 뒷걸음쳤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쪽문은 정문으로 정문은 쪽문으로 바꾸며 래인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 던지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 40년 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동네 풍경의 한 소재(素材) 역할을 하는 크라운볼링장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내동과 인접한 중앙동은 개항기에 신문물이 유입된 동네다. 이런 역사적은 배경은 이 동네에 이국적인 풍경의 조각들을 곳곳에 남겼다. 빨간색
벽돌창고와 적산가옥이 줄지어 있는 등 현재의 주거와 상업 등 일상의 풍경이 혼재되어 있다.
지난 2009년 100년 세월을 담은 창고와
사무실 등이 예술창작공간으로 트랜스폼 되었다. 대한통운 창고 등 인천항 하역물품을 보관하던 옛 창고를 비롯해 1930~40년대에 건설된
삼우인쇄소, 피카소 작업실, 영광수퍼, 대진상사, 양문교회 건물 등을 리모델링 해 하나의 회랑으로 연결했다. 허물지 않고 재활용한 네 채의 벽돌
건물과 새로 지어진 붉은 벽돌조의 건물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간이 공간을, 공간이 시간을 연결하며
창작스튜디오, 공방, 자료관,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시간차를 오히려 즐기며 일본식
적산가옥과 서양식 건물의 부조화를 일부러 티내며 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아트플랫폼 자료관으로 쓰임새가 바뀌게 된 인천우선회사(시
등록문화재 248호)는 건물이 지닌 시간성의 발견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리모델링 작업 중 이 건물이 국내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사무소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전까지 등기부등본상으로는 건축시기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아트플랫폼 보수공사 도중 건물 내 트러스의
왕대공에 설치되어 있던 상량판이 발견되었다. 상량판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건축연대가 1888년 9월에서 12월 사이로 추정된다. 

아트플랫폼은 인천 예술 문화의 자양분이 이미 충분히 스며있는 곳이다. 윗길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후에 중화루 자리),
그 건너편에 있던 이태호텔, 청요리쯤 먹어봤던 사람들이 꼭 거론하는 송죽루, 그리고 그 뒤로는 청관 거리(차이나타운)와 조선제일은행 건물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거리가 펼쳐진다.



아트플랫폼 인근, 80년의 시간을 보존한 건물 하나가 최근 살짝 ‘성형’을 했다. 관동1가의 카페 ‘팟알(pot_R)’은 1933년에
지어진 근대 일본의 점포겸용주택 ‘마치야(町家)’ 양식의 건물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중정(中庭)이 있고 정원 옆에는
작은 살림집이 들어서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역회사였다.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2·3층의 다다미방에선 1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며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배를 기다렸다.
‘팟알’이 들어서기 전 까지 살던 전 주인은 이 적산가옥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역회사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고 해방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장에게 이 집을 물려 받았다. 77년간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바뀐 적 없는 고집스런 주인은 이 집을 거의 건들이지 않고 2대에 걸쳐 살아왔다. 3층의 기울어진 벽에는 1920년대 요미우리신문, 1900년대
일본벽지, 포스터 등이 붙어있고 일본어 낙서가 가득했다. 이중 삼중으로 덧바른 벽지가 보물 창고였다.
이 건물은 한 때 창대건강원으로
운영되다가 이후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1층은 카페로 운영되고 2,3층은 전형적인 일본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소모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발걸음을 신포동 쪽으로 향한다. 한때 ‘인천의 명동’으로 불렸던 이 동네에 ‘화선장’이란 고급 음식점이 있었다. 이 음식점은 연합군 포로의
탈출과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 하나를 품고 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체스터 존슨 소령은 1942년 여름 필리핀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근 3년 동안 남양군도의 여러 섬으로 끌려 다니다가 현재의 인천신광초교 터에 있던 외국인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제 2부두
축조 공사장과 지하도 공사장으로 끌려 다니며 많은 혹사를 당했다. 일본된장과 무우말랭이를 밥에 넣어 쑨 죽을 먹으며 힘겹게 지냈다. 여름 어느날
강제노동에 끌려 나가던 그는 동료 세 사람과 함께 탈출했다.
골목골목으로 숨이 차도록 2㎞나 달려 도망쳤다. 그런데 지리를 전혀 몰랐던
그들이 한나절 빙빙 돌다가 간 곳은 시내 한복판, 지금의 신포동이었다. 하필이면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음식점 ‘성금(成金)’ 앞이었다. 피곤함과
굶주림에 앞길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조건 이 음식점으로 뛰어 들어가 손짓 발짓으로 ‘헝그리(배고프다)’를 연발했다. 마침 그를 본 사람은 조선인
종업원 김진원이었다. 그는 후에 적산상점 성금을 인수해 화선장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다. 김씨는 재빨리 그들을 구석방에 숨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들은 밥을 얻어먹은 후 목욕탕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이후 해방이 되고 미7사단의 상륙으로 존슨 소령은
인천포로수용소에서 구출되었다. 20여년이 흐른 후 그는 주한 미군 사단장(소장)으로 부임했다. 존슨 7사단장은 김진원 씨를 찾았고 둘은
감격적으로 상봉했다. 화선장은 이후 승승장구하는 고급음식점으로 발전했다.



옛 화선장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신포공영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 오면 오페라의 음률이 귓가에 맴돈다. ‘나비부인(Madam
Butterfly)’는 푸치니가 작곡한 2막 3장의 오페라이다. 일본의 기녀 나비부인이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턴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비극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의 딸이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능대학 손장원
교수는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야마무라 쓰루의 딸 글로버 하나가 인천으로 시집와 살다가 외국인묘지에 묻혔다고 밝혔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글로버는 1861년 24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글로버상회를 설립해 선박과 무기를 판매한 무역상이었다. 그가 일본에 팔았던 선박 중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건너 온 ‘운요오호’도 있었다.
토마스 글로버는 일본에서 사업하며 이혼녀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한다. 그녀는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해 ‘나비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마무라는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나비부인과 달리
실제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둘 사이에 1남 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이다. 글로버 하나는 나가사키에서 영국인 월터 베넷와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 베넷은 인천으로 건너와 베넷상사(광창양행)를 설립해 사업을 벌였다. 그 자리가 바로 현재 신포공영주차장 터이다. 이곳
사택에서 글로버 하나와 신접살림을 차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현 파라다이스 호텔 터)에서도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193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해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 그때, 이곳 전동


대불호텔
1888년에 건축한 호텔로 객실 수는 총 11개에 불과했으나 개항기 외국인이
자주 이용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건립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1888년 호리리키 다로가 벽돌 건물로 지었다는 설과
아펜젤러가 1885년 제물포를 방문했을 당시 대불호텔에 묵었다는 비망록 기록을 근거로 신축되기 이전에 일본식풍의 대불호텔이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개점 이후 성황을 누렸지만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업에 타격을 받게 됐다. 중국인에게 매도되어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사용되다가 1978년에 철거되어 현재는 빈 터만 남아 있다.

세창양행
1884년 독일 본사에서 인천으로 파견된 칼 볼터는 현재 중앙프라자(마사회)
상가 자리에 세창양행 사옥을 세웠다. 세창양행은 해운사업, 근대기기 도입, 광산 채굴, 무기 판매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조선 정부에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이를 빌미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세창양행은 1914년 일본의 대독 선전포고 이후, 최소 인력만을 남긴 채 조선에서 철수했다. 사옥은 6.25 전쟁 때 소실됐다.
세창양행이 사용했던 창고들은 아직 남아있다. 

군회조점
아트플랫폼의 건물로 사용된 군회조점은 코오리킨자부로라는 일본인이 세운
1900년대 초 사무건축이다. 본격적인 리모델링이 시작되기 전까지 언제 지어진 건물인지 알 수 없었으나 건물 지붕 속에서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돼 1902년에 세워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리모델링 된 모습은 원래 모습이기보다
1960년대 주출입구 부분을 증축해 완전히 변형된 모습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타운센드정미소
1892년 설립한 타운센드정미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스팀 동력을 이용한
근대식 시설을 갖춘 정미소다. 정미소는 전 인천경찰서 아래 터에, 사무실은 현 크라운볼링장 자리에 있었다. 이 정미소에서 생산한 쌀은 그 품질이
좋아 일본과 연해주의 특등 수출품이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미소를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지배인이 전 부통령
장면 박사의 아버지 장기빈 씨였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정미소는 1924년 유군성이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정미소가 최초로 엥겔식 정미기
3대, 중앙식 2대를 갖추었다. 남녀 70명의 직공이 하루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

한진그룹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1945년 중구 해안동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트럭 한 대를 갖고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상호였던 ‘한진(韓進)’은 ‘한민족의 전진’을 줄인 말로 한국의 진보를 꿈꾼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한진상사는 1950년에 종업원 40여 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 그동안 이룩한 것을 모두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1953년 다시 인천에 돌아와 회사 재건에 힘을 쏟았고 이후 육해공 분야에 독보적인 회사가 되었다. 한진이 처음 창업한
곳은 인천일보 윤전실 옆 건물과 길 건너 옛 인일철공소 자리로 추정된다.

신포시장
신포시장은 인천 상설시장의 역사 한 페이지를 꿰차고 있다. 옛 1902년 옛
신포마켓 자리에 인천 수산업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흥택이 근해 어업자들의 어획물을 사들여 상설 어시장을 개설했다. 어시장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히는 숭어, 민어, 농어 등을 파는 생선전이 들어서 있었다. 어시장보다 뒤늦게 등장한 것이 푸성귀 농산물시장이었다. 바로 지금의 신포시장이다.
이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청국인이 개설했다. 생선류를 파는 어시장인 제1시장은 1929년 12월에, 청과류를 다루는 농산물 제2시장은
1933년 7월에 각각 신포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경영에 들어갔는데 제1시장은 벽돌 단층 1동에 28구획, 제2시장은 목조 단층
1동 31구획 규모였다.

신포우리만두

신포 우리만두는 1971년 송현시장 3평짜리 분식집에서 출발했다. 테이블 2개를 놓고
호떡·순대와 함께 연탄 화덕에 솥을 걸고 만두를 쪄 팔았다. 1977년 신포시장으로 이전해 작은 만두전문점을 열었다. 무우말랭이와 돼지고기가
섞인 만두 소가 큰 인기를 끌었다. 주 메뉴는 만두와 함께 쫄면이었다. ‘쫄면’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인현동 '맛나당' 분식점 주방장이
면이 쫄깃쫄깃하다 해서 불렀다는 게 정설이다. 신포우리만두는 초기에 가족 중심으로 체인점으로 운영하다가 후에 프랜차이즈로 발전해 미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금파

현재의 신포동과 신생동의 경계이자 5거리에 위치한 모밀전문점 ‘청실홍실’ 터에 있었던
카페 건물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유행과 함께 서양에서 들어 온 카페에서는 간단한 서양요리와 커피, 맥주와 양주 등을 판매했고 요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여종업원과 술을 마실 수 있었던 탓에 성황을 이뤘다.

일선해운

1925년 창립한 일선해운(日鮮海運)은 군산, 목포, 진남포에 출장소를
두고 해륙운송·중개·대리업 외 금광 채굴업 등을 경영했다. 사옥은 장식주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결합된 건축물로 초기에는 일본식
3층이었으나 1932년 4층으로 신축되었다. 1층은 거친돌로 마감되어 신축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 출입구의 아치 장식이 인상적이다.
인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4층 규모의 근대 건축물로 현재 (주)선광의 소유이다.

아침바다

이 건물은 1942년에 신축되었다. 일부 1932년경 신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와야 철물점을 운영하던 가와바타가 세운 창고로 외벽이 붉은 벽돌로 돼 있다. 1954년 민간에 불하돼 한동안 설계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최근까지 '아침바다'라는 레스토랑이 운영되었다가 현재는 장기간 휴업 중에 있다. 마름모꼴 창문 좌우에 철제 덧문을 부착한 것이 이채롭다. 


표관
1909년 건물을 신축하여 개업한
상설영화관이다. 주로 일본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하던 객석 수 797개의 극장으로 현재의 외환은행 터다. 해방 후 미군이 ‘Sea Horse
Theater'로 사용했으며, 미군 철수 후 시립문화관으로 개칭하여 인천시가 직영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이 자리에
키네마극장이 세워졌다가 현재는 외환은행이 들어서 있다. 

일본
제1은행
인천에 개설된 일본 제1은행은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으나 189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된다.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가 개설된다. 이 은행에서는 각국 상인들에 대한 대출과 환전 등이 이뤄졌으며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납부하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발행한 은행권은 상인들 사이에서 화폐처럼 통용됐다. 한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3개월 뒤인 1882년 8월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는다. 그 자리는 일본 제1은행 자리로 일본은 이곳에 천막을 치고 군영을 설치했다. 현재는 개항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제18은행
일본 제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877년 9월에 제 18국립은행으로 세운 은행이다. 인천지점은 1890년 10월에 설치된 것으로
일본 제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었다. 이후 약 47년간 영업하다가 1936년에 인천, 서울, 부산지점 등 9개의 지점을
조선식산은행으로 양도하였다. 1954년 10월 1일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카페, 중고가구
도매상으로 사용되다가 2006년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개관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은 원래 이 은행의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일본58은행
58은행의 인천지점은
인천전환국에서 주조한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개설됐다.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이 은행은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 대금
결제와 무역금융에도 주력했다. 해방 후에는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천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지붕이 이중으로 경사를 이룬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2층의 발코니가 인상적이다.

중화루

1907년 세워진 이 건물은 1919년부터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이
사용한다. 1911년 당시 이 일대에는 요리집이 36개소, 기생과 기예를 둔 집이 10여개가 있을 만큼 유흥가이자 금융 중심가였다. 식산은행은
1925년 해안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했고 그 이후 합자회사 아끼다상회, 일화루, 군영각 등의 음식점, 카페 등으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
후 해군헌병대가 사용한다. 해군헌병대가 철수하고 나서 한동안 빈 건물로 있다가 1985년경 선린동의 공화춘 주인 아들이 이곳에 ‘중화루’라는
중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인천정미소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인천정미소는 1889년 3월에 설립되었다. 당시의
풍경은 기선이 제물포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길이 닿는 것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인천항의 산언덕 아니면 맹렬하게 검은 연기를 공중에 뿜어내는
인천정미소의 굴뚝이었다고 한다. 인천정미소는 여러 대의 증기기관을 갖추고 밤낮 없이 작업을 하였으며, 개업 이후 정미한 쌀이 수 만석을 넘었다.
현재 현존하는 것은 굴뚝과 부속 건물이다. 현재 부속건물은 개인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우재(尙友齋)

대지 140평의 이 집은 1930년대 일본인 도립병원장이 지어서 살았고
6·25전쟁 직후 미군 고위 장교가 한동안 살았다. 문고리, 현관문, 창문모양, 복도 등 집 구조는 기본적으로 일본식이지만 미국인, 한국인 등
거주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거실에 벽난로를 설치했고, 방문은 일본식 미닫이에서 서양식으로 바뀌었으며 방바닥은 한국식 온돌을 깔았다. 한미일
퓨전식 주택이다. 리모델링 중 천장에서 미군 장교가 넣어둔 듯한 임진강 유역의 군사지도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이 집은 2012년에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