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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 신흥동

읽을거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4-21 11:47
조회
610
골목,
살아(사라)지다

피고
지고 또 피고… 그렇게 꽃처럼 흘러간다


신흥동

한때
일본 동네였던 신흥동 골목을 걷다보면 국치(國恥)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동네는 사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이 지킨다. 그들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남아있는 거리와 가옥에서 불현듯 일본인의 탐심과 욕정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신흥동에 수인선의 종착역을 만들고 수탈의 철길을
깔았다. 그 길을 따라 조선인의 울분과 탄식이 실려 왔다.



신흥동(新興洞)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이전의 동네 이미지를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도 담겨져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광복 당시 곳곳에는 적산(敵産)가옥 등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미소 쌀 창고였다. 옛 도립병원(현
보건환경연구원)과 수인역 인근에는 가등(加藤)정미소, 역무(力武)정미소 등 크고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에서 정미한 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의 기찻길을 창고 안까지 연결시켰다. 현재의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 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들은 한동안
사동 삼거리부터 수인역까지 어깨를 겹치듯 줄지어 있었다. 고려정미소, 선경창고 등으로 불리다가 70년대 들어서 하나둘씩 디스코텍과 카바레 등으로
‘용도변경’ 되었다. 인근에 민가도 없을 뿐 아니라 천장 높게 두꺼운 벽돌로 지어져 간단히 손을 보면 훌륭한 댄스홀이 되었다.
이제는
이마저도 거의 다 없어졌다. 대형마트, 가전양판점,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서너 동의 창고만이 옛 흔적을 초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쪽의 고층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파트에 둘러싸인 창고가 손바닥 만하게 보였다.
한때 쌀가마니가 가득했을 빛바랜 물류창고 한군데를 들어가
보았다. 옛 모습 그대로 삼각 구조를 한 여러 개의 나무가 천장을 지지하고 있다.
“너무 낡아 가끔 떨어지기도 해서 몇 개는 새것으로
지지대를 만들었지만 벽은 아주 단단해서 사용하는데 별 문제없습니다.”
창고 주인은 이 창고가 80년 정도의 풍상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창고 거리 부근에는 없어진 창고 한면을 담벼락 삼아 살고 있는 집들도 종종 눈에 띤다. 신흥동 창고거리는 붉은 벽돌에 말라
비틀어져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퇴락하고 있다.        



창고 뒤편으로 가면 곳곳에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집들로 해방되면서 적산가옥으로 등재되었다. 적산(敵産)가옥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으로 일본인들이 남겨 놓고 간 집들이다. 살던 집까지 짊어지고 갈 수없어서 남겨진 주인 없는 집이었다. 해방 후 서로
차지하겠다고 쟁탈전을 벌이자 국가에서 민간에게 불하했다.
“6.25전쟁 때 이 동네는 답동성당 때문에 살아남았지. 맥아더가 십자가 달린
큰 성당 부근 쪽으로는 함포 사격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왜놈들이 자손만대로 살 작정을 했는지 집을 튼튼하게 지어서 크게 손질하지 않고도
살아왔는데 이젠 슬슬 그 끝이 보여.”
몇 가구로 쪼개져 있던 나가야(長屋)식 일본집을 터서 구멍가게를 낸 주인장의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신흥동은 개발의 바람이 비껴나가 일본인들이 남긴 잔재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 가게에서 신흥동 로터리
방향으로 가면 역사책 사진에서나 보았을 것 같은 집 한 채가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먼지를 만만치 않게 뒤집어 쓴 왜식풍 이층집이다. 외벽을
둘러싼 널판지들은 원래 저렇게 시커멓지 않았으리라. 집에 대한 내력을 알고 싶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신 뒷집을 방문했다.

“우리집도 예전에 산파가 살았던 집으로 40년이 넘었는데 저 집은 처음 이사왔을 때 봤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족히 7, 80년은 되지
않았을까.”
저녁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그 집의 주인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 집에 아직도 다다미가 깔려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못내 아쉬웠다.





큰길을 건너 돌층계를 오르면 해광사란 절이 있다. 도심에서 만나기 드문 한적한 사찰이다. 원래 해광사는 1910년에 일본인이 지은 화엄사
절이었다. 그 흔적이 절 입구 돌기둥에 희미하게 새겨져있다. 1994년에 왜색풍의 절을 헐고 대웅전을 다시 지었다. 대웅전 뒷쪽과 옆쪽에는
오래된 벽돌집 두 채가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뒤쪽 건물 시왕전이다. 문을 열어젖히니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바깥 공기를
가른다. 이 건물은 슬픈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는 6.25전쟁 전몰장병들의 유해 40~50기가 모셔져 있다. 얼마 전까지 지하에
있던 것을 1층으로 옮겼다.
“아마 6.25 전쟁 중에 전사한 경기도 출신 장병들을 이리 모신 것 같아요. 유해들은 하나같이 이름은 없고
그냥 김일병, 박이병… 그런 식으로 표시해서 찾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한동안 인천시 차원에서 위령제도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다 잊혀진
거죠.” 황진스님의 설명이다.
6.25전쟁 때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해광사에 오금 저리게 한 정치보위부를 설치하고 민족진영계열 인사,
군경 등 우익계 인물을 닥치는 대로 체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잠시 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해광사는 당시
인천의 육해공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이곳에는 일본인 위패들도 있었다. 패전하면서 서둘러 가느라 미처 챙겨가지
못한 것들이다. 한일수교 후 후손들이 다 찾아갔고 현재는 1기만 남았다고 한다. 그 남은 1기의 후손은 정기적으로 제를 지내러 이곳에 온다고
한다. 한동안 일본왕의 위패도 있었는데 누군가 후미진 곳에 처박아 두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아직도 신흥동 한구석에는
일본인의 망령과 국군의 영령이 혼재돼 떠다니는 듯했다.
해광사에 오르는 계단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 공장이 있었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1905년 일본인이 창업한 인천탄산수제조소가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기를 사용해 사이다를 생산했다’고 전한다. 그 자리에는 현재
‘동인당’이라는 옛 물건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있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사이다병 뚜껑 만드는 부업을 많이 했다. 후에 같은 동네에 ‘라무네
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이 생겼다. ‘라무네’는 물에 설탕과 포도당, 라임향 등을 첨가해 만든 달콤한 탄산음료로 일본인들이 즐겨 마셨다.

해방이 되자 인천탄산수제조소는 (주)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다’라는 이름의 사이다를 생산했고 이는 훗날 칠성사이다로
이어진다. 1960년대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 씨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일명 ‘사이다송’을
불렀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둥둥 떠다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인 듯 하다.



신흥초등학교는 1884년 4월 아사히(旭) 소학교로 문을 열었다. 광복 때 까지 대부분의 학생이 일본인이었다. 그 잔재를 찾기 위해
교정으로 나섰다. 옛날에 운동장 한편에 큰 방공호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다. 본관 로비에 전시된 역대 교장 사진에도 일본인
교장은 없고 해방 후 한국인들의 사진만 걸려 있다.
그런데 흔적 하나가 본관 바로 앞 정원 한편에 놓여 있었다. 회색으로 칠해진
포탄3발이 안내판과 함께 전시돼 있다. 1904년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 수세에 몰리다 자폭한 러시아함대에서 수거한 포탄이다.
일제는 처음에 이 포탄을 인천부청(현 중구청) 마당에 전시했다가 이 학교로 옮겨 놓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러일전쟁의 승전을 선전하기 위해서다.

일본인들의 흔적이 또 하나 있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 동산에 일본인들의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있다. 3단 층계로 마련된
곳에 비석은 없고 30여개의 얕은 기단 흔적만 있다. 누구의 비석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옆에 있던 일본절 동본원사에 있던 비석을
모아놓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 인천가족공원(부평공동묘지) 한편에 일본인 비석들이 한데 모아져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있던 비석과
연관이 있는 지 궁금하다.



부도유곽
1953년부터
상설시장이 된 신흥시장은 한때 인천에서도 잘 나가던 재래시장으로 손꼽혔다. 부두 길목에 위치해 있고 시장 앞에 시립병원이 있었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현재는 시장 골목도 수십 미터에 불과하고 점포들도 60여개의 불과 할 만큼 상권이 예전만 못하다.
이 시장 일대는 1903년
‘화개동(花開洞)’이란 이름을 얻는다. 꽃이 피는 동네.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다. 공창(公娼)제도를 인정한 일제는 이곳을 유곽(遊廓)
지역으로 만들고 그들의 욕정을 배출했다. 당시 40군데 업소에 매춘부 130여명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개동은 꽃 화(花)자는 그대로 품에
안은 채 1914년 선화동(仙花洞)으로 개명된다.
미 군정기에 유곽은 폐쇄된다. 1948년 2월 공창 폐지를 앞두고 경기도 보건후생국는
인천 유곽 22호에 있는 180명의 창부에 대해 차후의 희망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공장취업 40명, 화류계 종사 32명, 출가 12명,
자기 집 귀가 12명, 그리고 미정 23명으로 조사된다. 이중 성병에 감염된 화류병자 80명을 도립병원 인천화류병 치료소에 1개월간 강제로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한다. 이를 위해 입원비 389,500원(식대 포함)와 교화비 224,000원의 예산을 책정한다. 인천부는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열고 이들이 가정주부로 갱생할 수 있도록 단기 교화강습을 시키고 유곽은 전부 여관, 음식점, 카페, 당구장 등으로 전업시킬
방침을 세운다.
유곽은 폐쇄되었지만 한번 핀 꽃은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1960년대 신흥동 일대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 술판을 벌이는
니나노집부터 방석집, 기생 요릿집, 창녀집에 이르는 거대한 환락가였다. 이후 이 홍등가는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고 ‘꽃’들은 인근 독갑다리,
학익동, 옐로우하우스 쪽으로 옮겨 다시 피게 된다.
신흥동 한쪽에서는 얼마 전부터 다른 종류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무역’이란 꽃이
만개하고 있다. 중국을 오고가는 출입구 제2국제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50여개의 소규모 무역업체들이 문을 연 것이다. 1994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처음엔 보따리 무역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언제부턴가 소규모 무역업체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따리상 출신의 개인무역업체부터 서울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에 이르기 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이 취급하는 물건도 농산물부터 기계부품에 이르기 까지 각양각색이다. 길가의 허름한 집들이
무역간판을 달고 물류차량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무역업에 종사하는 중국동포 등이 이 동네 거주하면서 신흥동 골목의 모습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
신흥동의 꽃은 그렇게 피었다 지고 다시 피어나고 있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열차의 끝을 보면 슬프다. 내 사람, 내 물건을 싣고 가는 것도 아닌데 아득한 곳으로 기차를 떠나보내고 나면 공허함이
몰려온다. 신흥동 수인역에 가면 마치 등 굽은 노인네 같은 노쇠한 철길 때문에 슬프다. 수인역은 도심 후미진 곳에 물러나 있다. 아파트에 가려져
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어 이제 그 존재감은 없다. 역 이름도 희미해지고 역사(驛舍)는 아예 사라졌지만 아직 철길은 살아있다.
철길 따라 사람들도 살아있다.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으로 철길과 마을이 사이좋게 공존하며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수인역은 수원과 인천역을
오가던 수인선의 한 정거장이었다. 1948년에 세워진 옛 역사(驛舍)는 곡물시장 인근 지금의 화물주차장에 있었다. 요즘은 흔히 수인역하면
신광초등학교와 CJ 인천공장 사이를 말한다.
기찻길은 마치 골목길처럼 나있다. 집들 사이로 난 철로를 보고 있노라면 기차가 먼저 길을
냈는지 마을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1937년 협궤열차 수인선이 건설되었고 철로는 정미소가 있던 수인역에 닿았다. 기차가 서는
곳에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검은 연기 내뿜으며 달려온 기차는 역에 가까이 왔다고 ‘왝왝’ 거리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수원, 군자, 소래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이 키운 닭이며 각종 곡식을 이고 지고하며 수인역에 내려놓았다. 금방 큰 장이
서고 거래로 왁자지껄 소란해졌다. 장이 서는 동안 열차 맨 앞 기관차는 거대한 회전기를 이용해 다시 수원 방향으로 놓여진다. 그렇게 수인역은
번창했다.
1979년 종착역이 송도로 변하면서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제 수인역은 젊은 택시기사들은 그 위치를 잘 모를 정도로 도시의
뒷무대로 한발짝 물러 앉아있다. 얼마 전까지 농산물 대신 포항에서 실은 철강 코일과 강원도에서 실은 시멘트와 석탄을 채운 화물차만이 하루에
10여 차례 지나갔다. 수인역 마을에서 철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측으로 가면 인천역, 좌측으로 달리면 부두행이다. S자로 휜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의 모양이 마치 구렁이 같았다. 이것도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올 초부터 기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가게의 간판과 지붕
처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동네 한 가운데로 들어 왔던 시커먼 열차는 이제 없어진 그림이 되었다. 건널목 간수의 요란한 호각 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예전에 이 부근에서는 다른 호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 남부역은 입영열차 정거장이었다. 70년대 말까지 수많은
‘청춘’들은 이곳에서 출발하는 논산훈련소행 입영열차에 몸을 실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집결한 장정들은 숭의로터리를 지나 이곳으로 이동했다.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눈물을 흘리느라 미처 열차에 몸을 싣지 못하자 호송관들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덜컹, 기차는 긴
기적을 한 번 울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주인선으로 접어드는 순간 호송관들의 살벌한 고함소리와 동시에 열차 안은 금방 군기 바짝 든
훈련소로 변했다.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차 때문에 생긴 시장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사람들도 남아 있다. 곡물상과 고추집 그리고 기름 짜는 집 등
40여개의 점포가 신광초교 담벼락에 기대어 ‘수인곡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의 한별아파트 자리에는 인천 최대의
농산물 깡시장이 있었고 이후 김치공장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개장하는 등 농산물과 관련된 시장이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는 연백상회, 개풍상회,
충남상회 등 고향을 가게 간판으로 내건 곡물점이 주를 이르고 있다.   
“예전만 못해. 대형마트 때문이야. 그냥 심심하니까 가게 문을
열고 있는 거지.”
충북 영동에서 올라와 한 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 흥진상회 이영주 (81) 할아버지는 “곡물이란 이름
붙은 곡식은 다 있고 다른데 보다 30% 정도는 싸다”고 설명하며 연신 소리쳐 참새떼를 쫓는다.
그나마 기름집들의 사정은 좀 나은
듯하다. 그것은 냄새로도 알 수 있다. 수인역 인근에 가면 하루 종일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90년대 말 기름집 전성시대에는 기름집 옆에 있던
어느 약국도 한켠에서 기름을 짤 정도였다. 약 조제하던 손으로 기름을 제조했던 것이다. 조제하다 제조하고 다시 제조하다가 조제하고. 소문을 들은
약사회에서 현장에 나와 그 약사에게 약을 팔 건지, 기름 장사를 할 건지 선택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있다.
만수기름집,
대영기름집 등 40년 넘게 오래된 기름 가게들은 이제 대를 이어 기름을 짜고 있다. 부모의 손길로 모서리가 닳아버린 되박, 깔대기, 함지박 등
기름 짜는 도구들을 아들이 이어 받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세월이 흘러도 옛맛 그대로 고소한 맛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인역 시장 역사의
한 귀퉁이 차지하고 있는 가게가 또 한군데 있다. 50년 넘게 국수를 말아 온 골목국수집이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버거운 좁디좁은 골목에서
시작한 이 가게는 시장 사람들과 부두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 주던 국수집이다. 장사가 잘 될 때는 밤에만 야식으로 100여 그릇씩 팔았다고 한다.

열차를 끌고 온 기관사가 잠시 기차를 세워놓고 이 집에서 요기를 해결할 정도였다. 이제는 골목에서 나와 기차길 바로 옆 2층 건물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할머니는 국수를 말고 할아버지는 철길 건너 시장통을 누비며 배달을 하셨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만 철도길 사람들을 위해 계속 국수를 말고 있다. 





일제
말 신광초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였다. 1942년 말레이반도 전투에서 잡힌 영국군 포로들을 비롯해 후에 미군 포로들이 이곳까지 끌려왔다. 일제는
서울, 부산, 인천, 흥남의 4군데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그 중 인천수용소의 규모가 가장 컸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는 수인역 인근, 현재의
신광초교 자리에 있었다. 왜 이곳에 자리 잡았을까. 신광초교에서 직선거리로 400여 미터 떨어진 인천여상에는 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이 있다. 바로 신사(神社)다. 그들은 신성한 신사를 보호하기 위해 포로수용소를 방패막으로 삼은 것이다. 
미군이 1944년 12월
항공 촬영한 사진을 보면 연합군 측은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일제가 노렸던 것처럼 아군 포로들의 피해를 우려해
수용소 일대에 폭격을 할 수 없었다. 일제는 연합군 포로들을 인간방패로 이용하여 신사와 전략 시설인 인천항 그리고 그들의 주거지인 신흥동을
동시에 보호했던 것이다.
연합국측은 포탄 대신 이곳에 포로로 잡힌 아군을 위해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수용소 밖으로 떨어진 물건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은 신기하고 값졌다. 주로 유곽의 아가씨들에게 팔기도 했으며 길거리에
내놓으면서 반짝 장이 서기도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시내 깡패들이 이 물건을 독차지하기위해 이곳으로 나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이
인천의 한 작은 마을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 그때,
이곳 신흥동 〉


신흥초등학교
일본인이 자신들의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인천에 세운 최초의 학교로
일제강점기 때 학교명은 인천공립고등소학교였다. 1883년에 동본원사 별원에서 아동을 교육한 것이 시초이다. 1896년에는 일본 인천영사관 구내에
있던 병원의 병실(1933년 당시의 인천부윤 관사 터)을 개조하여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학생수가 1,175명(조선인 17명 포함) 정도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6.25 전쟁 중 공산군은 인천지역 의용군을 이 학교로 강제 징집해 전선으로 보냈다.


신흥초교 앞길
이 도로는 신흥동 입구에서
담동사거리에 이르는 총 연장 300여 미터의 길로 원래 막혀있었다. 여러 차례 확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천주교와 오례당 소유의 토지가 속해 있어서
추진이 어려웠다. 양쪽으로부터 기부 신청을 받아 비로소 1914년 1월에 도로가 준공되었다. 이후 6미터 도로를 1978년 제 59회 전국체전을
맞아 현재와 같이 대폭 확장했다. 이 시기에  인천라이온스의 도움으로 신흥동 로터리도 건립했다.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내동 감리서에서
1910년 9월 화정 2정목(신흥동 2가)에 신청사 대지680평 건평104평 규모로 건립했다. 감리서는 감옥으로 사용했다. 1912년 4월
조선총독부가 재판소령을 개정한 결과 경성지방법원을 인천지청으로 개칭하고 관할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김포군, 강화군으로 확장했다. 1932년
재정 부담으로 폐청하고 등기소만 남겨 두었다. 1935년 옛 감리서 터에 신청사를 건축하고 이전했다. 항도실업학교가 있었고 현재는 이 자리에
중구노인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원예협동조합
김치공장
원예협동조합은 1966년 총 공사비 6천만원을 투입해 김치통조림 식품가공공장을 세웠다. 서독 및
일본의 최신형 기계시설로 갖춘 이 공장은 아스파라거스, 양송이, 김치 등 인천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예작물 일체를 식품 통조림화해 월 평균 48만
통을 생산했다. 동남아 시장과 파월장병에게 군납해 연간 120만불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신흥동 자전거 경기장
일제강점기 인천의 자전거 붐은 대단했다. 자전거 숫자도 크게
늘어 1924년 12월 인천경찰서는 부내 자전거 소지 실태를 파악해 관리했다. 25년 6월과 10월에는 인천조선매일신문사가 화정(花町·지금의
신흥동) 매립지에서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를, 26년 6월에는 인천자전거선수구락부가대회를 열었다. 29년 6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인천자전거점원구락부 주최로 인천 최초의 전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뤘다. 이렇듯 신흥동은 우리나라 자전거경주대회의 한 뿌리를 품고
있다.

동본원사

1885년 9월에 동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인의 주택을
전전하다가 1888년에 관동 1가 1번지에 80평 규모의 임시본당을 만들었다. 1892년까지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으로도 활동했다.
1899년 10월 현재의 신흥동 로얄답동맨션에 건물을 세워 이전했다. 동본원사 외에 현재의 송도중학교 교내에 서본원사도 있었다.


해광사

1908년 8월 29일에 준공된 일본 불교 사찰로 원래의 명칭은 화엄사이다. 화엄사
본전은 해광사 대웅전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고 현재의 명부전은 원래부터 있었다. 경내에 일본식 석물이 남아있고 정문 석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새겨진
글자가 써있다. 사찰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하부계단는 그 자리에 건물이 있던 것을 철거하고 계단을 새로 설치한
것이다. 6.25 전쟁 중 전사한 경기도 출신 60여 영령 유해를 축현역(동인천역)으로 들어와 해광사에 봉영했다. 


인천부윤 관사

신흥동 1가 19번지에 인천부윤이 사용했던 관사가 있다. 이 주택은 전형적인 일본풍의
건물로 1966년에 새로 인천시장 관사(현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신일반점
현재 우리나라 중국음식점 중 가장
고령 현역 주방장은 신흥동 신일반점의 임서약(林書若) 옹이다, 1931년 생으로 올해, 만으로 82세다. 중국 산둥(山東)성이 고향인 임 옹은
66년째 신흥동로터리 주변에서 청요리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신일반점의 뿌리는 현재의 자리 건너편에 있던 호떡집이었다. 호떡집을 중국집으로
바꾸고 ‘신흥동에서 제일 맛 좋은 음식점이 되자’는 소망을 담아 ‘신일반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78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0여 년전
까지 만해도 돌잔치나 약혼식을 치를 만큼 규모가 큰 연회석을 갖춘 음식점이었다.

평양옥
1945년 평양 순안 출신인 김석하 씨 부부가 신흥동 3가 18번지, 현재
자리에서 개업한 장국밥집이 그 기원이다. 개업 초기 광복 직후 부활된 경평전(京平戰) 축구시합에 출전하는 고향 선수들에게 냉면을 배달하기도
했다. 평양옥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출입. 박 대통령은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이따금 작업복에 모자를 눌러 쓴
채 들어와 자리에 앉곤 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대통령도 월미도 해역사령부를 순시하고 불시에 들어와 갈비와 냉면을 먹고 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