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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 산곡동

읽을거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6-05 09:47
조회
1106
골목,
살아(사라)지다

질곡의
외세풍風 돌고 돈 백마장


산곡동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위해 부평벌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만들고 매달 소총 4천 자루를 만드는 등 엄청난 무기를
생산해 냈다. 패전 후 그들이 떠난 그 자리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일대는 기지촌이 되었다. 철마산 밑에서 한가롭게 농사짓고 살던 백마장에도
왜색풍이 불다가 다시 양키문화가 불어 닥쳤다. 이제 한 세대가 지나갔지만 옛 조병창 땅은 아직 우리 품에 안기지 못했고 부평벌 곳곳에는 여전히
식민 통치와 미군 주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단(禁斷)의 땅에서는 ‘상상의 꽃’이 무럭무럭 자라기 마련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부평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미군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을 얘기할 때마다 귀를 쫑긋하게 하는 ‘테마’는 그 안에 인천항 까지
연결된 지하 터널과 거대한 보물 창고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있을까. 최근 그 ‘사실’에 대해 공식적인 증언자들이 나왔다. 2013년 9월
16일 부평미군부대 시민참여협의회는 인천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평 미군부대 안에 지하터널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미군기지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 이 모(67) 씨의 증언이다.
“예전에 부대에 근무했던 부친으로부터 땅굴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7년 전 부대 내 정문 옆 주차장
부근과 좌측 옛 빵공장 부지 등에서 땅굴 6곳을 발견했다. 당시 동쪽 기지 정문 근처에 있는 철문을 발견하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땅굴로 내려가는 길은 폭과 높이가 2미터 정도 됐으며 7m쯤 내려간 곳에 물이 가득 차있어 더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바닥엔 무기
수송을 위한 철도 레일이 깔려 있었다.”
땅굴과 관련해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대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소문은 나돌았다. 그
연못의 깊이가 시시때때로 달랐고 한다. 바다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썰물 때와 밀물 때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못에서 멱을 감다
실종되었는데 한참 후에 인천 앞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는 괴소문도 돌았다.
과거 부평미군기지에 근무했던 박 모(72) 씨는 기지 지하에
터널과 함께 백금 등 보물과 유물을 숨겨놓은 보물창고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실제로 1986년 4월 이 동네에서는
‘보물찾기’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군 병기제조공장이 있던 자리에서 청조·중화민국의 동(銅)화폐와 놋그릇 등 각종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말 포탄 등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제가 조선 전국은 물론 중국, 만주, 대만 등에서 강제로 공출해 간
동·철제품이 그곳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있던 공공기관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땅속에서 화폐 등이 쏟아져 나오자 인근 주민과
화폐수집가·고물상 등 하루 500여명이 몰려들어 ‘보물찾기’에 나섰다. 출토된 물건은 청조에서 통용되던 황동 동전과 중화민국 개국 기념화폐를
비롯해 칼, 놋그릇, 수저 등이 주류를 이뤘다. 드물게 우리나라의 상평통보와 청동불상 등도 나왔다. 많이 캔 사람은 혼자서 1천점 이상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보물창고’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아 1990년대 말 한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발굴 조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일제는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설립했다. 조병창(造兵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했던 조선 내의
대표적인 병기 공장이었다. 부평 조병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4천정, 총검 2만정, 소총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천정, 차량
200량 등에 달하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곳에서는 선박 250척, 무전기 200조, 심지어 잠수정 까지 만들어 냈다. 당시 이곳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들이 종사했다. 조병창에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해주는 특혜 때문에 이곳을 피난처로 삼고자 많은 외지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학생들의 사보타지로 인해 군수품 생산량이 급감하자 보성전문학교 폐교를 검토할
정도였다. 간혹 이곳에서 무기를 몰래 빼내 일본 요인의 암살기도와 임시정부에 공급하려 하기도 했다. ‘부평사’에 의하면 일제 말기에는 광복 후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채병덕 소좌가 이곳 책임자로 부임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미군이 이곳을 접수하자 모두 그 안이 궁금했다. 특히
창고에 저장돼 있는 물자의 양이 궁금했다. 1946년 1월 25일자 대중일보를 보자. “인천 공업인들이 1돈에 2천5백원을 줘도 입수하기 힘든
코크가 무려 5천돈이나 쌓여 있고 어떤 공장에서든지 필요한 스패너가 약 20 화차분이나 쌓여 있으며 철재를 비롯한 군수품이 산적해 있다.”  

실제로 당시 국내에서 1년에 3천 톤이면 충분한 고무 원료가 조병창에서 1만 톤이나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고무제품 가격이 급락했고 특히
고무신 값이 7, 80원 정도 ‘왕창’ 하락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병창 인근에 군수기지를 구축하기위해 5개의 일본인 토건하청업체를 참여시켰다. 이 중 간또오구미(關東組)라는 업체는 백마장 일대의
공사를 맡았고 근로보국대에 편성된 조선인들이 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근로자들을 위해 판자로 만든 집들이 길게 들어섰다. 지금의 산곡동 롯데마트
인근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관동조’라고 불렀다. 미군이 부평에 주둔하면서 관동조 동네는 양색시촌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후에 다시 미군이
떠나자 한국인을 상대하는 집창촌으로 변했다가 현재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롯데마트 길 건너 산곡1동에 들어서면 자로 잰 듯한 10여
개의 골목이 나온다. 골목길 입구에 서면 끝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골목길 기다랗다. 두부를 자른 것처럼 반듯한 골목에 똑같이 생긴 집들이
빈틈없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일제는 조병창과 조선베아링 등 군수기지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다섯 가지 표준형
주택을 설계했다. 이중 20~15평 규모의 갑(甲)형, 을(乙)형은 일본인들을 위한 단독주택이었고 10~6평의 병(丙)형 이하는 한국인을 위한
집단주택이었다. 집단주택은 말이 주택이지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산곡동의 주택은 신사택과 구사택으로 구분된다. 구사택은 벽돌로, 신사택은 블록으로
지어졌다. 특이한 점은 적게는 6개 많게는 12개의 집이 한통으로 연결된 기와지붕을 이고 살았다는 것이다. 건축비와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한
방편인 듯하다.
“이쪽 집에서 얘기하는 말소리가 저 끝집에도 다 들렸어요. 고양이하고 쥐들이 통으로 연결된 천장에서 운동장처럼 뛰어
놀았어요”
동네 골목에서 만난 주민의 설명이다. 좁고 긴 골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른 새벽 군복 같은 작업복에 각반을 찬 수많은
노동자들이 ‘벤또’를 하나씩 들고 군수공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산곡1동사무소 옥상에 올라가서 단지를 내려다보니 마치 틀로 찍어낸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끼고 있다. 그렇게 그 집들은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인천시는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품고 있는 이 주택단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60년대말 애스컴
전경


60년대 애스컴
주변거리
일제가 쫓겨난 후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조병창을 접수하고 남한 지역에 주둔한 미군들의 주요한 보급기지인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애스컴 주변에는 다양한 미군
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60년대 초 현재의 현대아파트 3단지 자리에 국내에서 제일 큰 121미군후송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시설과 의료진이
좋아 당시 유력 정치인들은 물론 대통령도 치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이 병원이 세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었다. 사건 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승무원들은 바로 이 121병원으로 후송돼 하루 동안 묵으며
검진을 받았다. 별 넷 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 별들이 사이드카와 소방차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고 외신기자와
국내기자의 취재 열기로 백마장 일대는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후방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은 헬리콥터로 날랐다.
지금의 한화아파트(조선베아링) 자리에 항공부대가 있었고 금호아파트와 한양아파트 사이 큰길 마장로에 활주로가 길게 놓였다. 하루 종일 헬리콥터와
프로펠러 경비행기들이 오르내렸다.
“신나는 구경거리였죠. 초등학교 때 지금의 명신여고 언덕에 올라가서 여러가지 모양의 비행기를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하곤 했습니다. 비행기 뜨는 것을 보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했습니다. 아직도 비행기 굉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백마장 토박이 정준택(56) 씨는 눈앞에 방금 인화한 사진을 펼쳐보이듯 지난 풍경을 그려낸다.



부평에 미군과 미제물건이
들어오면서 양키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백마장 골목에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들이 문을 열었고 주말이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 미군헌병들이 자주
순찰을 돌았지만 미군끼리, 미군과 한국인이 심심치 않게 싸움판을 벌이곤 했다. 가끔 기지촌 여성의 살인사건이 신문 귀퉁이를 장식하곤 했다.
급기야 부대 인근에 미군 형무소가 생기기도 했다. 미군형무소는 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고 이후 그 자리에 문화주택이 세워졌다.
골목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집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연합병원과 모자병원이 문을 열었는데 양색시들의 보건증 발급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철마산
아래에는 혼혈아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동네가 험하고 거칠어졌지만 미군 덕분에 돈은 잘 돌았다. 구멍가게에서도 달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백마장 경기는 좋았다. 특히 가구점과 양복점은 호황을 누렸다. 침대와 소파는 양색시들의 필수 구입품이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은 값싸고 솜씨 좋은 양복을 몇 벌 씩 맞춰갔다. 양색시들의 국제결혼과 미국 이주에 필요한 서류를 대행해주는 민간사무소들도 솔솔이 재미를
봤다. 시장 안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65년 시장 입구에 문을 연 백양당 아이스케키점은 여름철 하루에만 1만개 이상 아이스케키를 팔
정도였다.



화랑농장 개소식
장면

백마장 인근에는 버스정류소 이름으로 유명한
‘화랑농장’이 들어섰다. 이 농장은 상이용사들을 위해 1955년 3월 건립되었다. 거주자들을 위한 35평 대지에 18평 건평의 주택 120동
정도가 세워졌다. 일률적으로 빨간 벽돌에 파란 지붕을 얹은 집들이었다. 이곳은 ‘장끝말’이라는 마을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병창을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스무 남짓 가구의 원주민들을 내쫓으며 마을도 함께 사라졌다. 일반인의 통행을 엄금하면서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어
화랑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부평 토박이도 알 수 없었던 외진 곳이었다.
이곳을 1952년 무의탁 상이군인들이 양계를 하며 개척을 했고
한미재단의 건축자재 원조와 미 8057부대의 지원으로 ‘화랑농장’이란 간판을 달았다. 농장으로 시작했지만 후에 간장공장도 세워졌기 때문에 근처에
가면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에는 서울 중랑천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는 등 또 다른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부평은 한때
‘애스컴시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평 미군부대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62년 6월
17일에 재건된 외기노조 부평지부 조합원의 수가 3,166명(남 2,900명 여 266명)인 것을 감안하면 4천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코 사그라질 것 같지 않던 미군 경기는 70년대 들면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미군 철수가 현실이 되면서 급기야 1972년 12월 중순
부평 애스컴부대 한인종업원 416명은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백마장에서는 미군과 군속 그리고 양색시들의 그림자가 점점
사라졌다.






< 그때, 이곳 산곡동
>


다다구미

현재의 롯데백화점(옛 동아백화점) 앞 원통천 복개변 개울가 일대를 흔히 ‘다다구미’라고
불렀다. 조병창 공사 하청업체 다다구미(多田組)의 현장 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현장 사무소가 철수하면서 이곳은 빈터로 남아 있었다가
무허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마을 이름을 ‘평화촌’이라고 명명했는데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미쓰비시 사택

지금의 부평 2동 일대를 ‘홍중(히로나까)사택’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부평공원 자리에
홍중(弘中)이란 군수공장이 있었고 종업원 사택이 부평2동에 수십 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이후 히로나까 공장이 미쓰비시(三菱)로
바뀌면서 사택 이름도 ‘미쓰비시 사택’ 혹은 ‘삼능사택’으로 바뀌었다.        

백운주택
1970년을 전후해 경인철로를 따라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름을 ‘백운주택’이라 불렀다. 이 고개에 구름이 하얗게 끼면 비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서
‘백운(白雲)’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곳에 전철역이 생길 때 그 이름이 백운역이 되었다.     


부평시장
인천시가 1962년 6월 7일 북구
부평동 225번지 일대에 공설시장으로 개설한 것으로 ‘시장법’에 의한 최초의 시장이다. 1970년을 전후해 부평수출산업공단의 근로자들로 인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1년 공설시장에서 사설시장이 되면서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부평진흥자유시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주)부평자유시장은 1992년 해산되었으나 번영회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철마산 관통

인천과 부평을 잇는 폭 20m, 연장 6㎞의 철마산 관통 도로는
1969년 10월에 착공해 1972년 10월에 개통했다. 철마산이 개통되기 전에는 인천지역과 부평지역을 왕래하려면 경인국도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지만 인천과 부평은 분명 ‘심리적 거리’가 있었다. 도로의 개통으로 인천과 부평의 왕래가 15분가량 단축되었다.


부평경찰학교

광복 직후 미군정은 1945년 9월13일 종로구 세종로 미 대사관 자리에 오늘날의
경찰종합학교의 효시인 ‘경찰관 강습소’를 설립한다. 조선경찰학교, 국립경찰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8월 15일 국립경찰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경찰교육이 현 부평6동 부평성모병원 옆으로 이전하며 부평시대를 연 것은 경찰 창설 10년만인 1955년 3월27일이었다. 부평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경찰관 양성을 했으며 경찰대학은 1984년 경기도 용인으로. 중앙경찰학교는 1986년 충주로 이전했다. 일제말기에
박문여중학교(인천소화고등여학교)가 교사로 사용하다가 징발되기도 했다. 

원통이고개 전투

원통이 고개는 인천지하철 동수역에서 부평삼거리역에 이르는 길이다.
이곳은 인천상륙작전 후 실제적인 첫 대규모 교전이 일어난 곳이다. ‘부평사’에 의하면 인천상륙 3일째인 9월 17일 아침 6시경 북한군
보병부대와 인민군 전차 6대는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 쪽에서 인천 빙향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 위 산 속에 있는 미 해병대 진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듯 전차 위에서 식사를 하거나 떠들면서 웃으며 행군했다. 북한군의 마지막 전차가 원통이 고개를 직각으로 굽은 큰 길을 꺾어 돌려고
하는 순간 미군은 2,36인치 로켓포로 전차부대를 공격했다.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전차는 전부 파괴되었고 인민군 보병 250명 가운데
200명이 사살되었다. 순식간에 원통이 고개는 북한군의 피로 물들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