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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 도화동

읽을거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7-08 10:03
조회
849
골목,
살아(사라)지다

불도저
위해 세운 사학 왕국 이젠 그 흔적도 그립다


도화동

인천
어디에 가더라도 ‘마징가제트’의 머리는 보였다. 심지어 앞바다 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올 때 그 모습부터 서서히 다가왔다. 홍수환,
유명우, 장정구 등 한때 세계프로복싱 무대를 누볐던 우리의 챔피언들도 그 체육관의 특설 링에 올라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선인체육관은 하나의 건물에 그치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인천 풍경의 붙박이 ‘소재’였다.   






한순간에 무릎이 꺾였다. 그리곤 풀썩. 무너져 내리는 데는 5초면 충분했다. 40년 동안 언덕에 서서 인천을 굽어보던 맘모스
선인체육관이 먼지와 함께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인’과 관련 있는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어서 애증의 대상도 아닌데도 순간 울컥했다.
동시대를 살아 온 지기를 먼저 보내는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폭파하기 전 이미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건물
아랫부분을 흰 천으로 둘러싼 모습이 마침 염(殮)을 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주변을 맴돌면서 이별 시간을 기다렸다. 2013년 8월 3일 오후
7시 20분경. 그날따라 날씨는 보기 드물게 쾌청했고 마지막 저녁 해를 흠뻑 맞은 체육관의 실루엣은 유난히 선명했다.    
맞은편
청운대 옥상에서 참관하던 시민들도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을 보며 ‘와-’하는 함성 대신 ‘아-’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후폭풍 먼지는 한동안 높고 넓게 피어올랐다. 대부분의 참관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먼지가 걷히길 기다렸다. 잠시 후 ‘제로
그라운드’가 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있어야 할 배경 그림이 빠진 듯한 모습이 무척 생경했다. 그렇게 선인체육관은 갔다. 마치 자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맘모스처럼.




선인체육관은 1973년
9월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70년 4월 착공해 연인원 27만 명의 건설 인력과 철근 1만톤, 시멘트 60만 포대를 투입해 3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 장충체육관의 3배 규모로 3층 스탠드에 3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3층에 있는 로열박스 바로 앞 까지 승용차가 다다를
수 있게 만들었다. 실내 바닥에 400m 육상 트랙까지 갖췄으며 축구와 야구를 빼고 그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도 치를 수 있는, 한마디로
서울운동장 메인스타디움을 지붕으로 씌운 격이었다. 동양 최대 규모로 지어져 ‘맘모스 체육관’으로도 더 많이 불렸다. 그런데 ‘70년대
인천시사’에 의하면 이 체육관은 당초 ‘무허가’로 지은 건물이었다. 체육관이 들어 선 부지는 원래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3호로 아동공원으로 지정된 곳이었는데 선인재단이 무단으로 체육관을 건설함으로써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당시
선인재단 백인엽 이사장은 “스포츠 대결은 새로운 전쟁”이라고 전제한 뒤 이 체육관이 장차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면 중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이 체육관에서는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했다. 올림픽은 치르지 못했지만 크기에 걸맞게
빅 이벤트가 많이 열렸다. 특히 그 시절 가장 인기가 높았던 프로복싱 세계타이틀전이 자주 개최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1976년
10월에 열린 홍수환과 알폰소 사모라(멕시코)의 WBA밴텀급 타이틀매치. 이날 제물포역까지 입장하려는 관중 행렬이 이어질 만큼 흥행에는 큰
성공을 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사모라에게 경기 내내 흠신 두들겨 맞았고 결국 12회 TKO패 당했다. TKO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들이 경기
후 링에 난입했고 이 와중에 홍 선수의 형이 사모라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경기는 전 세계에 위성생중계 되었다. 이 상황은
해외토픽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WBC 챔피언 장정구가 1987년 4월 에프엔 핀터(멕시코)를 6회 KO로 물리치고 타이틀 12차
방어에 성공한 곳도 이 체육관이었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는 1986년 6월 2차 방어전, 1990년 1월 14차 방어전을
이곳에서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체육관은 크기에 비해 시설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특히 냉난방 시설이 문제였다. 여름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난방이 되지 않는 겨울철이 문제였다. 1977년 12월 18일 하오 6시, 밖은 영하의 날씨로 수은주가 곤두박질 처 있었다. 안의
기온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 시간 임재근과 에디 가조(니카라과)의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매치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두 선수는
시종 클린칭으로 일관하면서 맥 빠진 채 경기를 끝냈고 가조가 판정으로 타이틀을 지켰다. 경기 후 중남미에서 온 가조는 “날이 너무 추워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운동 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1978년 9월 1일 구국여성봉사단 박근혜 총재가 참석한
새마음갖기결의실천대회 개최 등 관 주도 행사뿐만 아니라 1994년 6월 매진사례 속에 열린 김건모 콘서트 등 이 체육관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일년 내내 열렸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세기’에는 이 동네를 이렇게 적고 있다. “선인체육관 주변은 아담한 농가마을 '쑥골'이고, 수봉공원 진입로 일대가
‘도마다리’라고 부르던 도마동(道馬洞)이었다. 이 두 동네가 통합되어 지금의 도화동(道禾洞)이 된 것이다. 쑥골과 도마다리 일대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중국인 채소밭이 펼쳐져 있어 참새, 콩새 등 산새들이 많았다.”
이곳에 ‘선인’이라는 왕국이 건설된다. 선인학원의 역사는
1940년대에 설립한 ‘성광학원’이라는 자그마한 사학재단부터 시작된다. 이 재단은 성광중학교와 성광상업고를 운영하고 있었다. 1954년
인천항만사령관 엘디스 대령은 학교 건설에 사용하라고 목재 등 자재 170 트럭을 이 재단에 원조했다. 그런데 재단 측은 이것을 횡령해  착복했고
결국 학교는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1958년 8월 예비역 ‘쓰리 스타’ 백인엽이 이 재단을 인수했다.
그는 이 학원을 인수한 뒤
65년 3월 학교법인 명칭을 ‘선인학원’으로 바꾸었다. ‘선(善)’은 자신의 형 4성 장군 백선엽의 이름에서, ‘인(仁)’은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때부터 교명을 자신의 가족 이름을 따서 짓기 시작했다. 선인중․고교를 비롯해 선화여중․고 인화여중․고 등은 두 형제 이름에서 따내
지었고 효열국교는 어머니 이름, 진흥유치원은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 운산기계공고는 백선엽의 호에서, 운봉공고는 백인엽의 호를
붙였다. 



선인재단 시절에 세운
이율곡 상

‘왕국’의 영토는 52만평으로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넓었다. 당시 학교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학교 부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백인엽을 태운 헬리콥터가 부처산 일대에서 자주 이착륙했던
모습을 목격했다. 초기 부지 공사에는 미군들의 불도저 등 중장비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부지 확장 과정에서 선인재단은 주민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끝내 집을 내놓지 않으면 집 앞의 도로를 다 파헤치고 심지어 주택만 남기고 주변을 절벽으로 다 깎아 내기도 했다. 당시 인근에 있던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한국과 대만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이 왕국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려
16개교에 3만 1천여명의 학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공납금 내는 날이면 돈 자루를 실어 나르는 차량들이 학교 언덕을 쉴새없이 넘나들었다. 이
재단의 몇몇 남학교는 한 때 동복(冬服) 코트를 입었다. 앞 쪽에 두 줄로 수 십 개의 금빛 단추가 달린 스타일로 마치 사관생도의 복장과
비슷했다. 교사들도 예비군 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거나 순찰을 돌아야 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은 것 같았던 왕국은 민주화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1980년대 초 학생들의 학내 민주화 시위 후 문교부의 감사 등으로 부정 비리가 적발되어 백인엽 이사장은 재단을 국가에 헌납하고
구속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94년 3월 1일 선인재단의 학교들은 시립화, 공립화가 이뤄졌다. 36년 철옹성의 왕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09년 인천대가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옛 인천대 본관 건물에는 청운대 제2캠퍼스가
조성되었고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 제물포스마트타운(JST) 등이 입주할 제2행정타운이 들어선다. 또한 인천보훈지청, 인천지방노동위원회 등 6개
기관이 입주할 인천정부지방합동청사가 건립된다. 



수봉공원


수봉산은
원래 ‘水峯山’이였는데 후에 ‘壽鳳山’으로 한자표기가 바뀌었다. 예전 주안역 뒤편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멀리서 이 산을 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봉우리처럼 보였을 터, 그래서 ‘물봉우리’가 아니었을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봉우리. 소박하지만 운치 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쉬익-’ 수봉산 중턱에 오르면 시위를 떠난 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활터 무덕정에 동이 트기 시작하면 사대에는 궁대를
찬 궁사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활을 든 사람들은 여럿이지만 사대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습사무언(習射無言). ‘활을 쏠 때는
말하지 않는다’는 계율에 따라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길만 오갈 뿐이다.
이내 활이 시위를 떠나고 찬 공기를 가르며
산기슭에 마련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탁-’ 화살이 145m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과녁을 맞히자 “관중(貫中·과녁을 명중)이요∼”라는 소리와
함께 과녁 앞에서 깃발이 올라간다.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절로 단전호흡이 되면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내장기능도 튼튼해지죠.”
방금 활쏘기를 마친 임배영 옹은 국궁 예찬론을 편다. 임 옹은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레슬링
동메달리스트인데 이제는 노년기의 건강을 국궁으로 다지고 있다. 임 옹뿐만 아니라 무덕정의 노인들은 국궁 덕분에 병치레 없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력있는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다.
수봉산에 자리 잡은 무덕정은 그 역사를 볼 때 민속문화재급이다. 1865년 문학면에서 처음 설립됐으니
한 세기를 넘어 4반세기가 보태진 장구한 세월을 연연히 이어온 사정이다. 현존하는 전국의 사정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 무덕정은
1978년 도원동에 있던 사대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긴 역사만큼이나 무덕정은 한국 국궁 역사의 깨지지 않는 신화를 하나 지니고 있다.
1987년 9월 28일부터 31일까지 대전 대덕정에서 열린 대한궁도협회장기 대회에서 무덕정 소속 명궁 5명이 5발씩을 모두 명중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25발이 모두 과녁을 맞힌 것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기 어려운 ‘신기(神技)’라고 한다.


수봉산에는 현충탑,
인천지구전적기념비, 자유와 평화의 탑, 망배단 등 호국 정신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다른 지역에서는 보긴 드문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가 있다.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이집트-시리아-요르단)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재외
이스라엘 청년들은 앞 다퉈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달려가 예루살렘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각국 언론은 ‘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해외 거주 국민의 참전은 대한민국이 먼저다.
17년이나 앞선 1950년 6·25전쟁 때 642명의
재일교포 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000명이 넘는 청년들은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에
참전 지원을 했다. 신체검사 등을 거쳐 18세 고등학생부터 45세 중년 까지 총 642명이 최종 선발됐다. 여성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한국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나흘 동안의 기초 훈련을 마친 1진 78명은 9월 12일 요코하마항에서 군용 수송선 피닉스호에 승선했다.
이들에게는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S.V.(Student Volunteer) FROM JAPAN’이라는 견장 표시가 유일했다.
현해탄을 넘은 재일학도의용군은 9.15 인천상륙작전 이틀 후인 9월 17일 인천 땅을 밟았다.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상륙한 것이다. 2진
266명은 9월24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옛 올림포스호텔 주변 해안가에 상륙했다. 바닷가에서 하루 야영하고 이튿날 송림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몇십명 씩 흩어져 미군 각 부대에 배속됐다. 이어 3진 101명이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하는 등 4, 5진이 잇따라 참전하게 된다. 그들은
미군과 함께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에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135명(전사
52명, 실종 83명)이 희생되었다. 휴전협정 테이블에서 북한군 대표들은 일본군이 참전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생포된 의용군을 증거로 내세운 것이다. 휴전이 되자 생존한 의용군들은 부모 형제가 있는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내세워 의용군을 ‘허가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고 입국 자체를 불허했다. 미군의
주선으로 265명이 가까스로 돌아갔고 242명은 졸지에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가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조국에서 산화한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기위해 1956년 그들이 처음 조국 땅을 밟은 월미도에 충령비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에 군부대가 주둔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1979년 인천 앞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
대리석에는 ‘강공래’ 부터 ‘황평길’ 까지 642명 대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74년 수봉산 북쪽 기슭에 성냥갑처럼 생긴 집들이 섰다. AID 아파트다. AID 아파트는 미국 AID (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차관으로 빌린 돈으로 전국 대도시에 건축된 아파트다. 대한주택공사 주관으로 도화동에 1974년
6월 착공해 5층짜리 10개 동을 6개월 만에 후딱 지어 그해 12월에 분양했다. ‘경관 좋은 수봉공원 지구’라는 타이틀로 15평 6개동(3백
가구)과 13평형 4개동(2백 가구)의 분양 광고를 냈다. 15평 분양가는 329만1천원, 13평은 220만원이었다. ‘지역난방으로 연중 온수
공급, 단란한 온돌방, 수세식 변소, 알루미늄 창, 장독 및 연탄 등 저장 발코니’ 등 이 아파트가 지닌 장점을 담아 분양 광고를 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가장 기본적인 시설이지만 아파트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분양 즉시 부유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 아파트 주변에
살았던 김민호(45) 씨의 회상 한 토막. “도화초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에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끔 자기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갔는데 ‘간택’ 받기 위해 잘 보이려고 반 아이들이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은 그 무리에 선택돼 그 집에 놀러 갔었는데
수세식 변소를 보고 너무 신기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정말 그 아이가 달라 보이더라고요.”     AID 아파트는 2006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2009년 8월 21일 배를 형상화한 지상 3층, 지하 1층 짜리 수봉도서관이 개관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배 한 척이
수봉산 자락에 걸쳐있는 형상이다. 도서관 옆 수봉산 중턱에는 인천의 명물이 하나 들어섰다. AID 아파트를 건설할 때 산을 깎으면서 절개지가
생겼는데 이를 이용해 높이 높이 37m 폭 122m 짜리 우리나라 최대의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물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수봉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낙하하는 듯 하다. 깊은 계곡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 만큼 웅장한 이 인공폭포는 한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훌륭한 풀장 역할을
한다. 





< 그때, 이곳 도화동
>


제물포역
1899년 9월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1957년 11월 1일 ‘숭의역’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59년 7월 1일 제물포역으로 개칭했으며 그해 3월 역사를 준공했다. 제물포역 앞의
지하상가는 1976년 8월에 착공해 1977년 6월 1일에 준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일시장

제일시장은 1970년에 개설된 등록시장으로 도화동 463-1일대에
위치한다. 80년대 만해도 매달 16일 ‘인천장(場)’이 섰으며 이른바 도깨비시장이 형성되며 활기를 띠었지만 지금은 빈 점포가 늘어 활력을 잃고
있다. 문을 연 지 30년이 넘은 제일곱창을 비롯해 시장의 절반을 곱창집들이 차지하고 있어 그나마 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인묘지

중국인 전용묘지는 청대 때부터 도화동에 있었으나 그 자리가 1958년 인천대학 부지로
편입되면서 만수동 산 6번지 일대로 이전했다. 도시 확장으로 인해 1988년 인천시와 화교협회 협의에 의거, 인천시로부터 현 부평가족공원 부지를
제공받아 다시 묘지를 조성해 1990년 6월 30일 이장했다.

국군묘지

1968년까지 서화초교 운동장 언저리와 옛 선인체육관 아래 부분에
국군묘지가 있었다. 이곳에 6.25 전쟁 때 전사한 국군 379위(혹은 358위)의 주검이 안장되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면 이곳에서
추념행사가 진행되었다. 도화동 국군묘지는 1968년 이곳에 묻힌 시신들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면서 폐쇄되었다.


인천정보산업진흥원
정보통신부와 인천시가
인천의 IT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2002년 설립한 기관이다. 국책사업추진과 더불어 지역 내 IT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한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사업화, 마케팅, 인증지원, 기술개발 등을 돕고 있다. 특히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8년 12월
도화동 일대를 문화산업지구로 지정받아 IT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기틀을 다지고 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