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실

마을과 연계한 읽을거리 및 볼거리, 지원센터 결과자료집과 마을공동체 만들기 공모사업과 관련 자료 등을 함께 나눕니다.

뿌리 뽑힘 그리고 뿌리 내림의 삶, 양키시장

읽을거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9-22 09:03
조회
1128
인천의 숨은 이야기
뿌리 뽑힘 그리고 뿌리 내림의 삶, 양키시장
  
글_이성진(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교사,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조선 말기,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많은 근현대사의 유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속의 인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통해 인천의 숨은 매력과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천의 또 다른 기억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뿌리 뽑힘 그리고 뿌리 내림의 삶, 양키시장

동인천 양키시장의 시작은 통념적으로 한국전쟁 직후라고 말한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미군정 시기에 이미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물품들이 공공연히 이곳 시장에서 팔았다고 한다. 미군부대 하역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미군 몰래 빼돌린 물자를 양키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미군군복, 침낭을 비롯해서 커피, 양주, 초코릿 그리고 비상식량까지 판매되었다고 한다. 양키시장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사를 하신 이난희(가명, 82)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해방 직후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예산에서 인천으로 이사 와서 처음 여기서 장사했지. 왜 인천으로 이사 왔는지는 내가 모르지. 그냥 따라 왔으니까. 그때 내 나이가 12살인가 하여튼 한두 살 많았을 거야. 미군부대에서 몰래 빠져나온 물건을 팔았던 것이 기억나네. 6.25가 터져 피난 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와서 이 장사를 계속 했지.
그러고는 이 나이 먹도록 여기를 떠나지 않고 이 장사를 하고 있어. 여기서 결혼했고, 여기서 자식들 낳고 기르고, 남편도 세상 떠나고 자식들도 잘 커서 잘 살고 있지. 그런데 내가 나이 먹어 할께 뭐 있어. 늙어 죽지도 않고 나이 든 며느리도 내가 집에 있으면 싫어 해. 아들이야 일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잘 모르지. 며느리하고 나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봐. 할 말도 없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무척 어려워해. 그래서 힘들어도 그냥 나와 있어. 그러면 평생을 같이 장사해온 친구들이 있으니까. 장사는 안 돼도 그게 좋아.“

양키시장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생겨났다는 말을 듣고 사실인가를 확인하고자 근거 자료를 찾아보았다. 1945년 11월 28일 중앙신문에 ‘미군의 물품 수수에 엄벌’이란 기사 실렸다.

미군의 물품은 무엇이던지 조선사람으로써 사서는 처벌을 당한다는 경고와 포고를 군정당국에서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즈음 시내에는 미군의 물품을 전문으로 사드리는 자들이 적지 않아 이에 군정장관 스틸맨 중위는 지난 24일에 포고를 내려 일반에게 협력과 주의를 하고 있다. (중앙신문, 1945.11.28.)

미군이 진주하여 인천항 부두에 미군 군수물자 하역을 하는 과정에서 미군 물품이 인천지역으로 유출되어 판매되거나 원조물자로 배급되는 물품을 내다 파는 행위가 공공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도 미군의 물품 매매행위에 대한 경고와 포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매매행위가 진행되고 있어 미군정청은 이에 대해 재차 경고와 포고를 내렸다. 

당시 인천항 하역작업은 축항 북부에서 조선차량회사에 이르는 해안선 일대 6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물자의 하역과 물자 감시 등 종사자가 6천명에 이르렀다. 그 중 미군창고 하역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다. 특히 부두노동자 대부분은 전평소속이었으며, 그 중심은 조선운송 노무자 숙소인 영신조였다. 미군창고 하역을 하는 노동자 대다수가 전평소속이었다.(김영일, 변혁기의 인천 ‘민족진영’편) 그들에 의해 미군물자를 몰래 빼돌려 화수동 건달패로 유명한 정인옥, 박유필을 통해 당시 송현 일용품 시장(현 양키시장)에서 암암리 팔았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에서 각 기관에 원조한 물자들이 기관 운영비 확보를 위해 다시 시장에 다시 되파는 행위가 빈번하게 있었고, 이런 물자들이 양키시장으로 들어와 공공연하게 판매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미군정청이 이에 대해 경고를 한 것이다.

‘풍국제분공장을 교사로 사용할 때의 일이다. 군정시대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지만 미군물자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원조물자라야 신발, 의복 등 지금 생각하면 쳐다 보지 않을 하찮은 물건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꽤 귀한 물건이었다.
원조물자의 교섭은 당시 영어교사였던 김영흥 선생(현 LA주립대 교수)이 담당하였다. 영어회화 실력이 탁월한 솜씨 덕택에 2트럽분의 원조물자를 받아 내게 되었는데 원조물자는 주로 생활물품이었다. 물자를 실어오기 위해 미군부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부대가 있던 곳은 현재 대한석유공사가 당시는 이곳을 ‘히다치(日立)’라 불렀다. 물자를 인수받아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난데없이 깡패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물자를 실을 때 자기들이 자기들이 몰래 팔아먹을 귀중한 물건 두 상자를 트럭 속에 감추어 두었으니 이를 반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천에서는 손꼽는 깡패들로 미군수물자를 몰래 빼돌리기 위해 일부러 미군부대에 위장취업하고 있던 사람들로 그 두목은 바로 당대의 유명한 거구 최관오였다.(최관오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홍성유가 쓴 인생극장에서도 깡패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행패였으니 학교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풍국제분 주위에는 피난민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학교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일의 발단은 미군부대에서 본교의 원조물자를 적재하는 과정에서 몰래 챙겨서 감추어 둔 자기들의 물건을 찾기 위해 그 들 중 한 명이 본교 교직원으로 가장하여 승차하는 것을 김영흥 선생이 제지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두목 최관오와는 지면이 있어 그를 붙들고 설득시키니 이해를 해주어 일은 무사히 해결되었다.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깡패들의 이러한 행동이 공공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도 교사의 설득을 받아들여 선뜻 돌아서는 미덕을 보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기만 한 일이었다.
이때 구해 온 물자들은 일부는 처분하여 학교운영비에 사용하고 일부는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인천여상 40년사, 전희창 선생 회고)



최관오는 인천 화수동 출신으로 일본 주오대(중앙대)를 나왔으며, 대학시절 일본 선수권대회에서 웰터급 우승한 바가 있는 유명한 권투선수였다. 그는 악어 정인옥, 박유필 등과 함께 화수동일대 민족청년들을 결집하여 좌익계열에서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주역 중 하나였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로부터 배다리 시장 일대의 조선인 상권을 보호하는 활동을 해온 청년이었다.
당시 인천상업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본인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김석영과 함께 일본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자칫 일본인들이 배다리시장이나 화수동 일대에 와서 함부로 횡포를 부리면 이들이 나타나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그 주역들이 최관오, 정인옥, 박유필 등 화수동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해방 직후 청년애지단을 결성하였다. 당시 사회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시내 깡패들이 득세하던 때라, 이들로 하여금 시장 상권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소성시장 조합장 이종한이 조직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김영일, 변동기의 인천 ‘민족진영편’)

청년애지단이 중심이 되어 미군부대 하역노동자로부터 몰래 빼낸 물품을 소성시장(현 중앙시장)에다 팔았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최관오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양키시장이 형성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피난민에 의해 양키시장이 더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최관오는 1950년 6월 30일 인천시청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하던 중 급습한 인천경찰에 체포되어 월미도 제방에서 해군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인천 민간인학살 실태보고, 과거사진상위원회)

소성시장이 중앙시장이 되고, 양키시장이 송현 자유시장으로 바뀐 이유는 해방시기 인천 좌우익 세력의 치열한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면 광목 천막을 치고 좌판을 벌이면서 형성된 시장이 1936년 송현 일용품 시장으로 공설시장이 되었다. 현재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구 적십자병원 자리까지 이르는 곳까지였다. 그러나 이 시장은 계획처럼 활성화가 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일제말기 미군폭격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전략에 따라 소개되어 철거되었다. 

해방 직후 다시 철거된 시장을 회복시켜 소성시장이라 불렀다. 소성시장은 일제강점기부터 권투선수 최관오, 악어 정인옥, 박유필 등 화수동 청년패(우익측에서는 화수동 깡패로 표현하고 있음.)들에게 불법 장사를 금지하고 다른 깡패 집단으로부터 상권을 보호,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인들조차 벌벌 떨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갖고 있었고 민족의식이 매우 강한 청년들이었다. 우익진영에서는 이들은 화수동 건달패 또는 깡패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소성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일환의 하나로 미군창고 노동자에게서 미군 물품을 빼돌려 소성시장에서 팔도록 하는 등의 불법 상행의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인천시는 소성시장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가자, 시장 이름을 자유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천 우익세력 입장에서는 자유시장을 관리하는 청년애지단이 눈에 가시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아 인천 좌익세력과 맞서는 단계에 이르자, 자유시장을 철거하고 중앙상설시장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장 상인들의 결사적 반대로 무산되었다.(인천의 시장과 길, 인천역사자료관)
그러자 우익세력은 1946년 7월 송현 일용품 시장을 창립한 유창호을 다시 끌어들여 중앙시장 주식회사를 창립하도록 하고 본격적으로 청년애지단이 관할하는 자유시장을 견제하였다.

1948년 이후부터 좌익세력이 탄압으로 쇠퇴하면서 유창호는 율목동 무덕관을 금곡동을 이전하여 제자들에게 배다리 중앙시장을 중점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자유시장은 점차 쇠락되어 가고, 중앙시장은 배다리 시장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되어 갔다. 한국전쟁 후, 유창호는 청년애지단이 사라진 자유시장을 중앙공설시장으로 통합하였다.
중앙공설시장으로 편입되었지만 양키시장은 송현 자유시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인천 주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주, 화장품, 담배, 통조림, 초콜릿, 껌 등 일상용품과 야전복, 간이침대, 수통, 반합 등 미군용품도 거래되었다. 대부분 째가게는 1평 내외로 100여개가 있었다.

째가게에서 판매하는 물품들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미제 껌 하나 얻어 씹게 되면 단물이 빠지기 전 형부터 동생까지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씹었다. 결국 막내까지 순서가 오면 이미 단물을 다 빠져 버려 그냥 울면 어머니가 달려와 “우리 애새끼들은 사다 처먹여도 사이좋게 나눠먹은 적이 없어. 아이구 막내! 내 새끼. 에미가 너만 하나 줄테니까. 울지마.”하면서 하나 더 줄 때 나도 막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가운데로 태어나 새 것이란 것은 한 번도 입거나 먹은 적이 없어.“ 하고 불만을 가진 적이 있다.

사촌 누나로부터 들은 애기인데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젖이 곪아 모유를 먹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유를 먹었는데, 자꾸 설사를 해서 할 수 없이 양키시장에 가서 비락분유를 사다가 먹였다고 한다. 양키시장에서 비락분유를 사들고 나오다가 단속반에 걸려 압수당하고 벌금을 물리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키시장에서 분유를 사다가 먹일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하고 선처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단속반 직원은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어서 봐 줄 수 없다고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단속반 멱살을 잡으면서 “이 에미나이 새끼, 너는 자식도 없깐? 애새끼가 미제분유 밖에 먹을 수 밖에 없다고 말을 했으면 말귀를 알아들어야지. 뭐 압수하고 벌금 때리겠다고 이 에미나이 그러기 전에 나한테 죽어봐야겠어.” 하고 밀쳐 내니까 단속반도 화를 내면서 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한다는 말만 크게 말하자, 시장 상인들이 다들 몰려 나와 단속반에게 어떻게 인정머리가 없냐고 엄마가 젖을 먹일 수 없고 국산 분유를 먹으면 아기가 설사하니까 미제분유 사다가 먹이는데 그게 뭔 잘 못이라고 압수하고 벌금을 물린다고 해. 해도 너무 하네.“ 욕을 하자, 그만 멋쩍은 듯이 ”오늘은 그냥 봐주겠는데 앞으로 양키시장에서 분유를 사는 것은 불법이니까. 다시는 사지 마세요.“ 하면서 물러가는데 뒤에다가 ”그러면 내가 양키시장에서 미제분유 안 살테니 니가 사다줘 그러면 되겠네“
시장 상인들 대부분은 피난민들로 아버지가 평안북도 철산에서 피난 왔고 이북도민회 임원으로 활동하였던 까닭에 한 편이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단속반이 있든지 없든지 비락분유를 양키시장에서 사가지고 신문지 봉투에 둘둘 말아서 숨겨서 나오지 않고 그냥 통째로 들고 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를 키운 8할은 양키시장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양키시장을 접하는 감정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양키시장에서 살고 있고, 살다간 상인들은 대부분 피난민들이다. 특히 황해도 사람이 많다. 이들은 대체로 황해도에서 중산층 이상 생활을 하였던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51년 1.4 후퇴시기에 미군과 국군이 중국인민군에게 밀려 잠시 후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월남을 선택한 것이었다.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가까운 도시 인천으로 피난을 왔다. 그렇지만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향은 결코 이들 피난민들을 다시 맞이하지 못하였다.
뿌리 뽑힘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피난민은 ‘삼팔따라지’가 되어 새로운 땅에 다시 뿌리 내림을 해야 하는 절박감을 갖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황해도 사람만이 갖는 탁월한 상술과 근면함으로 양키시장에 자리를 잡고 뿌리내림을 한 것이다. 그 뿌리내림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뿌리 뽑힘의 삶을 살도록 한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 뽑힘의 상처는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악착스럽게 생존해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장사를 하여야만 했다. 뿌리 뽑힌 자와 뿌리내리고자 하는 자의 교차점은 그들만의 정서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삶의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그것은 시장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사술은 곧바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뿌리 뽑힘의 고통을 처절하게 경험한 그들이었기에 더 일시적으로 나마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을 견뎌내며 이뤄냈다.

양키시장 최고령 김고운 할머니(95세 작고)도 가게일을 하고 내일 다시 보자고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자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옆 자리에서 장사하던 92세 된 할머니도 가게를 놔둔 채 그냥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들은 왜 죽기 전까지 1평의 양키시장 가게를 처분하지 세상을 떠났는가? 그것은 뿌리 뽑힘이란 고통 체험과 뿌리내림의 힘겨움이란 체험을 교차해서 겪었던 까닭에 손님이 있든 없든지 돈벌이가 되 든 안 되든 간에 그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지키다가 그들의 삶을 마무리한 것이다.

“미군하고 세관에서 단속을 나와. 그러면 냅다 미제물건들은 숨겨 놓지. 째장사가 잘 돼서 가게를 넓히고 싶어도 넓힐 수가 없었어. 1평 가게가 단속이 와도 물건을 숨기기가 쉬워. 그 이상이면 힘들어. 그 놈들한테 한 번 걸리면 호되게 벌금을 먹기 때문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숨기고 가게 문 닫고 도망도 쳤어. 당신들 오기 전에 나 혼자 요 아래에 요강 놓고 오줌쌌어. 그런데 몰려오니까 내가 깜짝 놀랬어. 다 그 때 이렇게 째장사 했어. 그래서 이 시장에는 공동화장실이 없어. 2충으로 가면 있을까. 어떻게 가게를 비우고 화장실을 가고 밥을 먹으러 가냐고. 단속이 언제 나올 줄 알고. 단속 나와 걸리면 벌금이 무진장 때려. 그래서 뒤로 얼마나 돈을 찔러 줬는지 몰라. 그게 편하지. 지금 손자들한테 그냥 웃어. 마트에 가면 마음대로 외제 물건 살 수 있는 세상인데 그걸 이해하겠어.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았어. 나뿐인가 여기에서 째장사 하는 사람들이 다 그랬지 뭐. 애들도 다 크고 자리를 다 잡았어. 큰아들은 인하공대 나와 대우를 다녔지. 부장까지 승진하더니 그냥 나와서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잘 됐어. 둘째는 한양공대 나와 포철에 들어가 이대 나온 색시 얻어 잘 살고 있어. 딸들도 시집 잘 가서 애들 잘 키워. 큰 아들이 왜 자꾸 여기 그만 나오라고 성화야. 그런데 집에 가만있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나와 있는 거야. 나랑 같이 고생하면서 장사해 온 친구들하고 얘기하고 지내는 게 나한테는 낙이야. 나도 고분형님처럼 살다가 그냥 조용히 죽는 게 소원이야” (53년 양키시장에서 장사한 이**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