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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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쩐’ 찍어내던 프레스 소리 울려 퍼진 마을

전동

전동은 응봉산(자유공원) 동쪽의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은 동네다. ‘1번지’는 한 지역이 형성될 때 가장 먼저 ‘찜’되는 곳으로 동네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전동 1번지’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땅도 드물다. 수차례 많은 기관에 찜 당했다. 먼저 군대가 들어왔고 이어서 신식화폐를 만드는 전환국, 철도관련 기관, 여학교,
그리고 현재는 동사무소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따라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철수한 후 그 자리에 구한말의 돈을 찍어내던, 요즘으로 말하면 조폐공사인 전환국이 1892년(고종 29년)에 자리 잡았다. 주화의 원료
동(銅)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 조폐창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기계와 기술, 원료 등의 수입이 편리한 인천에서 바로 돈을 찍어내는
것이 유리했다. 서울에 있던 기계를 옮기기로 했다. 아직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이라 물길을 타고 이전하기로 했다. 기계를 한강까지 끌고 와 배에
싣고 강화수로를 거쳐 송현동 해안(수문통)에 배를 대고 하역했다. 너무 무거워서 갯벌에 빠지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돈 찍는
기계를 전동으로 옮겼다.
인천전환국에서는 압인기(프레스) 9대로 ‘대조선(大朝鮮)’이라 새긴 5냥짜리 은화 등을 발행했다. 조선에 와있던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청나라가 대국이오, 조선은 소국이니 대조선이라는 것은 국격상 체모에 불합하다”라며 시비를 걸어 한동안 ‘大’자를 빼고 그냥
‘조선’만 새겨 넣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용산에 새로운 전환국이 세워지고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원료 수송이 쉬워지자 1900년
7월, 8년 전 배에 실려 인천에 왔던 기계들은 이번엔 기차에 실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전환국이 떠난 그 자리는 1904년 러일전쟁
때 다시 일본군이 잠시 주둔했고 철도감부(철도청 전신)로도 사용되었다. 군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 몸 파는 여자들이 주변에 모여 들면서
지역 이름이 한때 ‘화동(花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환국도 군대도 떠난 자리를 학교가 차지했다. 인천여자고등학교가 이곳에 설립된다. 인천여고는 1885년 10월부터 신흥동 본원사 절방에서
10여명의 아동을 교육시킨 것이 시작이다. 후에 본원사 옆쪽에 있는 현재의 신흥초교 자리에 학교 건물을 세웠고 1907년에 전동에 다시 분교를
설립했다. 이곳에 ‘인천여자실과학교’를 설립했고 후에 인천고등여학교(인천고녀)가 되었다.

이옥경과 그의
부모

이 학교에서는 여자에게 필요한
고등보통교육과 기예를 주로 가르쳤다. 무엇보다 재봉틀을 다루는 기술을 위주로 한 가사실업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이 때문인지 개교 당시 22명
학생 대부분은 기혼자였다. 이 학교에서는 매년 ‘바늘 공양’이란 의식을 치렀다. 바늘의 수고에 대해 감사하고 그 영을 위로하기 위해 부러진
바늘들을 두부에 꽂아놓고 제사를 지냈다. 전시 체제에는 학생들의 체력단련 위해 무술과 목검체조를 가르쳤고 가끔 모래주머니를 지고 학교에서
부평까지 12㎞를 걷게 했다. 또한 매년 10월경 전교생이 학교에서 용산역 까지 40㎞ 도보 행군을 실시했다. 돌아올 때는 기차를 타고 오는데
순서를 거꾸로 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모두 학적부 체력란에 게재했다. 수학여행은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을 다녀오기도 했다. 

학교는 전형적인 일본인 학교였다. 1942년 졸업앨범을 보면 이 학교에서 학생 외에 신발을 깁는 할아버지만 유일한 한국인임을 알 수 있다.
1917년 한국인 학생 1명이 처음으로 입학하며 45년 해방 때 까지 98명만 졸업했다. 한국 학생들은 한 학급에 두어 명밖에 없었다. 보통
입학경쟁률이 20대 1의 기록해 합격자 명단이 신문에 게재되곤 했다. 
이들 중에 이옥경(8회)이란 학생이 있었다. 그는 인천고녀를
졸업하고 도쿄 일본여자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후 경성방송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패션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노라노가
그의 딸이다. 노라노의 솜씨는 학교에서 재봉질을 배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이옥경의 아버지 이학인은 영친왕의
영어교사로서 사립 재령학교 영어선생이었으며 인천에서 해관 업무를 담당했다. 

옛 인천여고 교정. 현재
동인천동 주민센터와 중구문화원이 입주해
있다.

옛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서
본다. 교정이었던 곳에 여전히 우람한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들이 커다란 그늘막을 만들고 있다. 특히 늦가을이 되면 이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은 동네를
온통 노랗게 물들인다. 동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마을 초입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 나무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곤 한다. 흔적은 돌이 돼 한곳에
모여 있다. ‘구적 한국시대 조폐소지적(舊蹟 韓國時代 造幣所池跡)’이라 새긴 비석과 전환국에서 만든 화폐의 모형이 나무 밑에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인천여고의 상징인 은행잎을 형상화 한 학교표지석이 있다.
중구문화원 뒤쪽에는 계단 위 중구보건소 밑 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방공호가 있다. 미군 공습을 피해 피신 연습을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 여름이 되면 그 앞으로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입을 크게 벌린 굴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쉴새없이 나온다. 부근에 궁중에서나 사용됐을 법한 6각형 돌기둥 문과 문설주 조각이 잡풀에 묻혀 나뒹굴고
있다.
교정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시간을 잊게 하는 동네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해관과 은행 그리고 전환국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주택과 한옥들이 골목을 나눠 쓰고 있다. 특히 일본주택이 늘어선 골목을 사진에 담으면 마치 일본영화 ‘철도원’ ‘러브레터’ 등에서 본 듯한 작은
동네가 그대로 담긴다. 골목 모퉁이에 나무전봇대가 하나가 꼿꼿이 서있다. 아직도 전기줄을 몸에 감은 엄연한 현역이다. 근 100여 동안 마을을
환히 비추고 개구장이들 말뚝박기 놀이의 든든한 기둥이 돼주었을 것이다. 
인일여고 정문 옆의 시멘트 길을 오른다. “여기 학교
아닙니다.” 관리인이라고 밝힌 한 남자가 길을 막는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인줄 알고 올라온다고 한다. 여기는 한국은행 합숙소이다. 현대식 2층
건물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작은 운동장 한 켠에 우뚝 서있다. 옛 모습은 다 사라졌지만 이 건물은 예전에 인천조선은행 은행장 사택이었다. 뒤편으로
기상대와 바로 연결된 길도 있었다. 이 부근의 많은 땅이 한때 이 은행의 소유였다. 인천여고도 학교를 증축할 때 이 은행으로부터 한 평에 8원을
주고 땅을 사기도 했다.     

공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인현․전동 경로당이 있고 그 옆에 빌라 한 채가 이웃해 있다. 이 터는 ‘우울한’ 역사를 품고 있다. 오랫동안
한옥 소슬대문으로 외부와 단절된 채 거의 방치되었던 이 터에 대해 ‘인천 한세기’(신태범)는 이렇게 적고 있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명물이던 목련고목도 없어졌으나 대문 안에 연못을 둔 아담한 정원과 화사한 나이든 주목이 옛 모습대로 안채를 지키고 있다. 이 집이
인천에서 가장 유서가 분명한 대표적인 구옥(舊屋)이다. 이 한옥은 1892년에 일본의 기재와 기술로 인천여고 자리에 전환국을 건립할 때 전환국
방판(幇辦)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안경수가 자신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집은 안경수(1853∼1900)가
지었다. 당시 세도가 민영준의 통역관으로 발탁되면서 정계에 발을 디딘 안경수는 인천전환국을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부평부사를 역임했고
독립협회 초대 회장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열강들의 부침 속 격랑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친일에서 친러 다시 친일로 정치색이 급변했다. 그는 철도와
해운, 조폐와 관련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인천에 별도의 거처가 필요했다. 전환국과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커다란 별택을 짓고 첩을 두었다.
을미사변 직후 친러파 이범진과 한패가 된 쿠데타가 실패하자 이 별택으로 피신해 왔다. 이후 황제양위음모가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후에
스스로 돌아와 자수했으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첩은 이 저택에서 자살했다. 한동안 이 집에 밤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이 저택은 미두취인소 사택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의 집이 되었다. 그는 1939년 인천부 의원에
당선된 사람으로 개항 50주년을 맞아 이 집에서 ‘인천부사’라는 역사책을 집필한다. 그는 인천중학교 설립을 주도했으며 광복 직후
인천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해 일본인들의 본국 안전 귀환을 위한 책임을 맡는다. 이를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들을 무장시켜 순사
복장을 하고 각 파출소를 경비하게 하는 등 한국인들이 응징에 대비하기도 했다.
6·25 전쟁 후 박순정 여의사가 이 자리에 전동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경성여자의학 강습소를 나와 기독병원의 전신인 부인병원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 자리에 전동의원을 개업했다. 인천에서 개업한 한국의사
중에 최초의 여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집에서 그의 아들이 자살을 한다. 그 충격으로 박 씨는 성공회 내동교회에 집을 넘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2009년 오랫동안 폐허로 남은 저택은 허물어지고 빌라가 들어섰다. 

1961년
3월13일자 조선일보 만평 한 컷. 세간을 머리에 인 아낙네와 책 보따리를 짊어진 아들이 함께 어느 학교로 향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 밑에는
‘서울서 못된 것만 보지 말고 저 학교로 가자’라고 적혀있다. ‘저 학교’는 바로 제물포고등학교였다. 그해 서울대 입시에서 제물포고 박순철이
전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연․고대 등 이른바 일류대에 많은 학생이 합격하자 유력 일간지 만평의 소재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태기처럼 생긴 분지 모양의 땅에 들어앉은 제물포고는 1954년 개교하자마자 명문고의 대열에 섰다.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초대
교장인 길영희 선생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였던 그는 교훈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고 정하고
유한흥국(流汗興國·땀을 흘려야 나라가 발전한다)의 뜻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었다.
제물포고가 들어앉은 터는 ‘웃터골’이다. 완만하게
경사지고 녹음이 푸르러서 천연 스탠드와 그라운드 구실을 톡톡히 했다. 1920년에 땅 고르기 작업을 해서 1935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라 잃은 울분을 운동을 통해 표출했던 장소로 무엇보다 야구경기가 많이 열렸다. 동호회 수준이었지만
기차통학생 한용단을 주축으로 해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쌀 거래소 미두취인소 ‘미신’과의 한일간 대회가 자주 열렸다. 어찌보면 올림픽금메달과
WBC야구대회 4강 성적도 여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1935년 이 운동장에 제물포고의 전신인 인천중학교가 세워졌다. 해방 전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다닌 학교였다. 당시 노인들은 인천중학과 제물포고를 ‘웃터골 학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군 야전병원이
들어섰다. 당시 건축물로는 흔치 않게 옥상이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전국 유일의 학교였다. 개교하면서 건립한 벽돌조 강당
‘성덕당(成德堂)’은 일제강점기에는 군국주의와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훈시의 장소였지만 광복 후에는 유진오, 백낙준, 함석헌 등 당대 석학들이
강연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애국심을 일깨운 곳이다. 성덕당은 2008년 10월 등록문화재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전동은 학교와
궁합이 잘 맞는 동네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천중, 인천여중, 상인천여중, 축현초 등  많은 학교들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여기 우리 기억 속에서 흐릿한 학교 하나가 있다. 축현초 정문을 지나 제물포고로 올라가는 경사 길 오른쪽 아래 옛 인천양조장 근처 낮은
지대에 인천대의숙(仁川大義熟)이란 전문대학 과정의 학교가 있었다. 의숙(義熟)은 공중을 위하여 의연금으로 세운 교육기관을 일컫는다.

학교는 법정과와 상경과 주야로 운영되었고 지원 자격이 일반 고등학교와 교육대학의 전신인 사범학교 졸업자였다. 모집광고에 ‘장차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될 경우 해당 학년으로 편입함’이라고 광고를 냈지만 60년대 말 문을 닫았다. 66년 서울에서 열린 47회 전국체전에 이 학교 학생들은
경기도 대표로 출전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101명이 부정선수로 판명돼 무더기 실격당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인일여고 정문을 지나 화평동 방면의 일방통행 길을 걸으면 학교 담 옆에 있는 커다란 빌라촌을 만난다. 예전에 전동변전소가 있었던 터다. 이
변전소는 일제강점기부터 도심지의 전력을 공급했던 중요한 시설이었다. 1990년대 초 변전소는 없어졌고 옆에 있는 전동교회가 그 터(약
2500㎥)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빌라가 들어섰다.

빌라 앞을 지나면 경인선 철로를 가로지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그냥 ‘구름다리’ 혹은 ‘인천극장 가는 다리’라고
불렀다. 기차가 달리는 철길 위를 걸어 다니니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 들어서 이같이 부른 듯하다. 언제부턴가 굳이 한자로 고쳐
운교(雲橋)라고 했다.
이 다리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던 즈음에 7m 정도의 높이로 설치됐다. 그때는 나무로 만든 작은 목교였다. 자동차가
거의 없던 시절로 사람들이 주로 다녔고 기껏해야 우마차나 인력거 통행이 전부였기 때문에 목교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썩지 말라고 검은
염료를 발랐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흔히 ‘흑교’라고 불렀다. 해마다 가을이면 일본인 축제행렬이 그곳을 지나갔다. 지금의 인천여상에 있던 신사에서
출발한 그들의 신을 모신 가마를 앞세우고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지나갔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인근 어른·아이들은 구름다리 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 그때, 이곳 전동 〉

해군병원


1946년 6월 14일 통위부 내에 의무국을 설치하면서 우리나라
군은 현대적인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정부 수립 후 조선해안경비대에서 독립해 창설한 해군은 52년 11월 1일 해군본부 직속 하에 해군인천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현재 인일여고 정문 앞 아우구스또 수도회 자리에 문을 연다. 이 병원은 64년 10월 포항으로 이동한다. 

성덕당

1935년 건립된
제물포고 강당으로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벽돌조 건물이다. 학교 강당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인천지역 사회의 대형 집회공간으로 이용해 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15m나 되는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했으며 전체적으로 아주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이 건물은 당시 제물포고 학생들이
많은 애국지사 등의 강의를 들으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 427호이다.

길영희 동상
길영희 교장은 1900년 평북 사천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전에 재학 중 1919년 학생대표로 3.1운동에 나섰다가 체포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민립농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1939년
인천에 내려와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만들어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을 벌여나가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해 11월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1954년 제고를 설립해 16년간 인중, 제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제고 성덕당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전동떡집


60년 가까이 찹쌀떡만을 만들어 온 전통떡집이다. 시어머니에 이어 며느리
한영화(66) 씨가 일본풍의 팥앙금 찹쌀떡을 만든다. 그는 시어머니를 도우면서 찹쌀떡 만드는 것을 배웠다. 70~80년대만 해도 국회의원 선거
때나 명절 때면 찹쌀떡을 사방에 퍼다 날랐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고, 찹쌀떡을 사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을 정도였다. 지금도 서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문이 줄을 잇고 있을 정도로 이집 찹쌀떡 맛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