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사라)지다 – 송현동

골목,
살아(사라)지다

난민亂民과 빈민貧民을 품어 준 수도국산

송현동

동구
송현동은 가깝게는 산을 품고 있고 멀리는 바다를 끼고 있다. 송현동 사람들은 바다를 공장에 내주고 산으로 들어와 살았다. 수탈과 전쟁에 밀려서
정착한 산등성이의 삶은 늘 고달팠다. 비탈길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비탈졌다. 송현동 사람들은 난민(亂民) 아니면 빈민(貧民) 사이의 구차한 삶을
이어갔다. 그 삶을 처절하게 지탱시켜준 것은 그 산, 수도국산이었다.

70년대 수도국산과 수문통
시장

수도국산은 그들에게 어머니 품이었다. 산이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송현동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한 등짐을 내려놓고 밤새 그곳에 기대어 있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고갯길을 내려가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 산은 따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존재였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松林山) 혹은 만수산(萬壽山)이었다. 일제는 1910년 이 산의 꼭대기에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만들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자기 나라 거류민의 식수와 군수공장의 공업용수 그리고 인천항에 정박하는 기선(汽船)에 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배수지를 관할하는 수도국이 생기면서 이 산은 ‘수도국산’으로 불리었다. 만수산이 그 몸통에 물을 채움으로써 이름처럼
‘만수(滿水)’가 된 형국이었다. 
수도국산은 근 100년 가까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구역이었다. 배수지 바깥으로 철조망이 높게 둘러
처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24시간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경계가 철저한 것은 배수지가 국가 주요시설로서
만약에 간첩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시민의 절반이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함부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잡히면 ‘간첩’
죄로 감옥에 갈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높고 촘촘한 철조망일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막진 못했다. 숲이 우거진 배수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철조망을 뚫은 아이들은 나무총이나 칼을 들고 편을 나눠 총싸움을 했다. ‘밀림’ 속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배고프면
아카시아를 따서 씹어 먹었다. 간혹 여자애들도 곤충 ․ 식물채집을 하기 위해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아예 수도국산에 맞닿은 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몰래 그곳에서 봄나물을 채취하거나 겨울 땔감 잡목을 긁어모았다.
지금의 서흥초교 쪽으로는 1960년대 말까지 온통
비탈진 배추밭이었다. 배추 수확을 하고 난 자리에 웅덩이를 파서 인분을 퍼 날랐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이게 얼어붙어서 땅과 구분이 가질
않았다. 이웃 동네에서 온 아이들은 비탈길을 가로지르다 웅덩이에 빠지는 난감한 ‘사고’를 당했다. 
거대한 판잣집 동네는 산을 중심으로
해서 둥그렇게 형성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 포개 놓은 듯 산 밑에서 꼭대기 까지 한뼘의 여유 공간도 없이 앞 집 어깨를 타고 올라섰다.
틈만 보이면 무단으로 밤새 집을 지었다. 이 때문에 남의 집 마루를 통과해야만 내 집 마당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도 생겼다.   

5만5천평에 1천8백채의 꼬방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안방, 건넛방, 마루 할 것 없이 창문을 열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서울의 난곡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은 1998년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송현동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3천 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솔빛마을이 들어섰다. 다행히 배수지 공간은 그대로 살려두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들은 2005년에 개관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동네가 철거될 때
전국의 고물상이 다 모여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해 갔다.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사용된 고고한 유물이 아닌 우리 부모들이 사용했던 세간들이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박물관으로 들어가 추억을  전시하고 있다.

수도국산과 이어진 작은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채석장으로 사용될 만큼 단단한 암석으로 된
산이었다. 이 산 위아래에도 동네가 있었다. 아래쪽에는 피난민 수용촌이 있었다. 6.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난민촌을 형성했다.
“내래 평안도 순천에서 혼자 내려왔지. 열아홉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다 전쟁이 터져서 잠시 피한다는 게 벌써 60년이 되었어. 수용소촌에 처음 발을 딛고 여태까지 이곳에 살고 있지”

아파트 벤치에서 쉬고 있던 최영속(82) 할아버지는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지난  이야기를 했고 곧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수용소촌
옆에는 1960년대 중반 경에 연탄공장이 있었다. 황해도 피난민 출신 유진성(劉鎭成) 사장은 공장의 이름을 자신의 고향을 따서 ‘황해연탄’으로
지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소촌에 거주하는 황해도 사람들이었다. 빈손으로 내려와 ‘3.8 따라지’라는 천대 속에서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많은 피난민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강한 의지로 낯설고 물 설은 남한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 나갔다.         
돌산
위에도 사람들은 위태롭게 집을 짓고 살았다. 밤새 하꼬방집이 들어서 자고나면 골목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이 돌산
동네에는 천연 풀장이 만들어지곤 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면서 수영을 했다. 80년대 초 이 돌산 동네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재개발 되었다. 이 대목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취임 후 전 대통령은 산업시설 시찰로
인천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먼저 인근의 수용소촌과 송현3동사무소를 들렀다. 이어 돌산 밑의 길로 해서 인천제철 쪽을 가다가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인천에 아직 저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귀빈들의 산업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철거
지시가 바로 떨어졌고 전두환 대통령 재개발 지시에 따라 82년 불량주택 531채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10평에서 20평짜리의 5층 공영아파트
송현라이프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 앞 쪽 수도국산 산자락에는 1967년에 설립한 숭덕중학교가 있었다. 제 6교회와 공민학교가 모태가
된 이 학교는 82년 남동구 만수동으로 이전해 여중과 여고로 분리되어 현재 약 2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학교가 떠난 이 자리에 한
동짜리 누리아파트가 세워졌다. 얼마 전 아파트 바로 앞에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터널과 고가도로가 설치되었으나 개통하지 못하고 흉물처럼 남아 있다.

6, 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 인천은 ‘임해공업도시’라고 설명돼 있다. 바다나 항만을 끼고 조성한 공업단지를 말한다. 송현동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중후장대한 공장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제철이다. 1941년에 설립돼 요철을 생산한 조선이연금속은 해방 후 조업이 중단되었다가 대한중공업으로
재가동되었고 인천제철로 이어졌다. 이후 인천제철은 78년 4월 현대그룹으로 흡수되면서 ‘현대제철’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 대목에서 ‘경영인’
이명박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해 6월 현대제철 사장으로 이명박이 취임한다. 그는 81년까지 약 3년 동안 현대제철 사장긱을 맡는다. 91년경
정주영 회장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즈음 이명박 사장은 정 회장에게 현대제철을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고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송현동 일대는 제철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대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거나 시비를 걸기 보다는 산업화 시대의 자랑거리로 삼던 시절이었다. 송현동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철가루를 들이마셔 ‘일찍
철든다’는 자조적인 말만 오갔을 뿐이다.   
당시 전국의 고물은 제철과 제강 공장이 있는 송현동으로 실려 왔다. 쇳덩이는 곧 돈이었다.
고물을 잔뜩 실은 트럭은 동네 청년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화수동 쪽에서 오는 트럭이 수문통 다리를 지나기위해 속도를 줄이면 재빨리 트럭에
올라타 돈이 될만한 쇳덩이를 갯골로 던져 버렸다. 물이 빠지면 ‘전리품’을 주워서 고물상에 팔았다. 그 시절 유난히 송현동에는 고물상이
많았다.    

고깃배가 드나들던 복개하기
전의 수문통

송현동은 원래
산을 제외하고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과 갈대 무성한 습지가 많았던 동네였다. 일본인 요시다는 1939년부터 43년까지 5년에 걸쳐 이 지역을
매립했다. 화평동과 배다리 까지는 갯골로 그냥 남겨 두었고 나머지는 땅으로 만들었다. 그는 매립으로 떼돈을 벌었고 그 일부로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지금은 공립학교이지만 당시에는 사립학교였다. 매립해 만든 학교라 백중사리 때는 바닷물이 역류해서 교실까지 밀려들어왔다. 가끔 복도에
물고기가 펄떡거리기도 했다.  
현재의 화평치안센터와 송현치안센터 사이, 약 200m 거리에는 ‘수문통’이라 불린 갯골 수로가 있었다.
지대가 낮아 인근 동네의 온갖 생활하수가 이곳으로 다 흘러들었다. 이곳에 종종 탯줄이나 사산아(死産兒)를 싼 시멘트 봉지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였다.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밀물은 수문통을 정화시켰다. 썰물로 나갈 때 온갖 쓰레기는 수로를
따라 바다로 떠내려갔다. 물때 따라 작은 돛단배가 수문통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뭣 모르고 고깃배를 쫓아온 갈매기가 이곳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배짱 좋은 아이들은 수문통 갯골에서 멱을 감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이 수문통을 ‘세느강’이라고 불렀다. 결코 낭만적인 삶을 살진 못했지만
송현동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도 그렇게 늘 낭만을 꿈꿨다.
“여름철 장마 때는 전동, 인현동 등 윗동네에서 놀다가 하수구로 빠진 공들이 다
떠 내려와 이곳 아이들은 돈 주고 공을 산적이 없었어요.” 수문통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방송인 한영우 씨의 추억담이다.
화평동
쪽 수문통 끝자락에는 한동안 ‘수상가옥’이 있었다. 갯골을 일부 복개한 곳 위에 많은 판잣집들이 들어섰다. 안방 밑으로 바닷물이 찰랑 거렸다.
우리나라 유일의 수상가옥이었던 셈이다. 이 위에 1962년 9월 1일 수문통시장이 개장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판자벽을 한 이 시장의 건물은
1층은 가게이고 이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이었다. 시장으로 시작했지만 화평동 쪽 입구에 순대집과 그 반대편 입구에 과일가게 몇 집만 장사를
하는 등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결국 대부분 주거지로 사용되었는데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 통로는 늘 어둠침침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우면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1996년 수문통의 나머지 부분이 복개되었고 수상가옥은 철거되었다.

수문통 골목에는 아직도
공장 사택으로 사용했던 일본보식 주택들이
남아있다

송현동 개천가에
허름한 노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밤늦도록 노점들이 불을 밝히면서 일대는 자연스레 야(夜)시장이 되었다. 1936년에 노천시장에 양철지붕을
얹어 ‘일용품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소성시장으로 불리다가 50년 4월에 지금의 중앙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인천역을 끼고 있는 덕분에
늘 사람들로 번잡한 인천의 대표시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은 크게 혼수상가, 그릇상가 그리고 ‘양키시장’으로 섹터가 나뉘며 몸집이
커졌다. 그 중 가장 중앙시장의 색깔을 진하게 보여준 게 양키시장이었다. 양키시장의 정식 이름은 ‘송현자유시장’이다.
송현동 100번지
양키시장. 물들인 군복, 청바지, 보세옷…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날 이곳과 얽힌 추억을 한두 개 쯤 갖고 있는 ‘무대’다. 1965년
12월 정식으로 시장 등록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6·25 전쟁 직후부터였다. 인천에는 미군부대가 곳곳에 있었다. 부대 뒷문으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이 이곳에서 은밀하게 거래되었다. 양주와 양담배, 향수, 로션, 초콜릿, 스낵, 통조림 등. ‘양키’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 보다는
동경심으로 인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던 물건들이 좁은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돼 있었다. 다른 편 가게에서는 간이침대, 야전삽, 수통, 군용식량
등 각종 미군용품도 거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돈 달러와 이른바 ‘빨간책’이라고 불리던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 같은 야한 잡지도 구할
수 있었다.

인천에 양키들은 이제 없다. 양키는 갔지만 아직 양키시장은 남아있다.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듯 어스름 조명 아래 늙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양키시장은 일반시장과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시장을 사방으로 막고 있다. 시장이라기보다는 골목이다. 1백여
개가 넘는 작은 가게들이 하루 종일 한조각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에 줄지어있다. 30촉 짜리 백열등 아래서 ‘은밀히’ 거래하기 딱 좋은
분위기다. ‘쩨’를 쫓아 드나들던 사람들 발걸음으로 항상 활기를 띠던 시장도 이제는 바람만이 골목을 쓸쓸히 배회한다.
“다 죽었어. 가게
지키던 사람은 늙어죽고 가게는 장사 안돼 죽었지. 마트에 가면 이제 미제물건 다 살 수 있잖아. 오랜 단골이나 그냥 옛 생각나서 가끔 들르는
사람들 밖에 없어.”
아들의 어린시절 별명을 상호로 쓰는 똘똘사 허순영 사장(74)의 설명이다. 양키시장 가게 주인 중에는 93세 된
‘현역’ 김고분 할머니도 있다. 김 할머니는 한 평이 채 안되는 가게에 매일 나와 미제 물건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낸다. 양키시장의 물건은 이제
더 이상 미군 양키들에게 나오지 않는다. 남대문시장 중간도매상들이 정식으로 수입된 물건들을 이곳에 공급한다.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허쉬
초콜렛과 코티 분에 쌓이는 것은 먼지뿐이 아니다. 여러 가지 ‘과거’가 그 위에 쌓인다. 그들이 사고파는 것은 이제 양키물건이 아니라
‘추억’이다. 시간에 떼밀려 가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뒷모습은 슬프고 서럽다.
수선, 마크, 명찰, 오바로크… 빛바랜 간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양키시장 골목이 끝나는 곳에 극장이 하나 있다. ‘애관2관’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붙어있는 오성극장이다. 마치 시장 위를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는 오성극장은 씨네팝, 애관2관으로 이름을 바꾸며 운영되다가 2003년 4월11일에 스크린을 내렸다. 문은 쇠줄로 굳게 감겨져
있다. 옛 영화의 잔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바로 앞에서 50여 년 동안 구제품 옷을 팔아 온 흥신사 주인에게 극장에 들어갈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거긴 뭐 할려고 올라가요. 아마 귀신 나올텐데…” 극장 바로 앞에는 재난위험시설(D)급 지정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다. 이제 극장은
우리의 기억뿐만 아니라 눈에서도 영원히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 그때, 이곳 송현동 >

순대골목

동인천북광장 옆에 순대골목이 있다. 얼마 전 까지 20여 곳의 순대국밥집이 그야말로
순대처럼 마주 보고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동인천북광장 조성으로 한쪽이 철거된 상태다. 이 순대골목의 뿌리는 30여 전의 수문통 시장이다.
당시 화수부두, 만석부두와 가까운 수문통 주변에는 항만이나 공장 노무자들이 즐겨 먹던 순대국밥집이 시장통 안에 많이 있었다. 수문통 시장이
헐리면서 국밥집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기존에 있던 몇몇 국밥집들과 합쳐지면서 순대골목이 된 것이다. 숭의동에서 이화순대와 함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시정순대도 여기서 시작했다. 이 순대골목은 지난 1997년에 ‘특색음식거리’로 지정됐다.

중앙시장

1935년 무렵 박영섭이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모양의 시장을 개설한 데
이어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였던 유창호가 현 중앙시장 인근 개천가에 야시장을 운영하면서 오늘의 시장 개설의 터를 닦아놓았다. 이어 1949년
송현동을 비롯 전동, 숭의동, 도원동 등 각처의 노점 자유상인들의 소성자유시장자치회가 합동하여 지금의 ‘중앙시장’이 발족되었다. 개천을 복개한
후 건물을 지어 시장을 만들고 갑, 을, 병 지구로 나누었다.

송현시장
송현시장은 중앙시장과 길 하나를 놓고 마주하고 있다. 1960년대 초에
개설한 송현시장은 2008년 6월 문화관광부와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등으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시장 안에는 옛 향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빨래터와 펌프장 등을 복원해 놓았고 길거리갤러리도 만들었다. 송현시장이 믄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된 것은 인근에 골목들이
그대로 살아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대 달동네였던 곳을 추억할 수 있는 수도국산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해방우물

수도국산 주변에는 우물들이 많았다. 그 중 송현시장에서 수도국산 오르는
골목에 있는 해방우물이 유명했다. 흔히 층층대 우물이라고도 불렀다. 몇 년 전까지도 이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버렸다. 우물을 개통할 때
세운 작은 기념석이 한 켠에 세워져 있다. 

미림극장

1957년 11월 고희석 대표가 송현동 중앙시장 진입로에 천막극장을 세워
‘평화극장’이란이름으로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시작되었다. 영화 뿐만 아니라 남진과 나훈아 등의 리사이틀무대이기도 했다. 참고로
1958년 발행한 인천연감에 의하면 미림극장이 개관한 이듬해인 1958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영화를 관람한 연 관객 수는
75만5천848명이었다. 당시 인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으니 시민 모두가 1년 동안 두 차례 이상은 영화를 본 셈이다. 지난 2004년
7월29일 영화 ‘투가이즈’를 끝으로 문을 닫은 미림은 지난 10월 2일 250석 규모의 ‘실버전용극장’으로 리모델링해 다시 개관했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지난 2005년 10월 개관했다. 동네어귀, 구멍가게 등 달동네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연탄을 배달한 유완선 씨, 대지이발관을 운영하던 박정양 씨 등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평생 살아 온 사람들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생생함을 더한다.

수도국산(송현) 배수지

수도국산 정상 부근(2만5천평)에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설계해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10월 송현 배수지를 준공한 데 이어 기타 잔여 공사를 하고 1910년 4월 인천의 상수도를 운영, 관리하기 위한 인천수도사무소를
설치했다. 그 해 9월, 마침내 약 4년 여의 공사 끝에 인천에서 노량진에 이르는 인천 상수도 건설 공사를 모두 마무리하였다. 당시 수돗물
공급량은 시민 7만 명이 하루 사용 할 수 있는 분량으로 현재의 1백분의1수준이었다. 수돗물은 주로 일본인들 위주로 공급되었다.

제수변길

송현배수지에는 상단이 원통형으로 생긴 제수변실(制水弁室)이 있다. 제수변실은 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로 물을 통제할 수 있는 기계적인 장치이다.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의 원통형 구조로 상부를
페디먼트로 장식한 출입구와 창문이 있다. 출입구 위에는 ‘백 번 흐르면 만 번 빛난다’는 뜻의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 지정돼 있다.

적십자병원

1956년 7월 25일 수문통 옆에 경기적십자병원이 개원했다. 주변에 거주 인구와 큰
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병원의 수요가 많았다. 1977년 3월 30일 송현동에서 남구 숭의동 숭의로타리 근처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인천적십자병원으로 바꾸었다. 송현동 자리는 천주교회가 들어섰고 현재는 천주교 성당 재건축을 위해 비어있는 상황이다. 적십자병원은 1996년 6월
5일에 연수동 결핵요양소 자리로 재차 이전하였다.

글,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