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인문학>마을, 다시 마을이 되다

 

 

 

마을, 다시 마을이 되다

 

김현석(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조사 전문위원)

 

▲산곡동 영단주택지

 

 

  일본에서 제작해 ‘명치 28년(1895년)’이라는 연도를 선명하게 찍은 인천 지도에는 작은 점들이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건축물을 표시한 이 점들은 몇 개씩 모여 부락을 이루면서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대개는 산 아래, 대지와의 경계를 따라 숨은 듯 앉아 있다. 일본 참모본부 직속의 육군측량부와 임시측도부가 만든 지도에 이렇듯 상세한 마을 위치가 남아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행스런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군사기밀로 분류된 비밀 지도 속의 마을 모습은 평온한 동구 안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로 위장하면서까지, 조선인에게 발각되면 허위자백을 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때로는 몰매를 맞아 쫓겨나기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을 첩보원들의 집요함을 떠올리면 내심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군사작전을 위해 만든 지도 속의 마을들은 지금은 많이 변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군용지로 수용돼 아예 사라져 없어지거나 주변으로 점차 넓혀 가며 한 동(洞)을 이루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 들어선 새 마을들은 보다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부평지역만 따로 떼어 놓고 들여다보면 우선 신촌이 그렇다. 일본육군조병창이 만들어지며 사람들이 한두 명씩 찾아와 자리잡고 터를 닦으면서 등장한 새마을이다. ‘삼릉’은 히로나카(弘中)와 미츠비시(三菱)로 이어진 일본 회사원들의 숙소로 출발했고, 부평남부역 앞의 언덕배기 마을은 부평역에 근무하던 철도원들의 관사가 마을로 성장했다.

 

  산곡동 영단주택지는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다. 1941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광복 때까지 이어진 영단주택 건설사업은 산곡동 일대에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를 남겨뒀다. 전국적으로도 이만한 규모에 이렇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시대별로 성격을 달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병창 근로자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전쟁을 거치며 타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도 하더니 미군기지인 애스컴(ASCOM)이 들어서면서 ‘양공주’들이 세를 얻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공단은 노동자들을 이곳에 머물게 했고 이들이 떠난 자리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왔다. 마을이 사라질 단계에 이르니 이제 남은 건 갈 곳 없는 노인들뿐이다.

 

  산곡동 영단주택지는 마을이다. 변하지 않는 마을이면서도 사람들은 바뀌고 집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마을 공동체는 찾아보기 어려워도 꽤 긴 시간을 함께 한 주민들은 서로를 잘 안다. 마을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을이라고 부르기 쉽지 않은 공간이다. 여기와 외형이 비슷한 공간이 일본에도 남아 있다. 영단주택지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츠와쵸(三和町) 영단주택지다.

 

  미츠와쵸는 오래된 마을이 어떻게 새로운 마을로 다시 변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괜찮은 모델이다. 영단주택이라는 전통을 안고 있는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계승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주민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정기적으로 모여 마을의 역사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전문가를 불러 강좌를 개최하고 동네 지도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며 마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정기적으로 회지도 발행했다. 마을 사람들이 곧 마을의 역사가가 되고 해설사가 되고 기획자가 되면서 마을의 전문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지금까지 계속 성장하며 반복된다.

 

  마을은 역사를 갖고 있다.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길고 짧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을을 어떻게 ‘우리 마을’로 만들 건가, 고민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마을 주민들의 몫이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해결할 때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며 후세에 전하는 ‘우리들의 마을’이 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