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동(新興洞) – 남겨진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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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新興洞) – 남겨진 흔적들

[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11-12-02 06:48ㅣ 배성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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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 1

큰 길에서 바라 본 2011년의 신흥동은 여느 동네와 다를 게 없다. 높게 솟은 아파트, 대형마트, 빼곡히 붙어 있는 작은 가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안쪽으로 발을 조금만 들여 놓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큰 길쪽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과는 달리 안쪽 골목길 주변은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신흥동 골목은 지난 한 세기의 흔적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처녀목욕탕에는 여탕만 있었을까?

신흥사거리에서 서남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목욕탕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이 굴뚝이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굴뚝 자체 모습보다는 벽돌 위에 남겨진 ‘처녀목욕탕’이란 흰색 글씨 때문이다. 학창시절 동인천 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보았던 이 목욕탕의 특이한 이름은 친구들 사이에서 늘 화제거리였다. ‘처녀들만 들어갈 수 있어서’, ‘주인이 처녀라서’ 등 이름 유래를 놓고 각양각색의 추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건물이 지어져 목욕탕 영업을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대다. 일본 목욕문화가 유입되어 대중목욕탕이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이전만 해도 인천에서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목욕탕은 화수동에 있던 공설목욕탕뿐이었다. 1932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공설목욕탕은 ‘조선인들의 목욕문화를 개선시켜 공중위생 촉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인천부에서 지었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 목욕문화가 인천의 조선인들에게 보급되었으며, 그 결과 처녀목욕탕이 문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목욕탕 이름이 처음부터 ‘처녀목욕탕’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주민들 기억 속에 목욕탕의 다른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기간 이 이름을 유지해 왔던 것 같다.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크지 않은 규모(30평)로 붙어 있던 신흥한증막과 함께 손님들로 꽤 북적거렸던 목욕탕이었지만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 근처 정미공장 여공들이 주로 이용해서 ‘처녀목욕탕’이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처녀목욕탕’에도 ‘남탕’은 있었다는 것이다.


자동차정비소로 변한 정미공장

20세기의 절반 이상 신흥동 남쪽부분을 차지했던 정미공장들은 정미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0년대부터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인사거리에서 동인천이마트까지 인중로를 따라 늘어서 있던 정미공장들은 서점의 창고나 대형 전자용품 매장으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 들어 고층아파트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늘어선 고층아파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붉은색 벽돌건물이 고려정미소 건물이다. 1950년대 인천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던 고려정미소는 1955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불타버리기도 하였지만, 1980년대까지 영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현재 그 터 대부분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남아 있는 건물들은 자동차 정비소, 식품창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빈터에 덩그러니 솟아있는 굴뚝만이 이 자리가 그 시절 정미공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름표가 붙은 나무 전봇대

고려정미소 북쪽 뒷골목으로 허름한 주택가가 밀집해 있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일본식 주택에서 이곳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데,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고물상 옆 골목 구석에서 이 시대 천연기념물 나무 전봇대를 발견했다. 단단하고 오래가는 콘크리트 전봇대에 밀려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어렸을 적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던 나무 전봇대였다. 아주 가끔씩 보게 되는 나무 전봇대들도 전봇대로서 생명이 끊겨버린 나무기둥에 불과한 것들인데, 신흥동 나무 전봇대는 아직 싱싱하게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흥동 나무 전봇대에는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다. 얇은 직사각형 철판으로 만들어진 이름표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 있다. 처음 인천에 전기를 공급했던 회사는 1906년 4월 송월동에서 영업을 시작한 ‘인천전기주식회사’이다. 하지만 영업을 시작한 지 6년 만인 1912년 경성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에 매각되었고, 이 회사는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회사명칭을 바꾸었다. 경성전기는 해방 이후까지 영업을 계속하다 1961년 한국전력에 흡수통합되었다. 

신흥동 나무 전봇대에 붙은 이름표는 다섯 장의 오얏 꽃잎에 쌓인 원안에 ‘京’자가 들어간 경성전기의 마크가 새겨 있고, 오른편으로 ‘年’, ‘月’, ‘米’자가 새겨 있다. 아마도 전선을 연결한 일자와 인근 전봇대와의 거리를 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전기 마크는 해방 이후 조금 달라지는데, 이 마크는 일제강점기 사용되었던 마크로 나무 전봇대 나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마크 우측으로 중구청에서 부착한 플라스틱 컨트롤 박스가 있어 녹슨 경성전기 이름표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 매달린 가로등에서 나무 전봇대가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선창리(船倉里), 화개동(花開洞), 하나쵸오(花町), 신흥동(新興洞)….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이 동네 이름은 네 번이나 바뀌었고, 바뀐 이름만큼이나 동네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이 곳이 개항장 언저리이고, 인천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개항장에서 불과 1km도 떨어져 있지 않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신흥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언저리 동네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고층아파트와 대형마트 안쪽 골목 구석에는 한 세기 가까이 서 있는 그 시절 집과 공장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비록 개항장 언저리 동네로 관심 밖에 있었던 신흥동이지만, 이 공간에 남겨진 이야기와 흔적들은 개항장 못지않은 콘텐츠일 수 있을 것이다. 부수고 새로 짓는 개발행위들이 넘쳐나는 도시에 남겨진 그 시절 흔적들에서 개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얼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