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죽었다 ― 왜? [인천in컬럼]

축제는 죽었다 ― 왜?

[인천in컬럼] 류이 / 미디어교육연구소 이사장

15-07-11 14:11ㅣ 류이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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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죽었다.”

언제인가 모르게, 저도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2013년부터 주안미디어문화축제의 예술감독을 3년째 맡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부과된 임무였으므로 싫든 좋든 다시 축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삶의 여유와 쾌적함을 제외하고 문화를 말할 수 있을까요? 늘 재생되는 삶의 축적을 문화라고 한다면, 그 문화의 중추에 바로 축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축제야말로 두레 공동체 삶의 재생을 표현하는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레 공동체가 망가져버린 이 시대에 축제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축제는 이벤트 사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동체 축제는 사라지고 축제라는 이름의 대규모 문화 이벤트로 사람을 홀리는 상업주의가 만연하여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창조하는 인간이냐 따라쟁이 인간이냐

우리나라에 1200개 이상의 지역축제가 있다고 합니다. 기초자치단체마다 (작은 축제, 마을축제를 제외하고) 3개에서 5개까지 지역축제를 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축제의 쓰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관광객을 모으는 축제, 이른바 문화관광형 축제가 다수를 점합니다. 보령머드축제, 화천산천어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같은 관광형 축제를 제외하면 전국의 지역축제 가운데 문화예술축제가 20퍼센트가 좀 넘는다고 합니다. 전국에 240개 이상의 문화예술축제가 있는 것이지요. 거의 모든 기초자치단체에서 문화예술축제를 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야말로 문화융성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예술축제의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축제는 온통 따라쟁이들로 붐비는 큰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축제의 목표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부산영화제, 광주비엔날레 같은 몇몇 예술축제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엇을 위한 축제인지도 묻지 않습니다. 그냥 소비적으로 노는 놀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축제들에서 대중가수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화려한 무대와 조명 아래 공연을 벌입니다. 그게 아니면 전문 예술가들의 작품을 재전시하면서 화려한 이벤트를 벌입니다. 앞에 나와서 노래하는 소위 한류 가수들의 노래도 그 장르와 틀거리는 따라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미국 대중음악의 식민지라고나 할까 뭐라고 할까요? 그것을 얼마나 잘 따라하느냐? 원어민처럼 발음을 잘 하고 그 음색을 잘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는 심사위원들의 평가 기준이 될 정도입니다. 선율의 틀과 리듬을 그대로 갖고 와서 새로운 변주를 하는 것도 창작입니다만, 그 장르와 형식에 충격을 주고 변형을 추구하기에는 태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몇 예술축제가 문화예술 향유의 영역을 넓혀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축제는 두레축제를 망가뜨리는 역할을 주로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더 심각한 일은 축제의 주체인 시민들이 사라져버리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벤트 축제에서는 대부분 관청이나 이벤트 회사가 주인공이 됩니다. 가수들도 전문 예술가들도 초청 대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축제의 진정한 주인공인 시민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가수가 좋아서, 그 예술가가 좋아서, 그 프로그램이 좋아서 축제에 참여하는 일부 시민들과 관중들조차도 즉흥적이고도 일시적인 소비 행위로 끝나버립니다. 그것도 무료니까 와서 보는 ‘구경꾼’으로서 말이지요. 그래서는 시민들은 ‘영원한 수용자’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두레가 사라진 시대에 축제를 어떻게 불러내나?

시민이 주인공이 되고 공동체가 주체가 되는 두레축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축제는 죽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왜?”라고 질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찾아내면 해결할 수 있는 대책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니까요.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하나됨의 추구는 인류 역사에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인간은 원초적으로 디디고 설 공동체라는 마당의 안에 존재 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 마당을 늘 새롭게 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주기적 표현이 1년마다 한 번 되돌아오는 축제였던 것입니다. 특히 생활 주기가 달라지고 개별화 파편화해가는 현대인들의 삶에서는 그 마당이 더욱 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그 본성으로부터의 치유가 주기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으로부터도, 심지어는 부모와 가족 사이에서도 늘 행복한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의 이면에는 상처와 치유가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세상에서랴 늘 상처 받으며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해방과 전복, 자유와 일탈, 난장과 지랄잔치의 카오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집단적인 신명풀이의 마당에서 치유하지 못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병의 근원인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또 쌓이면 단전호흡이나 명상으로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병이 됩니다. 스트레스는 그것을 폭력적으로 해소하던지 아니 해소하지 못하면 중병을 앓던지 하는 것 이외에는 갈 길이 없습니다.

오랜 옛 축제는 두레 내부의 갈등과 쌓인 분노를 신명풀이를 통해서 풀고 공동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탄생’과 새해 새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혁신’의 기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레 공동체가 사라진 지금 이 시대에는 자기표현과 공동의 신명풀이를 통해서 서로 간의 소통으로 개인의 해방과 ‘나’ 존재의 안마당을 다시 확인해 나가는 축제, 두레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축제를 새롭게 불러내야 할 것입니다. 따라쟁이 인간이 아니라 창조하는 인간들의 연대를 위해서 축제를 통해서 이웃과 새롭게 소통하고 새로운 두레의 문을 두드려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