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숨은 이야기] 우각리와 인천 감리교 선교

인천의 숨은 이야기

우각리와 인천 감리교 선교
  

글_이성진(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교사,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조선 말기,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많은 근현대사의 유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속의 인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통해 인천의 숨은 매력과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천의 또 다른 기억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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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원시와 우각리
조원시는 1867년 8월 14일 미국 뉴욕 모오크(Moawk)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조원시가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은 1881년 14세 되던 사춘기 시절 주일 밤 예배 때 한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영적 체험을 한 이후부터이다. 1887년 유티카 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준비하다가 그 해 9월 해외선교에 뜻을 두고 뉴욕 미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해외선교 훈련을 받았다. 1887년 12월 뉴욕 지방회에서 선교사 자격지위를 얻은 후, 1888년 1월 미북감리회 세인트존스리버(St. John’s River) 연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1888년 5월 17일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을 밟았다. 그 즉시 서울 정동 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로 왔다. 한국선교부에는 이미 아펜젤러, 스크랜튼, 올링거가 정동 선교기지를 중심으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20세에 불과한 조원시는 배재학당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 선교를 위해 한글도 배웠다. 그 당시 배재학당 학생이면서 도서관 사서로 있던 강재형과 최병헌으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다. 그래서 한문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선교사였다. 그래서 이후 조원시는 조선역사와 문화, 종교에 대한 해박한 견문과 지식을 쌓았고 집필을 통해 한국 문화 역사를 올바르게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91년 6월 한국선교연례회에서 장로사(Elder)로 인준 받고 한국선교회 서기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2년 배재학당장인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로 미국으로 귀국하자, 1년 동안 배재학당장 서리로 재직했다. 또한 1892년 1월 제물포 지역 담당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물포 지역을 전적으로 담당하지 못하고 전임 담당 선교사였던 올링거처럼 한국인 본처전도사인 강재형 부부에게 일임하고 서울 정동에 주재하였다. 전임자 아펜젤러처럼 토요일 저녁에 제물포에 와서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월요일 아침 일찍 서울 올라왔다. 1893년 5월 이화학당 성경, 음악 교사인 마가렛 벤겔(Margaret J. Bengel)과 결혼을 하면서 제물포 주재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원시는 제물포에 주재하면서 용동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조원시는 강재형 본처전도사와 함께 열정적인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교육사업은 조원시의 선교전략에 있어 가장 핵심이었다. 그래서 강재형과 함께 1893년 3월부터 남자매일학교(Boy’s Day School)를 세워 운영하였다. 주로 소년들에게 한글, 성경, 찬미가, 영어, 한문을 가르쳤다. 1892년 4월 30일부터 제물포 여선교사로 파송된 벤겔이 함께 온 전도부인 이경숙(선교사들은 Ni부인이라고 함), 강세실리아(강재형 본처전도사의 부인)과 함께 본격적인 제물포구역 여성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892년 가을 전도부인 이경숙은 스크랜튼 대부인의 요청에 의해 다시 서울 정동으로 올라가고 황해도 곡산 과부 백헬렌(혹은 변헬렌)을 곧바로 파송하였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전도부인 백헬렌이 제물포 구역으로 오면서 여성선교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조원시가 결혼한 직후, 제물포에 주재할 시기에는 남자 교인은 불과 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30명은 여자 교인이었다. 그리고 주일학교가 개설되어 2명의 교사와 18명의 아동이 다니고 있었다. 특히 백헬렌은 대부분 집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방물장수로 위장하여 전도를 했다. 원하는 물건을 아주 싸게 팔며 마음을 열게 한 다음 쪽복음서 팔며 복음을 전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많은 여자들을 전도했다.

조원시는 제물포 교회가 어느 정도 교회다운 틀을 갖추게 되자, 1893년 가을부터는 선교영역을 넓혀 강화로 선교지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연안을 중심으로 한 서한국 선교지로 확장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이를 하나하나 다져나가는 일을 추진했다.
1894년말에는 제물포교회도 어른 18명과 어린이 8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입교인 13명, 학습인 45명이 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런 급성장은 교인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나서서 여성전용예배당을 건축했다. 미감리회의 지원받지 않고 제물포교인들에 의해 건축한 한국 최초의 자립예배당이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은 제물포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십자가기를 달면서 전쟁의 직접적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조원시는 제물포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한국지방을 선교영역을 확장하는 선교전략을 세우고 그 중심이 되는 선교기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선교기지(station)은 보통 선교사 숙소를 중심으로 교회-학교-병원이 형성되는 트라이앵글을 말한다. 서울 정동은 선교사 숙소를 거점으로 벧엘교회(정동제일교회)-시병원-배재, 이화학당이 배치되었다. 이 곳은 한국 감리교 선교기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원시는 제물포에서도 선교사 숙소를 거점으로 하는 학교-교회-병원이 하나로 이어지는 선교기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제물포 뿐만 아니라 평양, 원산, 진남포, 해주, 공주 등지에도 선교기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물포 선교기지에는 병원을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영국 성공회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누가병원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중복해서 감리교 운영 병원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성누가병원이 그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실제 청일전쟁 이후 콜레라가 크게 전염되는 시기에 조원시 부인 벵겔선교사는 교인 환자를 성누가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으며 강세실리아를 파송하여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미감리회 여선교회에서는 1926년 홀부인 주도로 부인진료소가 처음 세웠다.
1895년 조원시는 우각리 42번지 일대를 매입한 후, 곧장 우각리 선교기지를 구축하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고자 했으나. 존스여사의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선교기지 사업은 연기되었다.

1897년 조원시가 다시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우각리 선교기지 구축사업에 진행되었다. 조원시는 이 사업을 직접 지휘 감독하기 위해 우각리 선교기지터에 작은 방갈로를 짓고 상주하면서 독자적인 선교사업을 진행하였다. 교인들이 기독교 교리를 학습하고 토론하기 위해 우각리 방갈로로 찾아오면서 명실상부한 서한국지방 선교기지로 만들어 나갔다.
1898년 1월 조원시는 서한국지방 선교기지의 거점을 마련하고 에즈베리(Asbery)목사관(현 창영교회 자리로 알려짐)이라고 명명하였다. 에즈베리는 미국에 처음 감리교를 전파한 영국 감리교 목사인데, 조원시는 에즈베리 목사를 존경하고 자신도 한국땅에서 에즈베리 목사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에즈베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1901년 우각리 에즈베리예배당 (출처 한목예배당 사이트)

2. 알렌과 조원시의 관계
조원시는 선교기지 부지로 알렌별장이 있으며. 조선 황실 이궁 예정지로 경인철도 우각역 개설이 되는 우각리 42번지 일대를 멕시코 화폐 600달러 가격으로 매입했다. 조원시에게 알렌이란 존재는 은인이었다. 조원시는 조선 땅에 와서 선교활동과 조선의 역사. 문회를 연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땅투기를 한다든지 장사를 하는 등의 불법 행위도 행했다. 이는 조원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입국하였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행위를 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조원시는 직접 상행위를 하지 않고 조선인을 내세워 간접 상행위를 주도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논산 관아에 이런 불법 상행위가 적발되면서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추방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때 알렌이 앞장서 이를 무마시켜 주었다.
이후 1901년 12월 알렌의 미국 정치적 후원자 데쉴러의 아들이 조선에 들어와 하와이 이민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조선인 지원자가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 알렌은 조원시에게 하와이 이민 사업을 적극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원시는 제물포에 동서개발회사 사무실을 개소하게 하여 제물포 교회 핵심 인물들을 배정하여 적극 개입하였다. 조원시는 설교를 통해서 하와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하면서 제물포, 강화, 황해도 일대 교인들을 하와이 이민을 지원하도록 독려하였다. 심지어 강화 한 지역의 교회는 교인 대다수가 하와이 이민을 지원하여 교회가 해체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알렌과 존스와의 밀접한 관계는 존스가 1903년 아펜젤러가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있은 후, 이를 수습하고 한국 선교 사업을 이끌기 위해 서울로 가게 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알렌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가 일본군으로부터 군사위협을 받는 등 위험상황에서 밤에 궁궐에 들어가 지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1897년 존스목사 가족 사진

3. 한국 서지방 선교기지 에즈베리 목사관
1898년 1월 완공된 에즈베리 목사관은 선교사들이 묵으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널은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방이 7개인 벽돌집이었다. 조원시가 미국 뉴욕 출신인 관계로 친구인 로체스터(Rochester)의 딘 엘보드(Dean Alvord), 유티카(Utica N.Y.)의 샌본(Geo W. Sanborn), 트로이(Troy)연회의 휴즈(W.H. Hughes)목사 등이 재정지원을 했다.
조원시는 우각리 에즈베리 목사관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터전을 마련했다.

‘베란다가 있는 간단한 목조와 단층 벽돌집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이 지역 전체로 복음을 전하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지식을 학습하는 교육장이면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선교사들의 휴식처로 제공될 것이다. 날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진리가 나뿐만 아니라 조력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곳이 될 것이다.’
조원시는 나인데 청년회와 함께 에즈베리목사관을 중심으로 해서 매 주일 특별전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도록 하면서 청년들이 주체의식을 갖고 민족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강화 교동과 홍의 지역 교회에 계삭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4. 조원시의 저술, 신학회 활동과 신학월보 발간
조원시는 제물포에 주재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특히 에즈베리 목사관 거주 시절을 통해 코리아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 코리아리뷰(Korea Review), 대한크리스도인회보, Gospel in all Lands 등에 한국선교상황, 한국 풍속, 한국 역사, 한국 종교 등에 관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다.
또한 1899년 12월 우각리 에즈베리 목사관에서 아펜젤러, 노블 등과 함께 최병헌, 노병선, 이은승, 김창식, 김상임, 복정채, 김기범 등 초기 감리교 한국인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1900년 1월 23일부터 2월 3일까지 12일간 김창식, 오석형, 김기범 등 12명이 참석하는 신학회를 개최했으며 이것이 계가가 되어 협성성경학원(현 감리교 신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00년 9월에는 성서번역실행위원회 정기모임이 열려 실행위원 하아디, 벙커, 오웬, 콜리어 등이 참석했으며, 번역위원 아펜젤러, 게일, 언더우드, 루미스 등이 참석하였다.
같은 해 12월 최병헌 등과 함께 한국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를 우각리 에즈베리 목사관에서 발행했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교회 현장의 신학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신학교재인 신학월보를 발행했다.

‘월보는 선교지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요청, 즉 기초신학에 대한 욕구 때문에 발행되었다. 신학문서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내용들이 한국말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공인 역본 신약성서조차 없다. 반면 우리에게는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뭔가 먹여야 할 것이다. 중요한 진리라든가 기독교 원리에 대한 정리가 제공되어 한국인들이 스스로 그 진리와 원리들을 탐색하고 탐구하도록 헤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에게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 그들을 훈련시키며 신학이나 교회사, 성경주석 혹은 목회학과 같은 신학주제들을 그들이 실지로 운용하고 살펴보도록 해 주어야 한다. 신학월보의 특별한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조원시가 발행한 신학월보는 초기 한국교회의 교인들의 신학교재로 사용되는 등 소중하고 귀중한 신학잡지 역할을 했다. 

5. 남녀 선교사 기숙사 건축과 선교영역의 확장
1899년 제물포교회는 교인이 137명으로 급격하게 증가되면서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기존 예배당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전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공간부족으로 불신앙인을 초청 전도하는데 한계에 봉착했다. 그래서 조원시는 자신의 거처인 에즈베레 목사관을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육하는 공간으로 개방했다. 1900년에는 제물포항에 조원시가 소유한 땅을 조선정부에 매각하고 제물포 외곽지대에 넓은 땅을 매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서 미북감리회 한국 선교부는 우각리를 중심으로 해 금곡리, 송림리 일대  2/3에 해당하는 넓은 땅을 매입했다. 박철호 선교사의 연구에 의하면 현재 남선교사 기숙사, 여선교사 기숙사, 창영교회, 영화학교 일대인   36,38,40,41,42,43번지를 위시하여 6,500평, 금곡리 46,57,58, 86번지 등에 2500평, 송림리 159,160,161,162,163164번지 일대 3,400평 등 1만4천4백평의 땅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1903년 싸리재 영화여자소학교

1900년 6월24일 조원시는 제물포교회의 예배당을 헐어내고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임시예배처로 우각리에 구 예배당의 건축자재를 재활용해 에즈베리 예배당을 건축했다. 1901년 12월 성탄절 예배를 새로 건축한 웨슬리예배당에서 드릴 때까지 임시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후 이 공간은 제물포여자매일학교(현 영화학교) 교사로 사용했다. 그러나 조원시가 1902년 5월 휴가차 일본에 가 있는 사이 복정채전도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복정채의 며느리와 손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터전 위에 1904년 2층 규모의 아담한 남선교사 숙소(현 인천세무소 현관 자리), 1905년 아래 여선교사 기숙사(겜블홈)이 건축되고, 1911년 9월 영화여학교 신교사가 건축되면서 명실상부한 인천 감리교의 선교 중심지로 거듭났다.

▲1905년 건축한 갬블홈(여선교사기숙사)

여선교사 기숙사 건축은 1904년 한국서지방의 선교영역이 제물포, 강화. 남양, 황해도 연안 등지 확장되면서 여자신자와 매일학교 학생을 가르치는 전문 여선교사가 주재하기 시작했다. 힐만, 밀러, 스나블로 등 4명의 여선교사가 활동했다. 그러나 마땅히 거주할 숙소가 없어 고민하던 중 1905년 당시 한국서지방 담당 선교사인 케이블이 미국 신시내티 지부 윌리암 겜블여사의 기부금으로 아담하지만 호화로운 여자기숙사를 건축했다. 케이블선교사가 직접 인부를 동원해 건축감독을 할 정도로 치밀하고 튼튼하게 건축하도록 했다. 1층은 여자 신자 사경회 등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고 2층은 여선교사 숙소로 활용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서울, 평양, 개성, 공주, 수원 등지의 선교사들이 하기 휴가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6. 영화여학교의 이전과 인천 근대 여성교육
영화여학교는 1897년 벤겔 선교사가 용동예배당에서 여선교회 직영 여자매일학교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매일학교 운영에만 전념할 수 없어 이화학당 교사출신인 교육전문 선교사를 초빙하여 이를 감당하게 하였다.
1901년 에즈베리 예배당으로 임시 이전하면서 여자매일학교도 함께 이전했다. 1901년 12월 웨슬리예배당이 완공되면서 이전해가자, 힐만 선교사가 운영하는 우각리 여자매일학교로 남았다. 벤겔 선교사 운영하는 용동 웨슬리예배당에 제물포 여자매일학교가 옮겨 가자, 에즈베리 예배당에서 운영되던 여자매일학교 틀을 그대로 유지해 우각리 여자매일학교를 힐만 선교사가 운영했다. 그러다가 1902년 6월 화재로 우각리 여자매일학교가 문을 닫게 되는 운염에 처해지자. 미국 네브라스카 목재상인 콜린스의 기부로 싸리재에 120평의 학교부지를 마련해 제물포여자매일학교와 우각리 여자매일학교를 통합했다.

▲우각리 에즈베리선교기지-출처 한목예배당 사이트

1903년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가 되어 이화학당 출신이 교사로 부임하면서 제물포여학교는 초등과정에 국한해 교육하고 중등, 고등과정은 이화학당에 담담하도록 하는 교육체제가 구축되어 김애리시, 김활란, 김애마, 서은숙, 최활란, 김영의 등이 제물포여학교 3~4년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곧바로 이화학당에 입학하는 연계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1911년 9월14일 싸리재 영화여자소학교는 다시 우각리로 새교사를 건축해 이전했다. 미국 여선교회의 기부금 43,185엔과 여자아이의 헌금 38.31엔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 당시 현대식 교사를 마련해 이곳을 통해서 인천의 여성교육의 메카 역할을 감당했으며, 1917년 3월28일 인천에서 최초로 한국 유아를 교육하는 유치원을 개원했다. 그 당시 유아 교육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시기인 까닭에 소수의 기독교인을 제외하고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화유치원은 원아들의 교재 교구는 미국에서 주문하거나 기부로 완벽한 유아교육기관의 면모를 갖추고 출발했다. 그러나 1975년 영화학원은 초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 영화유치원을 인천기독교 사회복지관으로 운영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영화유치원은 구도심권의 공동화되면서 유아들을 모집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2002년 3월 폐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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