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인문학] 신포동 신신옥 우동





신포동 신신옥 우동


                                                                                                                                    

이종복 ㅣ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돈이 없어도, 호주머니 탈탈 털었어도 먼지조차 안 날 정도로 돈이 없던 시절은 없었다. 스무 살 무렵이다. 학교 간답시고 어머니께 천원을 어렵게 받아내면, 교내 식당에서 파는 백 원짜리 라면에 도시락으로 싸온 차디찬 밥 한 모(?)를 말아 먹는 게 고작이었고, 빨아대지 않으면 저절로 꺼져버리는 백 원짜리 담배 ‘환희’에 부아가 나 이백 원짜리 ‘청자’를 사버리면, 나머지 칠백 원의 행적에 대해 요모조모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였다. 전철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는 버스비도 내야했으므로 자칫 관리를 안 하면 순식간에 남 신세 지는 게 다반사였다. 가뭄에 콩 나듯 여학생과 약속이 잡혀 다방에라도 갈라치면 한 잔에 이백 오십 원 씩 두잔 값이 들었고, 이마저 없으면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삼십 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유유자적 거리를 헤매기도 했었던, 스물의 초상은 잿빛처럼 탁하고 궁색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선배가 되고부터는 돈 씀씀이가 더 커졌다. 년 전의 ‘나’들에게 현재의 ‘나’가 해줘야 할 몫이었으며, 의례히 선배는 후배들을 조건 없이 대접해야 했던 분위기도 작동하였다. 스터디를 마치고 혹은, 놀 거리가 농구 아니면 축구였던 고로 최후에는 선배 모드 타이머가 돌아가 스톱워치가 멈출 때까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오가다 아는 사람 만나면 즉석 구걸을 해서라도 밥 한 술 뜨게라도 해야 했었다. 그럴 즈음, 찾던 곳이 신포시장에 있는 신신옥 우동 집이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음은 물론, 외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떼거리로 몰려갈 때엔 최적의 코스로 꼽혔다. 네 째 형님의 친구이자 답동성당 대학생회의 선배인 진우 형의 이름을 팔아 공짜로 먹을 때도 있었고, 앞뒷집 사이를 들먹이며 이른바 ‘가리’를 긋기도 했었다.

   신신옥은 1958년 개업한 이래 지금껏, 신포동에서 대를 이어 즉석우동을 말아주는 곳이다. 지금은 20여 평 남짓한 공간으로 줄었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이보다 족히 열 배는 넘었던, 그야말로 인천에서 제일 규모가 컸던 우동 집이었다. 십여 명의 직원들과 박관옥 씨 내외 그리고 홀 서빙을 맡았던 딸들을 포함하면 족히 이십 명 가까운 인력들이 지지고 볶는 가운데, 열 시부터 밀어닥치는 손님들까지 치면 수천 명의 손님들이 오가던 명소였다. 밀가루 반죽하는 사람들, 압착 틀에 반죽을 넣고 지렛대를 이용해 면을 뽑는 사람들, 면을 끓여 그릇에 넣으면 국물을 넣고 고명으로 튀김가루를 뿌려주는 사람들, 나무 박피에 장어 튀김을 올리고 무즙에 겨자를 얹어주는 사람들, 거기에 걸걸하고 우렁찬 이북 말씨의 박관옥 씨가 주방을 향해 주문을 날리는 외침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도떼기시장 저리 가라할 정도로 북적거렸다. 무엇보다 장관이었던 것은 펄펄 끓는 육수 가마에 시뻘겋게 달군 긴 쇠막대를 담그는 모습이었다. 멸치와 다시마 무 등을 넣고 끓인 육수의 텁텁함을 없애기 위해 달군 쇠를 가마에 던져 넣듯 하는 것인데, 넓적하게 생긴 트럭의 겹판 스프링으로 보이는 것이 가마에 들어가면 ‘촤악’하는 커다란 굉음을 내며 토해낸 수증기가 순식간에 실내를 덮어버리는 게 신기방기 했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지만, 여전히 그 맛에 그 느낌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즐거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신포시장은 변모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경험했을 1927년 개장된 시장의 그것과는 천지차이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를 전제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변해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이상하리만치 신신옥 우동 집은 기억의 벽면에 걸어 놓은 명화처럼 보고 또 봐도 전혀 싫증나지 않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추억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반세기 넘도록 친구로 존재하는 이웃들과 부랄 친구들은 여전히 신신옥 우동을 얘기 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음식이지만 동네의 역사를 담고 있고, 아기 손가락 굵기 만한 우동 발을 떠올리며 칠흑 같던 시대, 경제난에 허덕이던 청년들의 배를 기름지게 채워주던 선한 문화였다는 것에 저절로 박장대소가 터져 나온다.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 쉽게 먹을 수 있는 요즘. 그까짓 우동 발 몇 가락에 행복감이 찾아들겠냐마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과 당대에 신신옥 우동을 먹었음으로서 얻은 충만한 존재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분명 아니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