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주체적 상상과 실천의 길로 향한다.


전철원 (모씨네 사회적 협동조합 대표)

그야말로 팬데믹. 2020년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으로 전 세계가 혼란과 고통에 빠졌다. 현재까지 약 2천7백만명이 확진되었고, 9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는 1918년 발생하여 2년 동안 무려 5천 만명 이상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을 연상시킨다. 사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과 직접적 관계는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이 변종 인플루엔자의 발생과 전염에 관해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무튼 당시의 과학기술 및 의료체계 수준이 낮았던 것에 더해 1차 세계대전이라는 상황까지 겹친 탓에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이 감염되고, 그중 17% 가까이가 숨지게 되었다.      당시에 비해 의료체계도 현대화되고 공중보건도 발달한 2020년이지만, 코로나19는 1918년만큼이나 재난적 상황으로 세계를 덮치고 있다. 강력한 전염력과 높은 치사율을 가졌을 뿐만아니라 감염 초기 혹은 무증상 상태에서조차 전염성이 높아 감염을 피할 마땅한 대처 방안이 없고, 안전한 치료제 혹은 백신의 개발은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하고 확실한 예방방법은 감염자와의 접촉(정확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활동하는 비말)을 피하는 것뿐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방역당국은 소위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 거리두기는 1단계를 제외하면 사실상 일상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포함된다. 2단계가 되면 실내에서는 50명 미만만 모여야 하고, 실외에서도 100명 미만만 모일 수 있다. 고위험시설로 분류된 12종의 경우 집합금지되며, 각급학교 역시 등교인원을 축소하게 된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문화예술체육시설들 또한 모두 문을 닫는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인천은 2단계보다 높은 사실상 3단계에 가까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유지 중이다.
전염의 확산을 막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감염 가능성의 차단, 즉 물리적 접촉의 최소화인 상황에서 방역당국이 요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두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그에 대한 의료적 대응력이 생기기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개인 스스로 전염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소위 ‘국민 이 방역의 주체’라는 소리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방역 주체로 호명되는 ‘국민-개인’은 사실상 일정 수준의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미디어 사용 및 이해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또한 지역사회 혹은 다양한 공동체와의 강도 높은 물리적 차단이라는 환경에서도 일정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이 되어야 하며, 관계의 결여가 만드는 심리적 고립을 견뎌낼 정서적 안정감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국민-개인’이 우리 사회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사실 코로나19 감염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할 것임은 자명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보면, 이 감염병은 기저질환자에게 훨씬 치명적이다. 즉 기저질환을 가진 이들의 경우 훨씬 높은 사망률을 가지게 되는데, 상당수의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뿐만이 아니다. 확진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일자리, 돌봄의 관계망이 얼마나 더 축소되고 차단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들은 훨씬 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받아야 하고,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감염에 대비한 의료적, 복지적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따로 있다. 아동,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들은 방역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국민-개인’이 되기 정말 어렵다. 이들은 물리적 차단과 심리적 고립을 장시간 견뎌낼 만한 준비가 덜 되어 있거나 거의 갖지 못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종종 물리적 차단과 심리적 고립에 쉽게 빠지게 되는 환경에 놓인다. 그 원인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말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사회는 그동안 사회적 돌봄의 체계를 마련하여 사회적 약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체성과 역량을 회복하고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바로 이 사회적 돌봄 체계가 코로나19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이제 감염을 통한 생명의 위협뿐 아니라 사회와의 강제적 차단에 의한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고 그렇게 무너진 일상 탓에 생존이 위협받는 건 사회적 약자만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여러 측면에서 그 위험의 정도가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다.

현 상황에서 ‘물리적’ 거리두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전염 그 자체의 확산은 차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 즉, 단절과 소외로부터 비롯한 정서적 상처의 축적, 준비되지 않은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학습의 불균형, 유년기 및 아동기에 이루어야 할 발달의 지체, 소상공인의 몰락이 가져오는 지역경제의 쇠퇴 등을 가벼이 여기고 후차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우리가 전염 그 자체의 공포로 인해 뒤로 미뤄두는 이 문제들이 내년이나 내후년, 혹은 십수년 이후에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문제로 표면화할 수도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유년기 및 아동‧청소년기 발달의 지체와 고립이 만드는 정서적 상처의 축적이 훨씬 걱정되는데, 무너진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발달과 상처의 회복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최근 몇 년의 시간 동안 이러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기초 역량을 준비해 왔다. 삶을 영위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문제를 생활의 영역에서 함께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한 주체들을 탄생시켜온 ‘마을공동체’ 활동이다. 마을공동체 활동이 이 엄중한 시기에 어떤 가능성을 드러냈는 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얼마전 인천 연수동의 함박마을 활동가들은 6천명 외국인들에게 ‘마스크’를 쓰게 하여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건강하도록 생활방역물품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인천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마을공동체들이 응답하여 십시일반 마음과 정성을 모았다. 이것은 국가/방역당국이 미처 발견하기 어려운 방역의 사각지대를 먼저 발견하고, 그 해결까지 도모한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로서 역량을 발휘한 것은 앞서 제기된 ‘국민-개인’이 아닌 ‘마을공동체’였다. 엄밀히 말해 ‘국민-개인’은 자신을 최대한 고립시킴으로써 지키는 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는 진짜 ‘방역’과 ‘안전’을 이루긴 어렵다. 비단 함박마을의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는 이미 생활세계에 있는 타인의 ‘방역’과 ‘안전’이 함께 되었을 때 비로소 나도 안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난 상황일수록 정말 안전한 사회는 생활세계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함께 활동할 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코로나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대면과 접촉을 요구한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거리는 멀리, 마음은 가깝게’는 돌봄과 공동체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허구에 가까운 주장이다. 물리적 시공간을 함께 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생활세계를 함께 지키는 실질적 대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게다가 생존은 물질적이다. 정서적 문제 또한 추상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또한 원인의 발생과 해결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물질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달은 공동의 시공간에서 감각적 활동을 함께하면서 서로와 세계를 대면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마을공동체’의 활발한 활동과 만남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방역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생활세계의 주체’로서 말이다. 사실 코로나 시대가 가져온 온라인의 확장은 마을공동체의 안팎으로 대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도구를 제공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그동안 마을공동체가 공유되어야 할 정보의 신속한 생산과 소통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왔는데, 그런 발전이 코로나를 맞아 정말 혁명적으로 대중화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유튜브로 대표되는 온라인 플랫폼을 전세계를 상대로 개인의 이야기를 발송하는 매체로만 이해한다. 그런데 조금 달리 보면, 온라인 플랫폼은 공동체 안의 이야기를 공동체 구성원들과 동시에, 다양하게, 쌍방향으로 나눌 수 있는 매체이다. 온라인이 발전하기 전 즉, 전파의 시대까지 개인의 발화가 다수에게 닿는 방식은 ‘방송’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방송’은 국가에 의해, 자본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러한 통제를 벗어나 공공재인 전파를 통해 시민 스스로 방송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퍼블릭 액세스’를 시도하였고, 일부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여전히 심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플랫폼은 이러한 제약이 거의 없다. 누구나 채널을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영상과 소리를 보낼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그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물론 약간의 기술적 이해와 도구를 갖춰야 하지만, 그것이 그리 높은 허들은 결코 아니다. 이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공동체 안에서 채널에 관해 미리 협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모두가 존재를 모르는 게 온라인에 만들어진 채널이다. 그래서 온라인플랫폼을 활용하여 ‘마을공동체’ 안팎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을 채널’을 만들겠다는 공동체 공동의 결정이다.

반년을 훌쩍 넘긴 코로나 시대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많은 계획이 무너졌으며, 공동체의 안녕 또한 무시로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힘든 점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무력감’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방역의 결정권은 국가에 있고, 정보는 제한적이며, 실척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우리에게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가져온 낯선 충격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마을공동체’를 일궈온 우리 스스로의 주체 역량을 믿고 대안을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나서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 충격의 낯섦은 많이 사라졌고, 재앙의 형태와 경로는 거의 밝혀졌다. 함박마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은 주체적 상상과 실천, 연대를 통해 팬데믹 시대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음 또한 증명했다. 그러니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않을까? 나와 이웃이 함께 살고 있는 생활세계의 문제는 삶의 구체적 장소인 ‘마을’의 시민들이 만든 ‘마을공동체’가 풀어야 한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을 넘어 지역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고, 학습의 불균형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유년기, 아동‧청소년기의 발달을 지켜내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돌봄까지 시야에 진짜 해결방법은 구체적 고통을 같이 겪고 있는,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의 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