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공동체와 지속 가능한 지역사회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1. 갑질이 만연하는 사회

건물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신규 분양 아파트의 입주 직후 자잘하게 생겨나는 하자를 건설회사의 하도급을 받아 수리해주는 일을 하시는데, 사회의 변화를 체감한다고 하셨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주민들이 매우 거칠어졌다는 것이다. 수리하러 갔을 때, 화를 많이 낼 뿐 아니라 마치 자기를 대놓고 비하하고 심지어 머슴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비싼 돈을 주고 들어온 아파트에 하자가 발견되니 속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일하러 온 사람을 타박하고 모욕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 그분 말씀이, 10년 전에 그 일을 시작할 때는 주민들이 그렇게까지 하대하지 않았는데, 요즘엔 대면하기가 겁난다고 한다.

그분이 체감하는 사람들의 마음 풍경은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0년이 지나면서 감정 노동이 가혹해지고 사회 곳곳에서 갑질이 횡행하는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자잘하게 부딪히는 일들에서 정서적인 곤경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듯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통계 자료가 하나 있다. 다음소프트에서 2016년 7월 한 달 동안 트위터와 블로그의 글 5만여 개 분석한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SNS 게시글에서 ‘인간관계’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들을 뽑아보았더니, ‘무섭다’가 1위로 나왔다. 그다음으로 ‘허전하다’ ‘힘들다’ ‘스트레스’의 순서로 집계되었다.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원인 가운데 가장 많이 지목되는 것이 과중한 업무와 함께 조직 내 인간관계다. 상사, 동료, 부하 직원들과의 소통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혐오 감정의 만연도 이렇듯 황폐해지는 사회적 풍토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에 왜 이런 분위기가 짙어졌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 요인을 중심으로 논의해보겠다.

첫째, 저성장이다.

한국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초고속 압축 성장을 이룬 나라다.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국민 소득이 600배, 수출이 1만 배가 늘어났다. 그 시기 동안 팽창하는 경제 규모와 인구 증가 속에서 삶의 기회가 넉넉하게 주어졌다. 절대 빈곤이 빠르게 극복되는 상황에서 상대적 빈곤은 비교적 덜 예민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노력하면 생활 여건이 크게 향상되었고, 오늘 좀 고달파도 내일은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성장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 수준의 자존감을 유지해주었다.

IMF 금융위기 이후 경제는 크게 활력을 잃었고, 부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흘러도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전체적인 속도가 떨어지는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날카로워진다. 자동차의 주행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옆 차선의 자동차들이 시속 100㎞로 달리는데 내가 있는 차선은 70㎞로 달리는 상황, 그리고 옆 차선에서는 시속 20㎞로 달리는데 나는 10㎞로 달리는 상황,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짜증이 날까. 전자에서는 30㎞, 후자에서는 10㎞의 격차가 있다. 절댓값으로 보면 전자의 상황이 훨씬 견디기 어려울 듯하지만, 실제로는 후자가 더 화가 난다. 더구나 시속 80킬로 정도의 속도로 줄곧 내달려오다가 갑자기 10~20킬로의 정체 구간으로 접어들면 그 답답함이 가중된다. 그나마 그 정도 속도로라도 전진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아예 꽉 막혀 꼼짝하지 않고 뚫릴 전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좌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갓길로 몇몇 차들이 쌩쌩 달려가고 있다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 우리의 경제 상황이 바로 그런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회적 단절이다.

OECD가 세계의 주요 국가들의 상황을 조사하여 매년 발표하는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dex)를 보면, 한국은 경제 수준보다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매우 두드러진 것이 공동체 부문이다. 살아가면서 친밀감을 나누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아주 희박한 것이다. 급격한 인구 이동 그리고 도시의 난개발로 인해서 이웃 관계가 증발했고, 가족 사이의 유대도 허약해졌다. 일인 가구의 증가와 거기에 맞물려 고독사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데, 개개인의 삶이 영위되는 사회적 토대가 부실해지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지속해서 맺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볼 수 있다.

경제가 다소 어렵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극단적인 지경에 몰린다는 느낌이 크게 경감된다. 돌봄의 문화 속에서 물질적인 결핍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완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들과의 결속을 통해 궁핍에서 비롯되는 자괴감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고립과 소외가 깊어지는 가운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는 만남은 점점 어려워진다. 사람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삶의 즐거움을 증진하는 장(場)을 적절하게 주지 않을 때,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생겨나기 쉽고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셋째, 정보의 폭발이다.

한국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고 일상화되었다. 온라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도 엄청나다. 각종 사이트에서 방대한 정보 검색이 이뤄지고, SNS에서 광범위한 교신이 이어진다. 각종 연(緣)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카톡방이나 밴드에서 활발하게 소통한다. 이러한 미디어 풍경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단절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은 피상적인 접속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일시적인 권태를 달래주기는 하지만, 충만한 행복감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는 욕망을 부풀림으로써 삶에 대한 허기를 부추길 수 있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너무 잘 생기고 돈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사진은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많이 노출될수록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무한하게 팽창하는 온라인 공간은 감정의 배설구로 변질되기 쉽다. 혐오 발언의 대부분이 사이버상에서 이뤄지는 현상이 그것을 증명한다. 익명으로 아무 말이든 쏟아낼 수 있는 게시판이나 SNS에서는, 대면적인 상황이라면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언사가 거침없이 분출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안에 대해 차분하게 토론을 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되어 격렬한 표현과 극단적인 주장이 수위를 높여 간다. 사물과 현상의 여러 측면을 두루 살피면서 본질을 탐색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고, 각 집단끼리 믿고 싶은 것만을 붙들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강화하는 사실들만 선별하여 가공한다. 이른바 ‘filter bubble’, ‘echo chamber’가 일어나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은 그런 편파적 확신이 빠르게 자라나는 서식지가 되었다.

정리해보자.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하고 노동시장에의 진입이 점점 어려워진 한편, 사회적 단절과 고립이 맞물려 소외감과 열패감이 깊어진다. 고도성장의 절정기에 폭발한 소비문화, 인터넷을 통해 감각을 자극하는 정보들은 저성장기가 길어지면서 루저 의식을 부추긴다. 좌절된 욕망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에게 증오심을 퍼부으면서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은폐한다. 타인과의 연결이 해체되는 가운데 특정 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하면서 유대와 결속을 도모한다. 그리고 서양의 마녀사냥에서처럼 자신도 언제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연하기에 집단적인 단죄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파시즘이 자라나기 쉬운 토양이 된다.

2. 성찰적인 개인과 시민적 공공성

언제부터인가 ‘맘충’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아이들로 인해 다른 손님들이 겪는 불편함을 부각하게 시키면서 엄마들을 싸잡아 배척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표현 방식을 보면, 사람을 벌레로 격하시키고 있다. 동물적인 비유는 혐오 발언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철학자 누스바움은 이를 가리켜 ‘투사 혐오’라고 한다. 부패, 냄새, 분비물 같은 역겨운 특성을 특정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종속시키는 전략으로 혐오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은 동물이 아님을 암시하면서 대상 집단을 동물적 존재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의도가 거기에 깔렸다고 누스바움은 분석한다.

혐오 표현은 인간이 타인에게 가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다. 존재 가치를 근원적으로 허물어버리는 ‘영혼의 살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혐오는 그 대상이 되는 타인이나 집단을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피상적인 차이를 절대시하면서 이질화하고 비하하면서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심성이 거기에 깔려 있다. 따라서 그러한 경계를 상대화하면서 같은 인간으로서 접속하여 소통하고 더 나아가 삶을 나누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예술 활동이나 자원봉사를 펼치면서 또는 어떤 공동의 과제를 해결해나가면서 서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주문이 틀릴 수도 있는 식당’이라는 독특한 음식점이 화제가 된 바 있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뤄진 일이 있다. 손님이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올 수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것인데, 종업원들이 치매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용객들은 그분들의 인지 장애를 오히려 놀이적인 감각으로 수용하기에 기꺼이 소비자가 되어준다. 그럼으로써 경도 치매 노인들이 사회적인 연결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산본고등학교의 사례도 시사적이다. 그 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인데, 인문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역에서 백안시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일부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켜 주민들은 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교회가 중심이 되어 조식을 거르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아침밥을 해주는 봉사가 시작되면서 관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른들에 대한 감사가 아이들의 마음과 표정과 행동을 부드럽게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는 매점과 카페에 인근 주민들이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교감이 이뤄지고, 다정한 이웃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뭉치면서 부질없는 경계를 치고 장벽을 쌓아갈 때, 근거 없는 혐오 감정이 싹트고 퍼져나가기 쉽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맞아들이는 환대에서 그 감정은 극복된다. 공감의 지대가 넓어지면서 방어 태세를 풀고 무장을 해제할 수 있다. 타인에게 열린 가슴으로 공동체적 유대를 맺고 시민적 공공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맘충’이라는 낙인도 그러한 <사회>의 부실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식당에서 아이가 소란을 피울 때 업주나 다른 손님 등 제삼자가 개입하여 제지하지 않다 보니, 결국 아이를 데리고 엄마가 민폐의 원인으로 등식화되는 여론이 조성되고 혐오 표현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시민적 공공성은 궁극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용과 연민을 수반한다. 자신의 취약함과 그늘을 인정하고 자기 검열 없이 타인을 대할 수 있는 안전한 관계가 창출되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특질이 오히려 개성으로 부각되고 소수자들 사이의 유대를 맺어주는 실마리가 된다. 프랑스에서 비만 여성들이 ‘빅사이즈 패션쇼’를 열어 획일적인 심미 감각에 도전하고 있는데, 새로운 정체성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자존감을 세우는 문화 실천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사회화될 수 있고, 그것이 방어막이 되어 혐오 표현의 피해자가 되는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그 모든 변화는 성찰의 에토스를 요구한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악의와 끊임없이 싸우며 그것이 폭주하지 않도록 단단히 제어하고 차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이를 때까지 생각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작용하는 감정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빨려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러려면 자기 집단에 대한 소속 의식을 늘 거리를 두고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적인 민주화의 결과 한국사회는 많은 것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경제 성장 덕분에 소비 수준도 높아졌고, 정보 혁명 속에서 엄청난 검색과 통신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인 억압과 갈등을 낳는다면, 내면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면하지 않고 불안한 마음으로 타인을 배척하고 짓누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우정으로 연대할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생명의 기운을 서로 북돋우면서 공적 행복감을 누리는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가야 한다.

3. 안전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확장하자

새소리가 들려오는 숲속을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왜 동물들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피해를 보지 않을까? 사실은 그들도 감염이 되지만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집단들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유지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개체 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가깝다고 하는 침팬지들도 100마리를 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인간은 문명과 도시가 발생한 이후 수십만 명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서식해왔고, 이제는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 속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 결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곳에 곧바로 영향을 준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효율적 생산과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구축된 거대한 상호연결망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인류는 여러 가지 재난을 경험해왔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헌신과 돌봄, 자발적인 상호부조, 영웅적인 희생정신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레베카 솔닛은 그것을 가리켜 ‘재난 유토피아’라고 했다. 그런데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그런 위대함이 발현되는 데 너무 제약이 많다.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기가 어렵다. 치료가 최우선인 상황에서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면서 기피와 격리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스스로 위축되고 숨어들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강조되는 생활 수칙은 사회적 거리 두기다. 문명사적 대재앙을 맞은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全) 사회적인 협력을 절박하게 요구받고 있는데, 협력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접촉을 피하고 서로를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경제적인 차원에서 중소상공인 및 자영업과 항공, 숙박, 여행 등의 분야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제조업도 한국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치명타를 입는다. 다른 한편 심리적인 차원에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차단되면서 일상이 극심하게 침체하고, 집에서 가사와 돌봄 노동에 시달리는 주부들의 곤경은 엄청나다.

비대면의 세계가 확대되는 가운데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만일 인터넷이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팬데믹이 왔다면 교육에서 산업 그리고 우리의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타격은 훨씬 컸을 것이다. 사이버 세계가 활짝 열려 있고 그곳에는 바이러스가 절대로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물리적으로 격리되고 고립된 가운데 영상을 소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음울해지기 쉽다. 타인과의 인격적인 교류가 끊긴 채 욕망을 부추기는 이미지들만 하염없이 서핑 하고 있다 보면 불행 감각이 날카로워지기 때문이다. 돈벌이든 인기든 ‘잘 나가는’ 몇몇 사람들에 눈길이 쏠리면서, 이 세상에 나만 뒤처져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그 광활하고 현란한 공간 안에서 대부분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는 너무 어렵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는 건강한 일상을 꾸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갈 곳 또는 마음 편하게 머물 장소가 있어야 한다. 둘째, 돈벌이든 가사 노동이나 돌봄이든 취미 활동이든 공부든 적절한 수준에서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셋째,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적절한 균형으로 배합되어 영위될 때 삶이 온전해질 수 있다.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하거나 문제가 되는지는 사람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타인과의 관계는 행복의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특히 비대면 사회에서 이 부분에서 어려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일과 공부에 매진하느라 소통하는 기술이나 능력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그 약한 고리가 재난으로 일상에 제동이 걸리면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립감과 우울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식구들과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면서 갈등이 깊어진 가정이 적지 않다.

오래 이어지는 사회적 거리 두기는 그동안 우리가 맺어온 사회적 관계들을 돌아보는 쉼표가 될 수 있다. 학연이나 지연을 따라 모임을 만들고,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카톡방을 만들어 교류하고. 그러한 행위들 속에 깃든 마음의 풍경은 무엇이었는가. 오가는 대화들은 삶의 생생한 표현이었는가, 아니면 소란한 세상사의 증폭 또는 누군가에 대한 뒷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가. 서로를 이어주는 고리는 관계 자체에 대한 소망인가, 아니면 이해관계나 권력 관계인가.

관계 속에서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언어를 통해 존재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일찍이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통해 일깨워주었듯이,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신호의 교환이나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리얼리티 자체를 생성해가는 행위다. 내가 너를 어떻게 불러주는가.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어떻게 호명하는가와 맞물려 있다. 바로 거기에서 이야기가 빚어진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은 경험을 의미화하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인데, 그 속성은 유전자 시스템과 달리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똑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전혀 다른 스토리를 지어낼 수 있다. 또한, 시간이 경과하면서 과거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풀어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정체성은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타인과 나눌 수 있을 때 관계는 깊고 넓어진다. 서로의 이야기가 들려질 수 있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삶을 펼쳐낼 수 있고, 이야기가 확장되는 가운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조 모임에서는 회원들이 자신이 어떻게 굴레에서 벗어났는지를 증언하면서 서로의 용기를 북돋는다.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공간에서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자각하면서 변화의 출구를 탐색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안전함이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자신의 지질하고 못난 모습을 애써 감출 필요가 없고, 학력이나 수입, 아파트 평수나 자녀의 성적 등으로 우쭐대거나 주눅 들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면 된다.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달으면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상처를 받고 이런저런 고통에 시달리며 마음이 부서진다. 그런데 마음이 깨지는 모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뉘는데,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이렇게 설파한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질 때 (broken apart), 그것은 폭력의 씨앗을 뿌린다. 수천 개의 사금파리로 폭발하면서 그 파편이 적에게 날아간다. 그렇게 부서진 마음은 해결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자신과 타인을 계속 괴롭힌다. 마음이 부드러울 때,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는 더 커다란 능력으로 부서져 열릴 수(broken open)있다. 그것은 치유의 근원이 되어 타자와의 공감을 심화하고 그들에게 이르는 능력을 확장시킨다.”

인간이 폭력으로 치닫는 것은 고통을 다루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파머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책에서 말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렌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는 사람들은 삶에서 겪어온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타인에 대한 증오로 투사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고통을 고통으로 전가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연민의 마음이 열려야 한다. 고통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절실하다.

방역을 위한 멈춤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고립되고 분절되어간다. 마음을 추스르고 사회를 복원하는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파편화된 <점>들을 <선>으로 잇고, 그것을 다시 <면>으로 조립하는 도전이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 비대면 상황에서 널리 보급된 줌(zoom) 같은 미디어도 활용하기에 따라 참신한 실험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려면 무엇이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잘 분별해야 한다. 인맥의 범위나 소통의 빈도에 집착하지 않고 관계의 밀도를 충실하게 다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리모델링을 위해서 점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이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 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환대의 너그러움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잠시 멈춰선 지금, 우리 안에서 고요함을 되찾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보자. 스리랑카의 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말을 되새겨본다. “존재를 멈추지 않고서는 어떤 생명도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승화할 수 없다.”